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도 역모는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도 우리는 안중근 의사로 부르지만 일본은 살인자로 부른다.
1961년 5월 16일은 작가가 태어나기 전 일이다. 아버지가 지금은 사라진 보건사회부 촉탁이었다. 정식으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공무원이 아니고 보사부에 고위급을 알고 있으면 약간의 뇌물(할아버지 소 한 마리)을 써서 임시직으로 공무원 심부름을 하는 것이었다. 완장을 차고 종로와 낙원상가 일대 음식점과 술집을 한 바퀴 돌고 오면, 잘 봐달라고 봉투에 돈이 엄청나서 주머니가 차고 넘쳐 싸구려 가방을 하나 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회수한 뇌물을 맨 위 장관, 이사관, 부이사관, 서기관, 사무관, 주사, 주사보까지 직급순으로 봉투를 만들어 상납했다. 골 때리는 건 촉탁이 그 봉투 금액이 사무관과 서기관 사이었다. 엿장수 맘대로 엿가위나 끌로 깨듯이 봉투 만드는 것이 아버지라 보사부 상급 공무원은 함 군 수고 많아하고 싱글벙글이지 봉투가 두껍다 얇다 말이 없었다.
그 좋은 시절이 5.16 혁명으로 막을 내렸다. KBS가 지금은 여의도지만 그 시절은 남산에 있었다. 목소리 우렁찬 박종세 아나운서가 낭독한 혁명공약에 은인자중 하던 군인이 5월 16일 여명을 기해 궐기하였습니다로 시작해,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하며, 구악을 일소하고의 구악이 완장차고 업주들 삥 뜯는 촉탁이 사라졌다.
아버지가 백수가 된 것을 아버지는 박정희를 욕하는 것이 아니라 윤보선과 장면을 비겁한 새끼, 대통령, 총리 깜량도 아니라고 돌아가실 때까지 욕을 하였다.
1972년 유신헌법은 온 국민이 눈뜨고 맥없이 당한 쿠데타라 설명이 필요 없다.
1979년 12.12군사반란이 중요하다. 영화 <서울의 봄>이 1300만 관객을 동원해 김성수 감독은 평생 먹고살 돈 준비되었다.
김 감독은 문과반이고 작가는 이과반이라 학생 때는 몰랐다. 영화도 초기 흥행실패작은 본 적도 없고 아수라, 서울의 봄만 봤다. 영화에서는 이태신이가 장엄하게 삼청동 공격 앞으로 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는 중구 수방사 안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전화로 고래고래 호통만 치다 끝났다. 그렇게 하면 흥행실패한다고 영화각본 쓰는 작가들이 울분을 느끼고, 나이 60 이상은 눈물이 나게 한 것이다.
김성수 감독은 집이 한남동이라 지금 윤석열 김건희 한남동 공관 옆이라 고3이 집에서 총소리, 장갑차 궤도소리 다 들었다. 모르는 사람은 영화가 너무 늦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5공, 6공, 김영삼, 김대중 시절에 그런 영화 만들면 보수꼴통과 5공, 6공 권력자의 압력으로 상영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작가는 그날 이과반은 본고사에서 수 2와 영어를 잘 봐야 하기에 수 2 정석 황승기 특강, 성문종합영어 최사정 수업을 마치고 84번 타고 가다가 서울역에서 흑석동까지 걸어갔다.
12.12군사반란 진압 못한 것은 보안사 감청도 있지만 5.16을 쿠데타를 혁명으로 배운 군인이 중령, 대령이라 진압 못했다. 노재현 국방장관이나 윤성민 참모차장이나 반란 후 다 영전되었다.
세월이 흘러 1987년은 전두환이 4.13 호헌조치를 낭독했지만 전국 대학생과 넥타이부대가 가세하여 6.29 선언을 유발했다. 그날은 노태우 쑈에 꼴깍 속았지만 나중에 전두환과 짜고친 고스톱을 알게 되었다.
2024년 12월 3일 윤 내란수괴의 계엄선포를 가짜뉴스 거나 방송사고인 줄 알았다. 진짜였다. 국회의원도 담 넘어 계엄해제 의결 잘했고, 더 잘한 것은 일반시민이 그냥 유튜브로 카톡으로 페북으로 순식간에 연락 전파 여의도에 707 특임대원이 총을 쏘면 큰일 나게 만들었다. 나중에 707 특임대 지휘관 대령이 눈물의 기자회견을 했지만 정말 육사 아니라 육사 할아비를 나와도 대한민국은 믠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상식과 헌법전문을 이해하는 대령이하 하사 병장 이병이 똥별들보다 훌륭하다. 아직도 충암똥통 출신 똥별들은 반성이 없다.
똥별들은 유튜브로 탄핵행진 영상을 다시 보기 바란다. 정치에 무관심하던 10,20,30대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가를 알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