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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롱 Aug 12. 2024

거짓말

허들을 넘는 방법 (단편소설)

은주의 주방 다용도실 문엔 대형 달력이 걸려있다. 달력 위엔 검은색 긴 고무줄에 감긴 모나미 볼펜도 걸려있다. 날짜들 밑에 적힌 내용들은 매우 다양했다. 집안 대소사며 아이의 어린이집 일정, 석 달마다 가는 어머니의 병원일정, 정기적인 세금과 카드값 인출날짜와 금액등 매달 반복되는 것들이 빠지지 않고 기록되었다. 특별하게 별표를 치거나 두 세 겹 진하게 덧칠한 중요한 모임 날짜와 장소도 올라가곤 했다.


"부장님, 영월로 문상 가려고 조퇴하려는데요. 사촌 차편에 동행하려구요 " 처음 작정하고 한 거짓말은 직장 상사 강기혁 부장 앞에서였다. 부장은 돌아올 날만 묻더니 어서 출발하라고 했다. 일이 마음 같지 않은 지 모니터 화면에 눈을 떼지 못하는 부장은 삼촌을 들먹일 여지를 주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준비한 여러 가지 핑계들은 은주의 머릿속에서 나올 채비를 하고 있었지만 필요하지 않았다. 삼촌이 오랫동안 심장이 좋지 않아 인공심장기기를 달고 사셨다거나, 영월까지 대중교통의 불편함이나 대방동 친척을 챙겨야 한다는 말은 은주의 머릿속에서 하룻밤을 살다 사라졌다.


사무실 건물 밖으로 나올 때 계단 참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는 정 과장과 마주쳤지만 바쁜 몸짓과 목례만 보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전 근무 시간 중 담배 피우는 시간이 잦은 정 과장을 두고 부장과 사장이 나누는 험담이 떠올랐다. 1차 시안을 출력하여 의논을 하려던 은주가 정 과장을 찾았으나 두 번이나 자리를 비운 탓에 일이 꼬였던 날이었다. 정 과장은 부장에게 나의 조퇴 사유를 을 것이다. 그리고 강원도 출신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 떠벌리며 부장의 책상 앞에 서성거릴 것이다. 마땅치 않아 듣는 척할 부장의 얼굴이 하나의 그림으로 떠올랐다.


열두 살이 더 많은 과장은 상사인 부장을 자신의 막내 동생쯤으로 여겼다. 가끔은 누가 부장이고 누가 과장인지 모르겠다고 사람들은 쑥닥거렸다. 정 과장이 반말로 훈수를 두는 일도 허다했다. 직급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정 과장이 사장에겐 골치 아픈 존재라는 동료의 말을 단 번에 수긍한 은주였다. 정 과장이 사장의 먼 친척이니 그럴만했다. 정 과장이 가장 좋아하는 수다의 재료는 가족관계와 출신 배경이었다. 그는 재계의 혈연관계니 연예인의 집안 사정들 뿐 아니라 식당 영양사의 출신 배경까지도 알고 있는 별난 사람이었다. 정 과장이 어떤 말을 떠벌리며 부장의 책상 앞을 서성일 지 잠깐 걱정되었으나 이내 사라졌다.


이미 두시를 넘겼지만 늦은 점심을 먹고 들어가는 사람을 마주칠까 두리번거렸다. 큰길로 나와서야 은주의 마음은 자유로워졌다. 골목과 대로의 경계선에서 그녀는 변장용 고무얼굴을 벗어던지는 미션 임파서블의 배우를 떠올렸다. 며칠 전부터 고민한 미션을 아주 쉽게 해낸 것이다.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오고 어깨가 들썩여졌다. 코끝으로 들어온 가을바람에 기분이 좋았었다. 해방감은 은주의 잠깐의 양심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날 은주는 오랜만에 시내 중심지를 돌고 커피를 마셨으며 한 없이 대로를 걸었었다. 오랜만에 혼자를 즐겼다.


삼촌은 오래전 심장질환으로 돌아가셨지만 부장은 은주에게 사유를 묻지 않았다. 며칠 전 성공적으로 마친 계약 건과 호평을 받은 은주의 시안이 그녀를 신임하는데 큰 몫을 했을 것이라 자신했다. 평소 은주는 결근이나 지각 조퇴가 거의 없었다. 말수가 적은 것도 부장이 신뢰하는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사 후 첫 해 가을, 회사 야유회 장소를 논의할 때였다. 영월을 들먹인 정 과장의 시끌벅적한 입담에 가장 반응이 적었던 부장이 은주와 눈이 마주쳤을 때 둘은 어색한 웃음을 공유했었다. 시끄러운 사람을 멀리하는 경향, 떠벌리는 사람들을 편치 않아 하는 기질들이 같을 거라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끝내 정 과장의 주장을 사장은 수락했고 7시 반 회사 앞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의 알록달록한 등산복 차림으로 버스에 올랐다. 강원도 산길로 들어서자 굽이굽이 꺾인 길마다 쏠리는 버스 속 울렁거림과 오징어채와 김밥냄새 그리고 멈추지 않는 정 과장의 수다는 은주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할 만큼 싫었다. 자신보다 6개월 뒤늦게 입사한 후배는 집안 결혼식이 있다며 야유회에 불참했다. 결국 막내는 은주였고 막내란 이름으로 식당에서 여러 잔의 소주를 마셔야 했다. 은주에게 술잔은 피할 길 없는 사회생활의 허들이었고 은주는 넘을 수 있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은주씨가 여긴 잘 알겠네." 하며 혼잣말을 한 뒤 더 큰 소리를 내질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버스는 정 과장의 독무대였다. 단종 유배지 주차장에 들어섰을 때 정 과장은 버스에서 내릴 채비를 하던 사장을 불러 세웠다.

"사장님, 은주 씨에게 여길 좀 설명할 기회를 주시더래요."강원도 억양을 흉내 내는 정 과장의 말에 사람들은 크게 웃었다. 재미있기도 어이없기도 한 웃음의 색은 한가지기만 했다. 기사가 내준 마이크를 독점한 정 과장은 신이 나서 모든 말끝에 후렴구를 얹었다.

"여기서부턴 우리 신입사원 은주 씨가 가이드가 되실 거래요. 자, 박수"

"그러드래요!"


육아휴직 이년을 마치고 재입사에 성공한 은주에게 경력단절의 어려움보다 넘어야 할 허들로 느껴진 것은 인간관계였다. 사회적 관계의 허들은 만만치 않았다. 대부분이 미술 관련을 전공한 사무실 사람들과는 다르게 정 과장은 샷시 제작회사에서 영업을 오랫동안 해왔던 사람으로 영업에는 수완이 좋았으나 거친 입담과 절제 없는 술자리로 가끔씩 일을 그르친 경력이 있는 중년 남자였다. 영월행 야유회 날 은주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서울에 도착한 후 이어진 2차 노래방에서도 정 과장은 어이없는 강원도의 억양을 흉내 내며 은주에게 집쩍거렸다. 이후 회식자리를 피하고 싶을 때마다 거짓말을 했다. 그때마다 부장은 아무런 제지나 훈수를 두지 않았다. 빠져나가는 은주의 등 뒤에 실없는 정 과장의 강원도 사투리가 들려오곤 했다.


그녀가 영월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이었으나 초등학교 입학부터 서울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영월은 그저 돌아가신 아버지의 고향이었을 뿐이다. 은주는 자신이 서울 토박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나 입사 후 한 달도 안돼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의 선산이 있는 장지와 은주가 태어난 곳이 언급되었다. 이후 은주는 영월 출신으로 탈바꿈되었다.  


홍보회사에서 처음 작정하고 사용한 '문상'이라는 거짓말은 은주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사했다. 피하고 싶은 세상의 허들을 만날 때마다 위기를 모면하는 중요한 수단, 거짓말의 기능은 제법 유용했다.


작년 동창들과의 모임에 가던 날이었다. 예약된 병원 진료시간을 코앞에 두고 옷단장을 마친 은주의 머리에 갑자기 떠오른 병원진료가 떠올랐다. 바로 이틀 전 안내 메시지를 받았는데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은주는 다소 충격을 받아 멍한 채로 소파에 앉아버렸다. 잠시 후 심호흡을 한 후 허들을 뛰어넘을 태세를 갖추며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아버지 간병이 필요하게 돼서요."라고 말하자 전화를 받은 병원의 여자는 놀란 탄성을 내지르며 힘내시라는 덕담까지 들려주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들먹인 것에 잠깐 죄책감이 들었다. 전화 속 그녀는 내게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 맞닥뜨린 간병으로 이해하는 듯했다.

"얼마나 미루면 될까요?" 조심스레 묻는 그녀의 말투에 걱정 어린 진심이 묻어 나왔다.

" 네, 한 열흘정도면 될 것 같아요." 은주도 속상한 저음의 말투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

" 네, 잠깐만요."라고 말한 전화기 속 여자가 잠시 일정을 살피는 듯하더니

" 그럼 다다음주 17일, 금요일 어떠신가요? 이전처럼 오전 열시요."

그렇게 은주의 병원 예약은 쉽게 변경되었다. 이전 전화 예약 때 당일 변경은 좀 피해 달라는 당부안내가 은주의 거짓말 앞에 떠오르다 사라졌다. 은주는 진료일정을 까맣게 잊고 친구들과의 만남을 약속한 자신을 의아해했다. 쇠퇴한 기억력에 잠깐 우울감을 느꼈으나 이내 허들을 성공적으로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외출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10여 년 세월을 넘어선 동창회 소식은 단조로운 은주의 일상에 작은 파문을 가져왔다. 과대표 도영을 통한 긴 안내글은 20대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회상에 힘입어 잠시 활기를 얻은 은주는 참가와 불참의 마음 사이에서 여러 날 갈등했다. 일주일을 앞두고 은주의 마음이 불참 쪽으로 기울었을 때 정화의 집요한 전화는 여러 번 왔었고 거짓말을 준비할 수 없었던 은주는 동창회 참가를 결정했었다. 정화는 대학 시절 가장 친했던 과친구였다. 졸업을 한 후 결혼을 알리지 않은 정화로 인해 그 둘은 소식이 끊겼었고 은주의 어머니는 가끔 정화의 안부를 물었었다. 그들 모두는 서로의 변모를 살펴가며 덕담을 나누었다. 식사를 마친 그들 동기들 중 같은 건물에서 졸업작품 제작에 동고동락했던 조소와 회화파트의 친구 여덟이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졸업작품 이야기에 꽃을 피우던 그들은 모두가 일시에 한 마음이 되는 기분을 느꼈고, 다음을 기약하며 모임이 결성되었다. 몇몇은 박수를 쳤고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일정을 들먹일 때마다 은주에겐 마음속 허들이 늘어서는 것으로만 느꼈지만 내색할 자신이 없었다. 간신히 막차를 타고 귀가한 은주는 얼굴을 씻지도 못하고 잠이 들었다. 오랜만의 일이었다. 바로 이틀 후 단톡방을 개설하고 정식으로 모임을 추진한 것은 정화였다.


정화의 권유에 쫓겨 참가한 동창회는 드라마속 이야기와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같은 얘기를 하고 동시에 다른 마음으로 들어야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친구들의 안정된 삶의 모습은 그녀들이 입고 가진 물건들에 여지없이 드러났다. 소음 속에서도 은주의 감각세포들은 제 기능을 다했고 은주는 잠시 외로움을 느꼈다. 친구들 모두가 강남이나 마포 등 도심지에 자리 잡은 것에 비하면 자신이 사는 별내는 너무 멀기만 해서 귀가할 생각에 아득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각자의 여유를 자랑하기 바쁠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빠질 수 있는 거짓말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잠시 후 정화의 기억력은 은주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정화가 소환한 대학 시절, 은주는 과에서 제일 잘 나가는 학생이었다. 은주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으며 교수들의 칭찬으로 모두의 이목을 끌었고 유일하게 사대문 안에 살고 있는 여대생이었다. 작은 하숙집이나 자취방, 그리고 친척집 등에 살던 친구들은 남산타워가 보이는 필동 은주네 집에 자주 놀러와 여러 날 머물다가기도 했다. 정화의 기억 속에서 은주는 자신도 잊고 있었던 결혼 전 모든 것을 추억했다.


필동집 너른 마당, 자신의 동남향 방과 잘 가꾼 어머니의 화초나무들!


정화가 과거 이십 대 초반의 이야기를 이어 나갈 때 친구들은 하나같이 짧고 비슷한 탄성을 내질렀다.

"정말? 그랬었나? 니가? 내가? 쟤가? 진짜?

모든 반응은 짧고 의아한 질문이었지만 오로지 은주의 집에 끼니를 신세 진 이야기나 은주의 베이지색 커튼이 달린 방 이야기에는 한결같이 "맞아!"라 응수하며 일제히 은주를 바라보았다. 은주의 미소와 함께 머릿속 작은 허들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함께 움직이자며 우기던 정화가 지긋이 은주를 바라보며 흐뭇해했다.


정화의 기억력과 추진력에 허들을 넘었다고 생각한 은주는 며칠 후 창고의 달력을 찾아 다용도실 문 앞에 걸었다. 다음 모임 날짜에 진한고 굵은 동그라미를 친 후 어머니의 반짇고리에서 찾은 긴 고무줄로 볼펜을 매달아 걸어 두었다. 남편은 은주의 기이한 취향에 놀라움을 보였지만 실용적이라 좋다며 자신도 일정을 적어 넣겠다고 말했다.


9월로 들어서자 달라진 새벽공기를 느끼려 창문들을 열었다. 쌀쌀해진 아침공기에 카디건을 찾아 입고 다용도실로 들어가 문을 닫은 채 커피를 갈았다. 은주는 자는 남편과 아이를 깨우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차가워진 공기에 커피 향이 더욱 진하게 전해졌다.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커피를 들었지만 어떤 허들도 없는 것 같은 은주 자신의 일상 속 행복이 크게 느껴졌다. 커피잔을 내려놓으려고 다가선 싱크대 앞에서 다용도실 문 앞의 달력을 살폈다. 9월에 메모된 다섯 개의 일정들 중에 가장 진하게 쓰인 '동기모임'을 보며 남아 있는 커피를 마시고 잔을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점심을 마친 2시에 정화의 핸드폰이 울렸다. 모임에 대한 안내로는 2주나 앞선 다소 빠른 전송이었다.


우리의 본모습을 찾아! 9월 13일. 토. 12시. '부아쟁'

예약 필수- 인원파악 필수

참석여부를 9월 6일까지 알릴 것^^


뒤이어, 한 번 더 카톡이 울렸다.

한강변을 내려다보는 레스토랑 내부사진과 멋진 플레이팅 접시들이 딸린 부아쟁 주소가 이어왔다.


처음 그들이 만남 장소를 투표로 정하려고 했을 때 의견수렴은 쉽지 않았다. 이틀 뒤 투표 취소를 통보한 정화였다. 자신이 적당히 정할 테니 여건이 불가피한 사람은 빠져도 된다는 정화의 말에 다들 이견이 없었다. 기본회비 3만 원은 매달 이체를 하여 공금으로 모으고 당일 소요비용은 N분의 1로 하자는 정화의 일방적인 추진에 토를 단 사람도 없었다. 정화가 정한 장소들은 워낙에 고가의 식당들이라 은주는 또 하나의 허들을 만났다는 생각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워커힐에서 공연을 보며 식사를 할 수 있었고 광화문 사거리 호텔에서는 서양인 웨이터가 따라주는 와인을 음미해 볼 수도 있었다. 즐거움과 뿌듯함이 은주의 허들을 허물어 내렸다.


공유된 주소를 열어 부아쟁으로 들어갔다. 평점의 숫자 옆으로  '호텔나루 서울 레스토랑. 부아쟁. 프랑스 음식점' 십만 원 이상'이라는 요점 글자들이 보였다.

안경을 찾아 업체 측의 사진과 리뷰들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사진 속 레스토랑은 통창으로 한강과 여의도를 볼 수 있는 멋진 식당이었다. 마포에 사는 영미가 가장 먼저 댓글로 환호했다. 잠원동에 사는 경숙도 뒤이어 가본 적이 있노라 반색했다. 혜경만이 'ㅇㅋ'라는 축약어로 말을 끝냈을 뿐, 나머지 친구들은 카톡으로 수다를 이어나갔다. 만나 이어질 이야기의 밑밥이었다. 얼마 전 유럽을 다녀온 옥순은 아직 시차에 적응이 덜 됐다고 했고 골프에 빠진 성자는 인증숏을 날려 멋진 각선미란 찬사를 받았다. 뉴욕에 아들과 함께 있는 소영은 참가가 어렵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이어 경숙이 자신의 뉴욕의 여행 경험을 들먹였다.

은주는 핸드폰을 닫았다.


은주는 마지막 안내, '호텔나루 서울 레스토랑. 부아쟁. 프랑스 음식점' 십만 원 이상'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일주일 뒤 빠져나가야 하는 카드값을 떠올리니 13만 원가량의 비용은 허들이 되었고 이내 불참을 마음먹었다. 일주일 뒤 참가가 어려운 정황엔 뭐가 적당할까 망설였다. 동창들 모임은 오래전 결정된 것이고, 이것을 뒤엎을 가까운 미래에 적합한 사유엔 무엇이 가능할까 은주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종일 은주는 계속 이런저런 핑계를 떠올렸으나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다른 친구들의 수다가 생각보다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은주는 어떤 거짓말이 자신을 덜 난처하게 해 줄지 생각하느라 일요일 오후가 어이없이 지나가는것이 안타까웠다.


오후 5시경, 저녁상을 준비하는 동안 아이와 남편은 그녀를 놔두고 산책을 나섰다.

"한 바퀴 돌아옵니다. 엄마 잘 다녀올게요!" 남편이 슬리퍼에 발을 넣으며 아기 목소리로 흉내를 냈다. 콩나물을 다듬던 중 전화가 짧게 울렸다.

손의 물기를 닦으며 핸드폰을 열었다.


검은색 리본과 흰 국화꽃 아래 부고안내가 보였다.

강기혁 부장이 세상을 등졌다는 내용이 한 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짓말 같은 그의 부고소식에 은주는 망연자실했고 가슴은 철렁했다.

한 번도 은주의 거짓 핑계를 되묻지 않던 강 부장의 끄덕이는 고갯짓이 그림처럼 아른 거리며 눈물이 차올랐다. 은주의 타고난 기질을 이해해 사람이며 잘못된 음주습관들에 가림막을 쳐준 그가 이상 회사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란 사실이 거짓말 같았다.



-사진 최성철 광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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