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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to the World Nov 22. 2024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끝나가는 2024년, 11월의 기록

수능이 끝났다. 나도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뭐, 끝나고 보니 별거 아니더라. 맛있는 저녁 먹고 집에 와서 가채점하고 했던 그 모든 순간들은 어쩌면 조금 특별하다고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점수가 어떻냐고? 엄청 잘 보지도 않았고, 엄청 못 보지도 않은, 현재로서 감사하고 만족해야 할 점수인 것 같다. 사실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이 세 단어면 충분하다. 그게 수능 다음날 가채점하고 점수표를 확인한 나의 심정이었다. 

    

그거면 됐다. 오늘 이야기가 점수 얘기만 하다 끝날 순 없지 않은가. 큰 의미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어떻게 보면 숫자일 뿐인 것을. 소중한 글자들을 사용해 그런 얘기로 시간 낭비하진 말자.

      

많이 시간이 흐른 줄 알았는데 아직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수능 끝났다고 삶이 크게 변하진 않더라. 그냥 맘이 조금 편해진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이것 하나는 말할 수 있다. 내가 살아냈다. 내가 해냈다. 결국 끝까지 달려왔다. 수능 날, 모든 것이 끝나고 가채점을 하고 살짝 망연자실하여 여러 가지 생각이 다 들던 그때, 나는 도저히 주체할 수 없어 헤드셋을 귀에 올려놓고 찬양을 들으며 일기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일기도 4일 정도 밀린 상태였다.     


그때 들었던 찬양은 Make a Way라는 찬양. 사실 그날 밤까지만 해도 막막해 보이는 게 현실이었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목소리의 찬양 인도자님은 계속해서 고백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길을 만드실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금은 불안한 현실 앞에 내 심정, 시험장 분위기, 오늘 하루 어땠는지 그렇게 거침없이 나를 쏟아내던 시간에 헤드셋에서 Here Again이라는 찬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항상 시험을 앞둘 때마다 생각했던 내가 하나님께 온전한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고 왔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글자를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적는 순간 눈물이 눈에 가득 고이더라.      


내 동생은 내가 우는 걸 보고 수능을 못 봐서 우는 줄 알았다고 다음 날 말했다. 나도 우는 내가 신기했다. 슬프지도 않았고, 마음이 아프지도, 내가 당장은 알아차릴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다만 나는 일기장에 적었다. 나는 내가 지금 대학 1차 합격에서 떨어져서, 수능을 생각보다 못 봐서 우는 게 아니다. 거기에 내 눈물을 흘리기엔 눈물이 너무 아깝다. 그렇게 적고 왜 우는지는 알 수 없어서 그저 앞에서 적은 질문에 답해나갔다.     


But I know here in the middle

Is the place where you promise to be     

I’m not enough

Unless you come

Will you meet me here again

-Here Again

찬양은 흘러나왔다. 찬양 속 모든 사람들이 주님 나를 다시 만나주세요 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찬양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눈물을 흘리며 다른 질문을 또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질문을 계속해서 생각할수록 눈물은 방울방울 계속 맺혔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데요? 이제 여기까지 다 왔어요. 대학 간다고 모든 게 다 끝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살아가야 하는 걸요. 과연 대학에 정말로 가기 원하세요? 나를 어디로 이끌고 계시는 건가요? 정말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요?” 

    

질문들도 끊임없이 맺혀갔다. 그렇게 묻고 울고 쓰며 시간이 지나갔다. 한 가지 확실히 깨달았던 것은 내가 이 질문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을 올 한 해는 뒤로 제쳐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저 수능을 준비하고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이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이 질문은 머릿속 저 멀리 보내 놓았다. 내 삶의 가장 근본이 되는 질문을.     


이 글을 쓰는 오늘 살펴보니 브런치 스토리에도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 놓았다. 나는 이 질문을 계속해서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이 2024, 올해다.    

  

걱정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던, 불안하고 막막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다짐했다. “그래, 지금부터는 이 질문을 붙들며 올해를 마무리하는 거다. 11개월은 그냥 보냈지만, 마지막 남은 하루, 달을 허투루 보낼 수 없다. 나는 이 질문을 계속해서 물을 것이다.”     


그리고 내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의 의미도 깨달을 수 있었다. 감격, 기쁨, 감동, 감사 그 모든 것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내가 결국 다시 이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어서, 돌고 돌아서 내가 결국은 이 질문을 다시 할 수 있는 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서 너무도 감사했다.     


나는 수능이 끝나고 나서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을까, 그 결과에 절망하지는 않을까 너무도 두려웠다. 원하는 결과가 아니면 나는 어떨까. 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안했다. 그러나 막상 닥치고 나니 끝난 것이 너무 감사했고, 결국 그 밤에 내가 거기 앉아, 지금까지는 차가운 공부의 자리였던 공간이 찬양을 들으며 울고 뜨거운 눈물로 적시며 다시 한번 질문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있는 것이 말로 할 수 없이 감격스러웠다.     


일기장에는 두 번에 걸쳐 이 말이 적혀 있다. “비로소 나구나.”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성공을 이룰 만한 기미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밤은 깜깜했고, 아직도 나는 마지막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임을. 막막함의 장막은 걷히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감격할 수 있었던 것은 내 곁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다윗이 시를 쓸 때 어떻게 앞에서는 그렇게 절망하다가 뒤에 와서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간다. 내 상황은 변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막막하고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더라도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시며 나를 이끄시는 선한 목자이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 하나로 모든 것이 충분하다.  

   

그 깨달음 속에서 나는 질문했다.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이것 하나만은 정확하게 원하시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내가 이 질문을 끝까지 해나가기를. 내가 진정한 갈망을 주님께로 돌리기를. 다른 것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기를.  

   

그러므로 오늘 나는 또 살아간다. 어쩌면 평범한 오늘을.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가슴 속에 품고.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떼며 생각날 때마다 묻는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를 어디로 이끄실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올해는 많이 남았다. 그 남은 시간을 주님 안에서 의미 있게 채워 나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마지막 자리가 어디든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의 답을 찾기를 원한다. 나를 지으신 나의 아버지는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이끄시는 분이시니까.      


그래 세아야, 네 기도를 듣고 계신 분이 누구신데.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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