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카롱 Dec 15. 2024

이 좋은 집 놔두고, 어딜 가세요?(단편소설)

미숙은 잠든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깊게 패인 주름과 지친 표정은 미숙에게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점심을 마치고 십여 분도 되지 않아 노인은 붉은색 암체어에 앉아 졸고 있었다. 잠시 후 주방에서 나온 미숙은 혼잣말로 "더 있다 주무시지"라고 흘려 말했다. 미숙이 티브이를 켜자 생각보다 큰 볼륨 소리에 놀랐고 노인도 설핏 잠에서 깨어났다. 귀가 어두운 노인이 키워놓은 티브이소리에 미숙이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방으로 가셔요."

잠에서 깬 노인에게 침대로 가자고 권했다. 노인은 눈을 감은 채 스스로 상체를 일으키며 응했다. 미숙은 노인을 부축하여 안방으로 걸었다. 휠체어 없이 노인을 옮기는 일은 꽤 힘들었다. 하지만 이어질 적막을 생각하면 싫지 않았다.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를 집어 들고 커튼을 당겨 빛을 막았다.

어느새 노인은 쉭쉭 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노인을 뉘고 안방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크게 숨을 내 쉰 미숙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노인이 사라진 공간에서 미숙은 심호흡과 함께 행복을 느꼈다.


노인은 거동이 불편한 다리 탓에 휠체어에 의존해도 기억력과 활기가 적지 않았다. 깨어 있는 동안 말 벗이 돼주는 일은 가장 고된 일 중의 하나였다. 노인의 입은 종일 쉬는 법이 없었다. 노인의 말을 들으며 이런저런 추임새를 넣은 것보다 차라리 이 집의 가사 일이 더 마음 편했다. 제일 좋은 것은 마트에 다녀오는 장보기였다. 그 시간, 미숙은 노인을 돌보는 집이 아닌 길에서 자유를 만끽했다. 아주 덥거나 춥지 않은 이상 거의 모든 계절, 미숙은 천천히 걷고 이리저리 마트 안을 둘러보았다. 한 팔은 양산을 들고 한 팔에는 예쁜 퀼트 가방을 팔에 걸고 천천히 발을 뗐다. 간혹 티브이에 빠져서 노인이 입을 닫는 시간과 낮잠이 드는 시간만이 유일한 도피처였다. 미숙은 노인이 티브이에 빠져들도록 화려하게 차려입은 트롯가수들의 경연을 찾아가며 리모컨을 돌렸다.


방문 손잡이에서 손을 뗄 때 며칠 전 다녀간 형우가 떠올랐다. 그날 형우는 식사 후 바로 눕는 것이 역류성 식도염의 원인이며 당수치도 올라간다고 노인의 얼굴을 마주하며 당부했다. 형우는 미숙이 그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미숙이 두 사람에게 가까이 올 때 재차 말했었다.

"엄마, 식사 아주 천천히 하시고, 소화 좀 되게 산책을 가셔요. 식사하고 바로 누우면 젊은 사람도 소화 안돼."

"염려 말어"

노인은 염려하는 아들의 당부에 손사래를 치며 응수했다.

"제가 자꾸 말씀드리는데도 점심만 드시면 잠이 쏟아지시나 봐요."

형우가 설핏 미숙을 훑어보았을 때 미숙은 재빨리 말을 이어 신경 쓰겠다는 내색을 했다.

"점심 드시자마자 누우시는 것 좀 막아주세요." 구두 주걱을 끼우던 형우가 노인에게 한 말을 되풀이했다.

"네. 네. 드시기는 예전처럼 잘 드시는데......" 현관문 앞에선 미숙이 제 손을 주무르며 말끝을 흐렸다.

사실 형우가 산책이란 말을 언급했을 때 미숙은 보이지 않게 입을 삐죽 내밀며 못마땅해했다. 휠체어를 미는 일은 쉽지 않았다. 노인의 집은 언덕 위에 있어 휠체어를 밀어 오르내리는 일은 예순이 된 미숙에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아파트 앞 작은 주차장 끝, 공터의 벤치에 있다가 돌아와야만 했다. 그나마 출근으로 차들이 빠진 주차장을 두어 바퀴를 돌면 그것으로 만족한 노인은 쉽게 집타령을 했다. 가끔 노인이 스스로 휠체어를 몰았고 미숙은 그늘 벤치에 앉아 노인을 지켜보았다.

무엇보다 휠체어를 끄는 채로 이웃을 만나는 일이 미숙에겐 언제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형우는 오래 머무르는 적이 없었다. 노인은 늘 아쉬워했다. 형우가 나갈 채비를 하면 언제나 아쉬워 손을 잡고 벌써 가야 되냐고 물었다. 그의 사업은 제대로 분위를 탔고 늘 계약이 밀려 쉴 새가 없다고 했다. 노인은 자랑스럽게 말하면서도 안쓰러워했다. 그날도 노인의 재촉을 못 이긴 그가 한 달여 만에 잠깐 들렀다. 소화가 잘 안 되는 원인을 몇 마디 조언한 후 바로 갈 채비를 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형우가 당부와 인사를 하며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린 낯선 남자가 형우를 비껴 섰다.

"안녕하세요?"초록색 나뭇잎이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차림의 남자가 형우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미숙 쪽으로 다가왔다. 인사를 하는 사이 형우는 그가 누군지 엿보려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엘리베이터 문은 닫히고 있었다.

"저, 1303호에 이사 들어오는데요. 이사 전 공사 좀 해야 하는데, 소음 때문에 주민 이해 동의 좀 받으러 왔습니다."

"아아! 그러세요? 1303호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 턱을 치어들며 미소를 띠었다. 검지손으로 동의서를 훑으며 1603호를 찾았다.

"언제부터 하시죠?" 미숙은 상냥한 말투를 이어갔다. 미숙은 여전히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턱을 밖으로 내민 동작을 했다.

"다음 주 화요일부턴 데요. 당일하고 이 날 소음이 제일 클 겁니다." 남자가 소음이 크다는 두 날을 짚으며 또박또박 이어가던 말을 뚝 멈췄다. 미숙이 이미 호수를 찾아 사인을 끝냈기 때문이다. 미숙은 공사기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웃 간에 서로 돕고 살아야죠." 미숙의 말에 1303호 남자가 미소를 함박 띠며 고개를 살풋 끄덕였다.

"좋은 이웃이시네요. 고맙습니다."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좋은 이웃이라는 말은 미숙을 잠시 설레게 했다. 미숙도 눈을 맞추며 목례를 했다.

앞집으로 향하는 남자의 등을 보며 현관문을 당길 때 미숙은 여전히 턱을 올린 채 미소를 띠었다.

미숙은 신발장 앞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그날 입은 원피스는 새로 장만한 것이라 오전에도 여러 번 전신거울 앞에 섰었다.

티브이 가요열창에 빠진 노인은 밖의 사정을 묻기는커녕 들어서는 미숙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미숙은 바로 이웃의 공사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말해야 길어질 노인의 말을 피하고 싶었다. 주인대신 사인을 한 것도 노인이 뭐라 할 일이 안된다는 판단은 이미 하고 있는 미숙이었다. 미숙이 공사얘기를 한 것은 다음 날 오후,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와 겉옷을 걸치고 귀가채비를 할 때였다. 노인과 길어질 말을 피하고만 싶었다.


형우의 당부를 회상하던 미숙은 스스로 도리질을 했다. 잠을 이기지 못하는 노인을 어쩌랴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미숙은 거실로 나와 멀리 시야밖으로 올라가는 청년주택 건물을 내다보았다. 다시 주방으로 가 싱크대 상부장을 열었다. 형우가 며칠 전 사온 고급 케이스의 과자 하나를 집어 입으로 넣었다. 시중에서 보지 못한 과자는 고급스럽게 맛있었다. 하루 하나, 간식 찾으면 드리라는 형우의 설명이 떠오르다 사라졌다. 예쁜 접시를 조용히 꺼내 과자를 세 개 올리고 내린 커피와 함께 창가 테이블로 갔다. 노인이 비운 암체어에 깊숙이 앉아 커피잔을 들었다. 쓴 커피가 달콤한 과자와 어울려 입맛을 돋웠다.


미숙은 고급 커피잔을 둘러보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가족에 대한 걱정과 근심도 잊어버릴 수 있었다. 미숙의 작은 집은 깔끔했지만 두 개의 방엔 아들이 기거할 자리가 없어 거실에 이브자리를 펴야 했다. 군대에 가있는 동안 미숙은 자신의 집에 머무는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 미숙에게 아들의 전역이 기쁘지만은 않았다. 거실에 널브러진 이불을 볼 때마다 미숙은 가슴이 답답해오는 것을 느꼈다. 늦잠 자는 아들을 위해 커튼을 열어젖히기도 쉽지 않았다. 미숙은 어두컴컴한 주방 의자에 앉아 창 밖 아침의 여명을 아쉬워했다. 아르바이트로 한 밤중 들어와 자는 아들의 모습이 미숙의 가슴에 납덩이처럼 무겁게 자리했다.


노인이 잠든 시간, 자신의 손길로 깔끔히 정리된 노인의 집에서 미숙은 잠시 집에 대한 생각을 잊었다. 커피를 마시며 시간이 흐르는 것을 감상하는 일은 미숙에게 짧고 귀한 휴식을 제공했다. 주말도 없이 대학 생활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는 안쓰러운 딸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들고 나는 시간이 불규칙한 장성한 아들도 머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우리 아들은 너무 바빠서 안 됐어. 그 일 다해 돈 벌어야, 지 식구나 좋은 거지."

노인은 아들만큼 찾아오지 않는 며느리를 돈 잡아먹는 여자로 지칭했다. 형우는 잘 나가는 작은 회사를 운영했고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강남의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들었다. 미숙은 노인에게 들어가는 간병비며 생활비용이 그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형우에게 기대고 있는 것은 형우의 처뿐일까?' 노인의 험담을 외면하며 주방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마다 미숙은 인상을 썼다. 자신에게 주는 월급도 그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자식뿐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형우가 많은 것을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좋으셔요. 든든한 아드님 있어서." 미숙의 추임새에 노인은 턱을 치켜들었고 돌아서는 미숙은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형우의 처가 부러웠다.


미숙은 형우의 처를 본 적이 없었다. 가족사진 속에서 정장을 한 새초롬한 젊은 새댁의 얼굴로만 기억했으나 그것은 무려 이 십여 년 전 얼굴이었다. 가족사진 속 노인은 지금의 미숙만 한 나이였다. 그녀 옆엔 술을 좋아했었다는 풍채 좋은 남편이 웃고 있었다.


노인의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 명절 당일에나 한 나절 들른다는 며느리를 미숙이 대면할 길은 없었다. 그러나 형우의 카톡프사를 통해 최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몇 장 되지 않는 사진 속에서 형우와 그의 처는 근사한 호텔에 머물렀으며 멋진 포즈로 골프채를 휘둘렀다.

형우 처가 들고 온 선물은 연휴가 끝난 다음, 출근한 미숙의 손을 빌어야만 제자리를 찾았다. 이제 3년이 되어가는 노인의 집에서 미숙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다. 집 밖으로 내 보낼 물건들의 수명은 미숙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미숙에게 살림을 맡기자 노인이 기억하는 집안 물건들은 미숙의 손을 거친 것만으로 한정되기 시작했다. 미숙의 손길이 닿아 정리된 물건이 형우에 의해 아주 가끔 소환되기도 했다. 얼마 전 형우가 자신이 해외에서 가져온 오래된 머그컵을 찾았을 때 미숙은 유연하게 핑계를 둘러댔다.

깨졌다거나 짝이 맞지 않아 분리수거했다거나 삶다가 변형이 일어났다는 등의 변명이 어렵지 않은 미숙이었다. 능숙한 미숙의 살림솜씨를 아는 형우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3년 전 봄, 첫 방문 때 손이 빠르고 깔끔한 미숙에게 이 집의 첫인상은 다소 의외였다. 살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노인은 집안을 방치했다. 현관부터 아무렇게나 던져진 젖은 우산이 미숙을 맞았다. 밖에서만 상상했던 집의 모습과 달랐다. 첫날, 미숙보다 십 여분 늦게 도착한 형우가 당황한 내색을 감추며 우산을 세우고 거실로 들어섰었다. 눈치 빠른 미숙은 자신도 방금 도착했노라고 말했다. 그 말에 형우는 미소를 띠며 노인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미숙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갸웃하게 젖힌 채 일과 보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미숙은 다리를 놓은 사람이 건넨 이야기대로 여러 가지 조건에 만족해했다. 미숙이 자신의 집이 멀지 않아 약속한 시간 외에 급한 사정에도 바로 뛰어 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바로 내일부터 아니, 다음 주부터 와주시겠어요?라고 형우가 마지막 정리 차 말했다.

"아뇨, 지금부터 바로 하고 싶은데요. 정리해 드릴 것들이 보이거든요." 미숙은 차분하게 말하고 형우와 눈을 맞추었다. 형우가 미소를 띠며 반색을 했고 미숙은 첫인사를 한 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몇 가지 형식적인 절차를 마친 미숙이 형우가 나간 뒤 제일 처음 한 일은 현관 정리와 분리수거였다.

다음 날 기름때가 있어 미끌거리던 그릇들을 일제히 삶아 소독한 후 주방도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집의 모습은 일주일 새 감쪽같이 바뀌었다. 미숙은 비싼 이 집의 주방 물건들을 제대로 빛나게 할 줄 알았다.


일주일 뒤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깐 들른 형우는 달라진 집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형우는 마음이 놓인 표정을 감추지 않았고 미숙도 이를 눈치챘다. 그다음부터 형우는 미숙에게 많은 것을 의지했다. 명절에는 월급과는 별개로 현찰봉투를 내놓았고 미숙의 주전부리를 챙기기도 했다.

"저의 처가 가져다 드리라고......" 형우의 처는 뜸한 발길을 여러 가지 선물세트로 대신했다.

노인이 이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것을 미숙이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형우는 간병뿐 아니라 살림솜씨도 좋은 미숙에게 그만한 대가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열린 문틈 사이로 형우의 낮고 힘이 들어간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믿을만한 사람 구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엄마도 나무랄 데 없다며?" 언성이 높아진 아들의 말에 노인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후로 노인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미숙이 집에 들어서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묵혀둔 살림살이들이 빛이 나기 시작했다. 집을 단장하고 거실에 앉아 노인의 다리가 성성했던 과거시절을 반복해서 들었다. 해를 넘기며 노인은 미숙이 옆에 앉은 상태에서도 아들과 막힘없는 통화를 했으며 더러는 미숙을 바꿔주어 형우의 당부나 인사를 듣기도 했다.

미숙도 노인이 점차 자신을 친척집 조카정도로 마음 써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해 봄, 산책을 마친 후였다.

노인의 휠체어를 힘겹게 밀어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 문이 닫히려 했다. 뒤따라 온 중년 여자가 엘리베이터문을 잡아주며 미숙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잠깐의 고요 속에 10층 버튼을 누른 여자가 입을 뗐다.

"할머니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 "

"여든 다섯 되셨어요."

여자의 묻는 말에 미숙은 얼른 답을 했다.

샤워 후 보청기를 끼지 않은 노인은 10층 여자와 미숙의 대화를 전혀 듣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어 묻지 않는 말도 이어갔다.

"샤워하시느라 보청기를 빼놔서, 잘 듣지 못하세요."

"아! 그러시구나. 전혀 못 들으시는 것 같네요. 정말 수고가 많으세요. 요즘 누가 이렇게 집에서 모시겠어요?"

여자의 말에 미숙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응수했다.

그리고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네, 일 년 중 제일 좋은 때인 거 같아요."여자도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띠며 응수했다.

어느새 엘리베이터는 10층에 멈췄다.

"안녕히 들어가세요." 미숙이 턱을 치켜들며 고개를 갸웃 끄덕였다.

"네에, 올라가세요." 그 둘은 그렇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보청기를 끼지 않은 노인은 그들의 대화에 기척도 없이 앉아만 있었다.

미숙은 자신이 간병인이 아닌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로 비친 것에 묘한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그 해 가을, 노인이 심장이 절로 뛴다며 미숙과 아들에게 여러 날을 보챘었다. 바쁜 아들이 오기는 힘들고 며느리는 불편하다며 노인은 며칠 동안 신세타령을 했다. 며칠 뒤 형우가 이른 아침시간에 달려와 노인을 모시고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하루를 온전히 비워두었다는 그가 미숙에게 일찍 연락하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다. 집 앞에서 노인의 거동을 도울 때 형우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혹시 입원을 하게 되면 병원에서 간병을 해달라고 말했다. 미숙은 군말 없이 그러마고 했다. 온 김에 빨래를 해 널고 돌아가겠다는 미숙에게 형우는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모자가 출발한 후 미숙은 집안에 홀로 남아 커피를 마셨다. 형우 처가 보내준 커피를 예쁜 잔에 담아 거실 창으로 향했다. 병원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고 예약해 둔 검사만으로도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형우가 말했다. 미숙은 벽시계를 올려다보고 노인의 집에 더 머물다 가기로 했다.

과일을 한 입 물어볼까 주방을 서성일 때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네, 소독입니다."

미숙이 문을 열어주었을 때 미숙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검은색 조끼를 입고 간단한 장비와 호수별 사인지를 들고 들어섰다. 화장실과 다용도실 베란다의 배수구마다 약을 친 여자가 기록지를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여기, 사인 부탁드립니다."

사인을 하는 미숙의 옆에 선 여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살림솜씨가 진짜 좋으세요. 식구도 단촐하신 것 같고, 참 좋으시겠어요!" 여자가 집을 한 바퀴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기록지를 집어 들었다.

"사는 게 다 그렇지요 뭐. 집에 물건이 적어 그런가요?" 미숙이 눈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아니요. 있을 곳에 딱, 있는 집이 의외로 많지 않더라고요. 이 댁은 모든 게 딱! 있을 곳에 있네요."

"아유, 감사합니다." 미숙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소독하는 여자가 집을 나서며 뒷축이 접힌 운동화를 급하게 신고 인사를 했다.

"사모님, 안녕히 계세요." 미숙이 팔을 뻗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미숙을 집주인으로 본 여자의 낡은 신발과 사모님이란 소리가 오래 머물렀다.


그날 이후 미숙은 늘 예쁜 장식이 발등에 달린 슬리퍼를 신었다. 한 겨울이 아니면 그녀의 신발은 호피무늬이거나 꽃장식 또는 리본을 발등에 얹은 슬리퍼를 신었다. 장식이 깃든 슬리퍼는 그녀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뒤꿈치를 내놓은 슬리퍼는 집에서 잠깐 나와 장을 보는 중년여성의 모습에 제법 어울렸다. 작은 꽃무늬 양산을 들지 않은 다른 팔 엔 작은 퀼트 가방을 걸치고 가슴으로 당기면 머릿속 중년여성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노인의 낮잠을 조절해 달라는 형우의 부탁을 재차 들었지만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하는 노인을 미숙은 내버려 두었다. 노인이 잠든 시간만큼 좋은 휴식시간을 저버리기는 힘들었다. 이제 한 시간 이상 노인은 낮잠을 잘 것이다. 미숙은 이 시간을 자신의 휴식시간으로 만들었다.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거나 창밖의 하늘을 감상했다.

미숙은 남은 과자를 입에 넣고 일어나 창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후덥지근한 바람이 신록의 계절을 밀어내고 있었다. 미지근한 공기를 코로 들이켜는 사이 낯익은 옷차림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트럭의 조수석에서 내린 남자를 보니 지난주 다녀간 1303호 남자였다. 공사일이 바로 내일로 다가온 것이다.

눈썰미 좋은 미숙에게 녹색잎이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는 금방 눈에 띄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작업복을 입은 남자의 손에 패널 같은 것이 보였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아파트 입구 쪽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지켜볼 때 안방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빈 접시와 찻잔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으며 미숙은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날보다 빠른 노인의 기척이 싫었다. 휴식 같은 오후의 시간이 공사 기간 동안 사라질 것도 아쉬웠다. 소음이 싫은 노인은 보청기를 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말을 멈출지 아닐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2년 전 옆 라인 공사 때는 보청기를 한 채로 종일 투덜거리면서도 말을 이어갔던 노인이었다. 그만큼 대꾸하기도 힘이 들었었다.


"미숙아~" 노인이 미숙을 부르며 마른기침을 했다.

"네, 가요." 미숙이 문을 열었을 때 노인은 홑이불을 제치며 투덜거렸다.

"아이구, 이제 이불 필요 없네. 더워졌어 날이." 노인은 누운 채로 떠지지 않는 눈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더우셨어요?"미숙이 묻자 노인이 목덜미를 훑으며 말했다.

"아이구! 다 젖었어. 새것 좀 가져와."

씻겠다고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미숙은 새 속옷들을 꺼내 노인의 옷을 갈아입혔다. 사실 노인은 걷는 것이 어려워 바깥 생활이 불가능할 뿐이지 웬만한 생활을 혼자서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미숙에게 의존하는 것은 점점 불어나갔다. 작년 가을 병원 검사 후 약이 두 알 늘자 노인은 미숙에게 더 많은 것을 의지해왔다. 그 후로 낮시간동안 절대 목욕을 하지 않던 노인은 미숙 앞에서 주저 없이 옷을 벗고 몸을 맡겼다.


속옷을 목에 걸친 채 거실로 나온 노인이 시원한 물을 찾았다. 미숙이 소파에 걸터앉은 노인에게 1303호의 공사 이야기를 꺼내며 물컵을 들고 왔다.

" 내일 1303호 공사 시작하네요."

" 어어? 내일이야?"

" 내일이 제일 시끄러울 거예요. 아침 드시고 보청기를 빼놓으시든지."

" 싹 다 고치는 건가? 들은 게 있어?"

" 아니요. 그런 말은 못 들었어요. 이사 오는 이가 사십 대 초반이나 됐을 라나? 젊던데요. 새 아파트라 도배만 새로 해도 충분할 거 같은데 열흘이나 뭘 고치는지."

"사가지고 오나 전세로 오나?"

"글쎄요.  여러 날 고치는 거 보면 사가지고 오나 본데요."

"아이구 먼지 꽤나 들어오겠네."

"지난번 아드님 말한 로봇 청소기 하나 들여놓으세요. 요즘 물걸레도 다 되고 좋다네요"

미숙이 곁눈질을 하며 말을 건넸다.

"우리가 청소할 게 뭐 많다고 그런 걸 들여? 어지르는 사람도 없는데."

"그렇게 좋대요. 안 써보면 모른다고" 노인의 대꾸가 있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요즘은 핸드폰으로 밖에서도 청소기를 쓰게 할 수 있다네요. 우리 옆집 신혼부부는 없이는 못 살 거 같데요."

"우린 둘 다 놀면서 뭘 하게 그런 걸 돈 들여 사?"노인은 성을 내며 도리질을 했다.

미숙의 입꼬리가 내려가며 씰룩거렸다.

일어서며 자신을 노는 사람으로 여기는 노인의 흰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얼마 되지 않는 머리카락이 물수건에 젖어 정수리가 벌겋게 보였다. 노인의 속옷을 집어 들고 뒷베란다 세탁기로 향하며 하와이안 셔츠의 1303호 남자를 떠올렸다. 미숙은 40대 젊은 남자와 그 가족이 살 집이 어떻게 꾸며질지 궁금했다. 공사가 마무리될 즈음 내려가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오후 3시, 햇살이 건너편 건물의 창에 반사되어 거실 한쪽으로 들어왔다.

"위생봉투가 다 떨어졌네요. 마트에 다녀올게요."

"그러게 한꺼번에 많이 좀 사놓으래두"

"바로 갔다 올게요."미숙은 자신의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나섰다. 위생봉투 정도의 금액은 노인의 지갑을 열게 해서는 안된다고 미숙은 생각했다. 미숙이 장을 보며 일부는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는 것을 노인도 묵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숙은 절대로 많은 장을 보지 않았다. 무겁기도 하려니와 수시로 집을 나서는 장보기가 미숙에게 쉬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한꺼번에 많이 배달시키라는 노인의 충고를 절대 듣지 않았다. 이유는 다양했다. 많이 샀다가 냉장고에서 썩어 나간다거나, 필요할 때 바로 사야 싱싱하다, 팔이 아파 많이 들고 올 수 없다, 배달은 바로 오지 않으면 자신이 정리를 못하고 갈 수 있다, 박스들로 집이 지저분해진다는 등 다양한 이유들을 여러 번 반복했다. 노인은 미숙이 번거롭게 수고를 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숙은 집을 나서는 시간을 쉬는 시간으로 여겼고 나갈 일이 없나 늘 물색했다.

노인이 내주는 돈을 받아 나서는 길에 미숙은 동네를 길게 돌아 걷기도 했다. 미숙은 예쁜 슬리퍼형 샌들을 신고 양산을 들고 걸었다. 미숙은 노인의 집에 있는 낮시간에 장 보는 일이 좋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집에 필요한 장보기도 겸할 수 있었다.


미숙이 위생봉투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을 때 지하주차장에서 올라온 엘리베이터에는 처음 보는 낯선 정장차림의 여자가 있었다. 그녀가 13층버튼을 누르는 것을 본 미숙은 대번에 직감을 할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친 여자의 이모저모를 훔쳐보았다. 고급스러운 옷과 브로치가 멋스러웠고 거의 맨 얼굴임에도 빨간 립스틱은 여자의 자신감을 돋보이게 했다. 13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1303호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여자를 반겼고 미숙은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그들을 엿보았다. 문이 닫히는 동안 남자가 미숙의 눈과 마주쳤지만 그는 미숙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은 공사가 시작되기 전 무언가 점검하려는 듯 보였다.

친절하다며 환하게 웃어주던 1303호 남자의 얼굴은 매우 낯설었다. 미숙은 잠시 소외감을 느꼈다.


오후에 별일이 없으면 같이 티브이를 보다가 저녁상을 차려 놓고, 다음날 아침거리를 확인해 주고 퇴근하면 되는 미숙이었다. 노인의 저녁상은 간단했다. 형우 처가 배달한 고기나 조리식품을 꺼내 놓기만 하면 어려울 것이 없었다. 냉동실에 가득한 고기와 박스로 배달된 과일들은 썩지 않게 먹기에도 바빠 장을 볼만한 것은 수시로 나는 제철 채소가 대부분이었다. 더러는 미숙도 같이 끼니를 해결했다. 최근에는 저녁밥대신 두유나 과일이 있는지만 확인하고 하루를 마감하면 되니 어려울 것이 없었다.


사들고 온 위생봉지에 얼린 고기들을 소분해서 냉동실을 정리한 미숙이 노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드실게 많아요. 낼 아침은 미역국이나 북엇국 좋으실 대로 드시면 되고요."

다음 날 아침 먹거리를 말하는 것은 퇴근하겠다는 미숙의 채비였다.

미숙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길에 1303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미숙이 타고 문이 닫히자마자 1303호 버튼이 켜지고 이내 문이 열렸다. 두 남녀가 정답게 안으로 들어섰다.

미숙은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 쳐 자리를 내주었다. 멋진 정장차림의 여자와 하와이안 셔츠차림의 남자의 등뒤에서 미숙은 아스라한 슬픔을 가졌다.


"그럼 청소업체 부르는 날은 와 보실 건가요?" 하와이안 셔츠의 남자가 물었다.

"사장님께서 그쪽 사람에게 당부만 잘해주세요. 약품 너무 많이 쓰지는 말고 꼼꼼하게만 해달라고."

"네, 알겠습니다."남자가 호탕하게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장님, 다른 건 몰라도 애들 방은 진짜 신경 써서 해 주셔야 해요."

"네네. 명심하고 있죠. 그럼 환기 좀 하고 일주일 후에 이사 들어오시는 거지요?

"네, 새집증후군이 걱정돼서 여행 좀 다녀온 후 들어올 거거든요."

"와, 좋네요. 걱정하지 마시고 잘 다녀오시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을 겁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미숙은 천천히 내려 그들과 간격을 만들었다. 공사 후 일주일 여행을 다녀온 뒤 이사를 들어온다는 여자의 구둣소리가 또각또각 울렸다.

미숙은 천천히 그들 뒤에 걸으며 앞 선 여자의 인생을 상상했다.


그 다음날 미숙이 양산을 쓰고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을 때 멀리서도 공사 소음이 들려왔다. 엘리베이터엔 보양재 위로 작업화 발자국과 떨어진 부산물이 보였다. 엘리베이터 안까지 전달되는 소음에 미숙은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집의 비밀번호를 누를 때 앞집 여자가 인상을 쓰며 나왔다.

"너무 시끄럽죠? 어디로 피해 있어야겠어요." 지금까지 너댓 번이나 봤을 까 싶은 앞집 여자는 엘리베이터에 재빠르게 몸을 밀어 넣었다.

노인은 흐릿한 어둠 속에 가만히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미숙을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아마도 보청기를 뺀 모양이었다.

오전 내내 바닥철거를 하는 소음소리에 티브이는 제기능을 하지 못했다. 보청기 없이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노인은 혼잣말로 티브이화면의 인물들을 평했으나 다른 날과 달리 미숙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노인의 말수가 줄어들어 미숙은 그런대로 견딜만했지만 소음을 듣지 못하는 노인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장을 보면 좋을 것이 없는지 살폈다.

점심시간 소음이 잠깐 멈추었을 때 미숙과 노인도 점심을 먹었다. 보청기를 뺀 노인은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잘게 썬 고기를 씹었다. 노인이 암체어에 앉아 졸려하는 것을 본 미숙은 마트를 가기 위해 나섰다. 노인이 잠들 것이고 소음을 피해 동네를 걷다 오이 몇 개, 양파 한 자루를 들고 오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엘리베이터가 13층을 지날 때 미숙은 정장을 입은 어제의 여자를 떠올리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거울에 비친 눈밑 기미가 소음을 잊게 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기온은 가파르게 상승했고 습도가 높아져 조금의 움직임에도 온몸에 땀이 솟았다.

노인은 하얀 러닝차림으로 종일 집에 머물렀다. 공사 소음대신 노인의 말이 줄어 미숙은 대꾸를 하지 않아도 좋았다. 공사 마지막 미숙이 퇴근준비로 음식물 쓰레기를 갖다 버리려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13층에서 멈췄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복도에 놓인 짐을 끌어내던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잡아달라 눈짓을 보내며 1303호 쪽으로 소리쳤다.

"그만하고 나와. 내일 오전에 청소업체가 마무리할 텐데."

"먼저 내려가. 나머진 내가 들고 갈게"다른 남자가 내 지르는 소리와 함께 전선을 손에 휘감은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따라잡으며 뛰어들었다.

"아, 공사 다 끝났나 봐요. 시끄러워 혼났는데."미숙이 작업복을 입은 남자에게 콧등을 찌푸리며 말했다.

"많이 시끄러우셨죠. 이제 다 했습니다. 앞집이세요?"

"위층인데 어떻게 고쳤나 궁금하네요."

"내일 한번 보러 가보세요. 최상급으로 고쳤어요. 낼 오전에 업체 청소하고 나면 호텔이나 다름없죠."

"공사가 끝났어도 바로 이사 들어오는 게 아니라면서요."

"네, 그런다데요. 자재도 최상급으로 쓰고 환경호르몬이다 뭐다 주인여자가 엄청 꼼꼼해서 사장이 진짜 신경 많이 썼어요." 도리질을 하는 남자가 하와이안 셔츠의 남자를 사장으로 일컬었다.

미숙은 음식물을 처리하고도 집으로 곧장 올라가지 않았다. 벤치에 앉아 1303호에서 내려오는 다른 남자가 트럭에 오를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트럭이 빠져나가고도 빈 주차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십여분을 더 앉아 있었다. 미숙은 자신의 집과 아들을 떠올렸다. 거실의 이브자리의 부피는 작아졌으나 아들의 속옷차림을 본 딸은 때마다 심술을 보였으며 아들이 끌고 다니는 캐리어가 베란다 쪽으로 펼쳐져 있어 집은 매우 부산하게 보였다.

"이놈의 캐리어 좀 닫고 이쪽 구석에 좀 세워놔라" 여러 번 일러도 번번이 미숙의 손을 타야 정리되었다.

자기의 방이 없는 아들에게 큰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널브러진 이브자리와 펼쳐진 캐리어에는 마음을 다잡기 힘들었고 언성은 높아졌다. 남편은 뒤에서 킁킁거리기만 할 뿐 화살이 자신에게 향할까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오늘은 일도 끊어져 나가지 않고 집에 종일 뒹굴거릴 아들을 올리며 미숙은 크게 숨을 몰아서 쉬었다.


미숙이 기다리는 엘리베이터에서 한동안 보지 못한 10층 여자가 아이 둘을 앞세워 걸어 나왔다.

"어머,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10층 여자가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그들은 여행을 가려는지 아이 둘은 제 각각 작은 캐리어를 끌고 신이 나있었다.

"이 좋은 집 두고 어딜 가세요? 미숙이 목소리를 높여 반가움을 표했다.

10층 여자가 미숙의 인사말이 다소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대답했다.

"남편이 연차내서 애들하구 저녁 비행기로 제주가요. 13층 공사 중에 가려던 미뤄져서 공사 다 끝나고야 가게 됐어요."

10층 여자가 묻지 않은 말을 덧붙이는 사이 현관 앞에 서 있던 아이들이 제 엄마를 재촉했다.

미숙이 목례를 하며 돌아서는 순간 아이들이 걸터앉은 캐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닫히는 엘리베이터에 발을 디디며 미숙은 자신이 건넨 인사말을 떠올렸다.

'이 좋은 집 두고 어딜 가세요?'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미숙이 엘리베이터에 올라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화장으로 가려지지 않은 짙은 기미가 눈에 들어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