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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수다 왕언니 Jun 05. 2023

아버지를 말하는 방식

[남자의 자리_아니 에르노 저_1984 BOOKS] 를 읽고...

 우리 집은 가난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20대 초반 서울 변두리의 21평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그때까지 나는 변변한 책상이 없었다. 시험 기간에는 밥상을 펴고 공부를 했다. 시험 전날 누워서 자는 다른 식구들을 보며 잠자고 싶은 것을 참느라 애쓰던 기억이 난다. 그런 가난함의 원인을 엄마는 아직까지도 아버지의 무능함이라고 말한다. 그 의견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아버지에 대한 고마운 기억은 단 하나다. 그것도 나의 기억이 아니다. 매번 아버지를 비난하고 욕하던 엄마가 유일하게 칭찬한 일은,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맹장 수술을 했을 때였다. 복막염으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며 응급수술을 해야한다의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수술해 가까스로 큰 어려움을 피한 나를 밤새 간호한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밤에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 나를 위해 간호사실 냉장고에서 얼음을 가져다 내 열을 식혀준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아버지였다고 엄마는 자주 회고했다. 

 

 국민학교 때 연탄장사를 하셨던 아버지는 만삭의 아내를 부려먹어 동네 할머니께 크게 혼났고, 여름에는 집안에서 선풍기를 독차지했다. 그런 아버지를 피해 난 다락방에 숨어 동화 속의 나만에 세계에 빠져있었다. 중학교 때는 중고차 매매 일을 하시는 외삼촌과 함께 일하셨다. 방학이면 매일 12시까지 거울을 보며 치장을 하고 다 늦은 오후에나 집을 나서는 아버지를 난 그때 외면하고 살았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고기 냄새를 풀풀 풍기며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시는 엄마도 안쓰럽게 여기지 않는 못된 딸이었다. 

 

 30대 초반의 어느 날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등기부등본이란 서류를 처음 알게 되었고, 나는 호기심에 인터넷으로 우리집을 조회해 보았다. 서류 상의 우리 집 재산 상태는 엉망이었다. 1억 2천만 원짜리 자그마한 아파트에 근저당 설정이 9천8백만 원. 처음 그 큰 숫자에 당황했고, 사업도 하지 않는 우리 집이 왜 이렇게 빚이 많을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직장 생활을 3년이나 하고 모아둔 돈으로 풍족하게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주시던 아버지의 용돈이 다 그 돈이란 것을 말이다. 그렇다 그간 아버지는 알뜰함이란 거리가 너무도 먼 살림살이로 빚을 억대로 만드셨고,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고 홀로 사기를 치고 있었다. 

 

 어릴 때도 부모님의 애정 어린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내가 성인이 되고 부터는 서로 투명인간 취급을 하셨다. 엄마는 큰 빚에 놀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그런 엄마를 대신에 나는 부모님의 이혼을 강요했다. 나의 결혼 문제로 주저하는 엄마에게 오로지 엄마만 생각할 것을 종용했다. 사실 하루라도 편히 온 식구가 숨 쉬고 싶었다. 아니 엄마와 우리 자매가 숨 쉬고 싶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화가 난 아버지는 다 큰 딸에게 유리컵을 던지려고 손을 높이 드셨지만, 던지라고 앞에서 대드는 딸에게 차마 던지지 못했다. 그 후 엄마와 이혼을 하시고, 걸어서 20분 거리에 전세보증금 4천만 원짜리의 원룸을 얻어 나가셨다. 그 후 세 모녀는 갖고 있던 돈으로 빚 청산을 하고 작은 아파트는 온전히 엄마의 재산이 되었다. 

 

 무능한 데다 부지런하지도 알뜰하지도 않은 아버지, 내 기억 속의 아버지다. 그렇다고 살갑게 나와 내 동생에게 애정을 주지도 않으셨다. 사춘기 딸들과 한방을 쓰면서도 배려심이 없는 아버지 때문에 내 여동생은 나보다 더 힘들어했다. 그런 아버지의 죽음을 나는 2년 전 노원구 복지과에서 보내주는 한 장의 서류로 알게 되었다. 15년 만의 첫 소식이다. 그간 몇 번 엄마에게는 전화가 왔었다는데, 엄마의 이혼 후 결혼을 하고 집을 떠나온 나에게 엄마는 아무 소식도 전하지 않았다. 사인은 심정지, 지병으로 위암이 있었다. 

 

 이혼한 배우자에게는 일절 통보하지 않은 우리나라 법 때문에 내가 제일 먼저 알게 되었고, 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남겨진 세 명의 여자 모두 울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는 자기보다 먼저 죽은 것이 다행이라며, 혹시 자기가 먼저 죽어, 자식들에게 숙제라도 남기고 갈까 봐 걱정이었다고 말했다. 오히려 후련하다며 평안해하셨다. 그런 엄마에게 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아버지의 재산과 부채를 확인하고, 법무사를 통해 나는 동생과 나의 한정승인 상속포기 절차를 진행했다. 카드빚 800만 원, 살고 있던 집의 월세 보증금 500만 원. 적은 금액에 어이가 없었다. 고작 이 정도 스케일의 아버지였던가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에르노는 '남자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의 삶을 미사여구 없이 써 내려갔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단조로운 글쓰기를 나는 따라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말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내내, 나는 온전히 내 스스로의 기억으로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기억의 대부분이 엄마의 필터를 거쳐 건네받은 평가가 전부다. 온전한 진실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도 온전히 쌓아 올리지 못하고, 삶의 순간순간 흔들리는 내가 이제는 이 세상에 안 계시는 그분을 제대로 써 내려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렇게 젊은 시절 엄마를 무시하고 힘들게 했는지 그 속내를 묻고 싶어도 이제는 할 수가 없다. 그 부분이 아쉬운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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