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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롱 Aug 14. 2024

동거인

태생이 자연인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혈압을 오르게 하는 내 동거인에 대해! 그의 허물이 곧 나의 허물일 테니! 그의 얘기를 늘어놓다 보면 속속들이 드러날 내 생활의 일면들이 부끄러워질 테니!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날에는 속으로 '아휴, 모지리'라고 속으로 읊어대거나 산책을 나가야한다.


몇 가지 에피소드만 말해도 세상은 내 등을 토닥일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 아침에도 그의 허물 리스트에 올릴만한 일이 벌어졌다.

그에겐 일의 과정이요, 내겐 납득할 수 없는 과오! 모지리 짓인 것이다.


이틀 전 화장실 스위치 주변 벽지가 이전보다 많이 더럽혀진 것이 눈에 띄었다. 조심하며, 아니 정확히 스위치만 누르면 될 텐데!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잠시 후 밖에서 들어온 동거인이 -그는 덩치가 커서 손도 크다-  손바닥을 이용해 스위치 전면을 누르는 것, 손을 닦고 나오면서도 등 뒤로 스위치를 보지도 않으며 젖은 손을 이용해 더듬다 누르는 것을 보았다. 나란히 있는 스위치 두 개를 감싸고도 옆의 벽지에 손바닥을 대는 모습이 원인인 것을 안 것이다.

"스위치를 손바닥 말고 손가락 부분만 이용해서 눌러봐. 여기가 벌써 이렇게나 더러워졌어."

이전까지 얼룩이 보이지 않았을 동거인이 본인 생각에도 납득이 됐는지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그리고 이틀 뒤 오늘이다. 아침을 먹은 그가 문밖으로 나가 배송된 작은 박스를 들고 들어왔다.

오염방지 플라스틱 덮개였다.

두꺼비 집으로 가 전기를 차단하고 일을 시작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주방 식탁 위에 놓인 박스에는 덮개들이 하나 가득 들어 있었고 박스를 뜯기 위한 가위며 송곳등이 질러져 있었다. 그가 평소에 꼼꼼하지 않아 질러진 채로 일을 시작하는 것도, 조금 있다가 나를 부를 것도 익숙한 상황이라 더 이상 개의치 않다.

그런데 잠시 후 뭐가 여의치 않은지  한숨 소리가 들린다. 정확히 아침 온도가 29도에 육박할 지경인데 왜 사서 고생인지. 에어컨까지 끈 그가 땀을 흘리며 30여분을 씨름했지만 포기했다. 그러던 중에 드라이버도, 송곳도 가져오라 한다. 장비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평소에도 늘 나의 기억에 의존한다.

제발 다 한 곳에 모아두라고 하지만 한 번은 책상에, 한 번은 선반 위에, 한 번은 신발장 길목에 놓이기 십상이라 마음속으로는 포기를 했다. 아예 밖에서 잃어버렸는지 제대로 있지도 않다.

정리하지 않으니 다시 구입하고 그러니 더 정리가 되지 않는 악순환이 있다.


결국 스위치 밑으로 떨어진 송곳이나 못 탓에 마루에 희미한 자국을 내고 손톱만 한 시멘트 쪼가리가 두 세 덩이 떨어진 것으로 막을 내렸고 뒷정리는 내 몫이다. 오늘, 나는 화도 나지 않은 만성이지만 글로 답답함을 풀어본다.


속으로는 여전히 장비점검도 준비도 없이 시작한 일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얼마 전엔 나의 방문에 덧 입혀진 장식나무 떨어져 틈이 생긴 것을 본인이 고쳐보겠다고 힘주어 젖혀보는 바람에 아예 떨어지고 말았다. 흔적을 막을 길이 없어 넓은 테이프로 감아 놓은 상태다. 문짝을 바꾸거나 필름지 교체 공사를 할 날까지 저러고 살아야하나 마음이 답답하다.


나는 그가 성인 ADHD이거나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돈키호테라고 생각한다. 늘 호기심도 많고 다 될 것처럼 생각한다. 얼마 전엔 본인이 버섯으로 가죽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였고 성공했다고 말했다. 지구환경을 위해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말하며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시큰둥했다.(간혹 그 열정에 감동하기도 한다.) 늘 그런 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저것에 끊임없는 호기심과 열정으로 어질러진 현미경과 샤알레 그리고 서류들과 자격증사본, 드라이버와 볼펜들, 혼자 들이킨 맥주캔과 발효 중인 술병(발효에 한동안 빠졌었다.)들이 어우러진 책상은 내 뒷머리를 잡기에 충분하다.


고발하고 싶은 그의 일면 중 가장 큰 생활 습관 중 또 하나는 손을 닦고도 물기를 닦지 않은 채 나오며 거실 바닥에 물을 조금씩 떨군다는 사실이다. 수건에 손을 대기는 하는 것 같은데 손가락 끝에 물이 맺혀 떨어지는 날도 있을 정도로 수건은 제대로 그 용도를 발휘하지 못한다.

옷은 팔다리 들어가면 다른 건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기안 84가 가진 태어난 김에 사는 남자란 칭호에 무릎을 친 적이 있다.


의외의 면모가 있다. 그는 요리를 잘하고 좋아한다. 어제도 내가 만든 토마토 마리네이드의 레몬을 잘게 갈아 넣었어야 한다고 조언을 한다. 스크럼블드 에그를 해서 볶음밥을 해야지 밥에다 날달걀을 쏟아하면 밥이 또 글 또 글 하지 않다는 고를 한다. 미각 상상 이상 발달한 사람이다. 그런데 요리를 하면 싱크대 두 개는 열려 있고 기름은 사방에 튀며 양파 겉 껍질은 바닥에 나뒹굴어야만 했다.


최근엔 조금 노력하여 덜 어지르긴 한다. 아니면 주방에 들어서지 못하게하고 거실에서 음식만 어서 맛보라고 한다.

맛은 최고다.


겉모습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이다. 잘 먹기 위해선 어떤 수고도, 어떤 발걸음도 마다하지 않는다. 깨가 들어가지 않아 안된다고 직접 뛰어갔다 오거나(다른 것은 미룰대로 미루지만), 올리브는 어떤 제품이 더 맛나다거나 바질 페스토를 직접 만드는 일, 스페인에서 꽂힌 빠에야 도전을 위해 샤프란을 챙기는 일 등은 일반적인 그 나잇대 남자에겐 드문 유일한 아니 가장 큰 장점이다. (선하고 비열하지 않은 품성은 일단 제일이다)

그런데 그에 따른 뒤치다꺼리에 지친 나는 안 먹고 간단하고 정갈했으면 할 때도 많다.


전선과 함께 벽에서 떨어져 있는 스위치를 보며 속으로 말한다.


손가락 부위만 사용했으면 문제없었을 것을

스위치를 쳐다보며 누르기만 했으면 되었을 것을

한 박스가 아니라 낱장으로 하나만 사는 방법을 알아보면 더 좋았을 것을

장비가 다 있는지 확인하고 덤볐으면 좋았을 것을

더우니 가을이 온 다음에 시도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냥 두는 게 더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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