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부마’라고 부마를 ‘공주의 남편’ 도는 ‘임금의 사위’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나는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 있었다. 직책은 당시에는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망원이다. 망원이라고 하니 보름달이 잘 보이는 망원동에 사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분은 이글을 더 이상 읽지 마시고 망원이 기관의 끄나풀이라는 것을 아는 분만 계속 읽기 바랍니다.
점조직으로 운영되었던 망원이라 당시 부산대학교에 몇 명의 망원이 있었는지는 모르고 내가 관찰하고 보고해야 했던 것은 무역학과 박상철이었다. 그는 2학년 과 대표도 아니었고, 평소 데모를 주로 많이 하던 이념 서클 가입자도 아니었다. 검은 테 안경을 눌러 쓰고 집과 도서관과 강의실만 맴돌던 그가 데모하는 격문을 쓰고 등사하고 배포한 것은 10월 15일 도서관 앞에서 ‘독재 타도’, ‘유신 철폐’데모가 50여 명이 외치다 별 호응도 없이 흐지부지된 것에 대해 이건 아니다 싶어 대학노트 여백에 낙서하듯이 긁적거렸다.
<부산 청년 학우들이여!
너희는 오늘 무엇을 하느냐?
온 나라가 유신 독재의
(부마항쟁 기록 참고 부산대 대자보 인용)
망원의 최고 우두머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였다. 학생 신분이면서 학생들의 데모 주동자가 누구인지 유인물 내용이 무엇이며 누가 초안을 작성했고, 누구 집에서 경필 글씨를 긁고 종이는 누구 돈으로 인쇄는 몇 장을 어디에서 배포했는지 정확하게 육하원칙은 아니지만 파악할 수 있는 최대한 상세하게 보고하면 그 보고서의 정보가치에 따라 돈이 지급되었다.
10·26 만찬(晩餐)
‘탕!’
권총으로 멧돼지를 향해 한발 발사했다. 두터운 손으로 내 권총을 막는 바람에 첫발이 빗나갔다. 피를 흘리며 화장실로 도망갔다. 뒤뚱거리면서 살겠다고 화장실로 가는 모습에 측은한 생각이 들었지만 냉정을 되찾았다. 이 순간 하늘이 준 기회에 민주 화살을 날리지 못하면 영원히 민주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비장한 각오로 다음 방아쇠를 당겼으나 격발이 안 되었다. 정치를 저런 버러지 같은 놈 말만 들어 하지 말고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정직한 보고와 반대되는 보고를 멧돼지가 했다.
부산 마산지역 시위를 노숙자, 불량배, 때밀이들이 김영삼 추종자들 부추김을 받아 길거리로 나온 놈들이라 탱크로 밀어 버리겠다고 보고했다. 총독은 그 말을 믿었다. 그 많은 예산을 쓰고도 부산 마산에 데모하는 놈 성분 파악도 못하느냐? 질책을 했다.
불난 집에 부채질도 유분수지 멧돼지는 총독 각하! 탱크로 밀어 버리겠습니다. 탱크로 밀어 버리면 하루면 데모 종결됩니다. 걱정 마십시오 각하! 총독은 웃으며 눈초리가 올라갔다. 임자 뜻대로 해?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뱃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천자문도 못 읽어 본 무식한 놈이 충을 알기나 해? 충이 객지 나와 고생이 많구나? 나도 일본 교육을 받았지만 정신만은 조선의 선비정신을 간직하고 싶었다. 첩첩산중에 근무 때도 일마치고 공관에 들어가면 공관 근무병에게 먹을 갈게 했다. 위국헌신(爲國獻身) 네 글자를 천 번이나 습자를 했다. 총독을 오래전에 제거해야 이 땅에 민주주의 새싹이 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총독과 그를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추종하는 사이비 신도들이 득실거리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꽃을 피우기 전에 시들어 죽을 것이다.
총독을 추종하는 자들은 틈만 나면 김일성을 들먹였다. 김일성 동상 세우는 것은 우상화이고 총독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우상화가 아닌가? 학생들에게 뜻도 모르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하고 오후 여섯 시만 되면 걸어가던 시민들을 멈추게 하고 저 멀리 면사무소에서 들려오는 애국가에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게 했다. 날아가는 새들도 애국가가 나오면 땅바닥에 앉았다. 김일성 우상화는 불륜이고 총독을 우상화하는 것은 로맨스라 이건지.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강원도 현리 3군단장 시절에 공관 철조망을 반대로 설치했다. 외부에서는 안으로 철조망을 넘을 수 있지만 안에서는 밖으로 나갈 수 없게 Y자의 긴 쪽을 공관 안에 설치했다. 작전참모와 공병대장이 놀라서 아니 외부 침입을 막는 철조망을 이렇게 하시면 안 된다는 것을 야! 군단장이 열쇠 잃어버리면 철조망을 넘어서라도 들어갈 수 있게 반대로 치는 거라고 했다.
성탄절에 총독이 전방부대에 위문품을 가져와 전달하면 9시 뉴스에도 헤드라인이고 대한뉴스에도 편집되었다. 연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위문 왔을 때 공관에 감금시키고 녹음기에 녹음을 해서 즉각 방송으로 내보내려했다. 지금은 장교수첩을 수해에 공관이 반파되는 바람에 유실되어 없지만 대략 생각나는 대로 하야성명 초안은 이렇다.
하야성명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그동안 국민 여러분에게 잘 살아 보세! 구호와 총화단결! 멸공통일을 국시로 지금까지 총독으로 불철주야 노력을 했습니다만 전국에 한국적 민주주의가 세계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주장도 있고 학생들에게 검은 색 교복으로 남학생들에게는 교련복으로 온통 학교를 군대식으로 만든 것을 늦게나마 후회합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게 하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한 것 또한 수많은 영재들의 잠재력을 고정된 틀에 가두게 하였습니다.
오늘 본인은 총독을 하야하고 문경에 가서 5.16직후에 민정이양을 실천하지 못한 것을 실천하고 한 명의 농부가 되겠습니다. 잠시 동안 국무총리가 총독 대행을 하고 체육관 선출 총독이 아닌 민주헌법에 맞는 민주 대통령을 국민 여러분이 직접 뽑을 수 있게 국회의원들은 민주헌법을 만들어 주기 바랍니다. 전방에서 이 추운 날씨에 국민의 안위를 위해 철통경계를 하는 국군장병 여러분! 정말 수고가 많습니다. (이하생략)
하지만 그해 서부전선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해 동부전선은 2군단만 방문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세월이 지나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현장을 방문했을 때 사고를 가장한 사망을 했다면 온 국민들에게 영원히 추앙받는 총독이 되었을 것인데 그마저 기회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중앙정보부장에 지명되었다. 연락을 받고 놀랐다. 날아가는 새들도 동작 그만 하면 날다말고 나무에 앉는다는 자리를 맡았다. 총독이 인간적으로 나를 신뢰한 만큼 나도 그에 대한 신뢰는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은 말이 안 된다고 하기도 하고 그럴 수 있어 하기도 한다. 내손으로 총독을 쏘기는 했지만 총독을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해라면 믿어줄까? 이 정도에서 총독정치를 중단시켰으니 다행이지 유신총독의 시대가 80년대 90년대 2000년을 맞이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겠어요?
1970년대야 그럭저럭 총독이 국정철학을 발표하면 믿어 주지만 1980년대는 총독이 국정지표를 언급한다고 젊은이들이 들어주겠어? 총독 긴급초치 1호, 2호, 3호, 4호, 5호, 6호, 7호, 8호, 9호까지 나와도 데모주동자들은 늘어만 가고 부산 마산 시민들이 학생들 데모하는 곳에 빵과 음료수를 가져다준다는 것은 민심이 총독보다는 학생들에게 가 있다는 뜻이고 민심은 천심인데 그걸 총독은 마지막까지 몰랐다. 캄보디아도 300만 명 탱크로 밀었다는 말에 총독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뜻대로 하라는 말에 기고만장한 놈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물은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르고 흐르다 바위를 만나면 양 옆으로 갈라져 흐른다. 바위를 지나면 다시 하나로 합쳐서 흘러 작은 물이 큰 강에서 만나 먼 바다로 흐른다.
우리가 헌법이라고 하는 한자어 헌법(憲法)은 법(法)이 물수(水)에 거(去)가 합쳐진 말이다. 물이 흐르듯 가는 것이 법이고 법 중에 으뜸이 헌법이다. 헌법이라는 단어는 일본식 한자어지만 이제와 굳어진 헌법을 으뜸법이라고 하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다.
무신천대학교 장 준호 교수의 강의는 거침이 없었다. 19××년 무심천대학교 507 강의실 헌법학 교실은 중앙정보부 충북지사의 주요 관심 교실이었다. 강의실이 넓으면 어느 구석에 도청장치를 설치할 수도 있었으나 507 강의실은 아주 작은 40명 정도 들어가면 곽 차는 강의실이라 교수가 교단에서 보면 맨 뒤까지 한눈에 보여 어디다 도청장치를 할 수가 없었다. 중앙정보부 충북지사 무심천대학 파견관 백운택 사무관은 도청장치가 없으니 복도를 지나가면서 슬그머니 507 강의실에 강의를 들어 보거나 학생들을 접촉해 커피를 사 주면서 노트를 빌려보는 방식으로 정보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중위로 전역하여 중앙정보부 7급 특채로 들어갔다. S 대학교 체육교육과를 나와 체력도 튼튼하고, 군대서도 단기복무자지만 장군 전속부관을 하고 전역했기 때문에 장군들 모시는 예의범절이 투철했고 상황판단도 빨랐다. 그래서 유신사무관이라고 육군사관학교 졸업하고 군대생활 5년 대위로 전역해서 5급 사무관이 득실거리는 중앙정보부에서 나름 진급을 빨리했다. 곧 서기관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서울에서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비석에 김×× 장군, 김×× 의사로 새기면 누군가가 와서 ‘장군’과 ‘의사’를 망치로 훼손했다. 1979년 10.26에 탕! 탕! 혁명을 않았다면 이 땅에 민주주의가 몇 십 년은 늦게 찾아왔을 것이다. 아직도 역사적 평가에 인색함을 무릅쓰고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1963년 초판본 《國家와 革命과 나》에 보면 5.16 민족 혁명은 정신적으로 주체의식의 확립 혁명이며 사회적으로는 근대화 혁명이요,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인 동시에, 민족의 중흥 창업 혁명이며, 국가의 재건 혁명이자 인간개조 즉 국민개혁 혁명이인 것이다.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27쪽
솔직히 5.16에 처음부터 가담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자칭 주체세력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혁명 노선을 뒤늦게 합류한 사람으로 공부하는 차원에서 열심히 읽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박 정희가 경상도 출신이고 사범학교 나온 사람이라고 그를 각별히 생각해 좋은 보직을 주었다. 인간적인 고마움을 늘 간직하고 살았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고마운 것과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가 추구하는 대한민국과 그가 생각하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말이 좋아서 10월 유신이지 유신헌법은 헌법도 아니라는 것이 턱밑에 차올랐으나 어느 누구 하나 유신헌법이 나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사람은 민청학련 사건부터 모두 간첩으로 사형을 시키거나 무기징역을 대법원에서 판결을 했다. 나도 그 유신헌법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공작을 했다.
1979년 10월 중순에 부산 마산 지역에서 데모가 발생했다. 직책이 중앙정보부장이라 잠행하여 사태를 파악했다. 신문보도에는 부마사태를 20세 전후 이 지역 때밀이, 식당종업원, 구두닦이, 공장 단순 노동자 비하의 말로 공돌이 공순이들이 김영삼의 사주를 받아 데모하는 것이라고 했다.
부산역 광장을 볼 수 있는 허름한 골목에서 데모를 관찰했다. 그리고 허름한 식당에서 국밥에 막걸리를 마시는 시민들과 대화도 했다. 신문보도와 반대되는 보고를 대통령에게 했다. 부산경찰서에 연행된 인원이 1000명이라면 200명 정도만 학생들이고 나머지 800명이 부산의 일반시민이었다. 시민들은 김영삼 사주를 받은 일도 없고 남조선 민주주의 해방 전선도 아니다. 이런 것을 특단의 조치 없이 막으려고만 한다면 점점 전국의 대도시는 민중봉기로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총독은 작은 눈이 더 작게 오그라들었다. 잠시 후 나타난 멧돼지가 너스레를 떨었다.
“각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탱크로 쓸어버리면 됩니다. 제가 탱크부대 출신 아닙니까? 캄보디아는 300만 명 학살했는데, 우리도 200만 정도는 탱크로 밀어 버리면 아무 문제없이 조용해질 겁니다.”
멧돼지의 말에 총독 얼굴이 펴졌다. 차 실장처럼 강력하게 처리해야지 이거 중앙정보부가 너무 물러터지니 탈이야! 했다.
그날 의전과장은 플라자 호텔에서 신 여인을 만났다.
이어 내자 호텔에서 가수 심 씨를 만났다. 신양과 심 가수를 태우고 빨리 안가로 가야 하는데 가수가 기타 줄이 하나 나갔다고 갈아야 한다고 해서 가까운 악기점에서 줄을 갈고 행사장에 도착을 하니 저녁 6시 45분이 되었다.
두 박 비서관에게 오늘 저녁에 해치우겠다고 하니 박선호가 놀라는 표정으로 각하까지입니까?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저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실 놈들을 제압한다. 불응하면 발포해도 좋다. 알겠지? 예. 박선호는 대답을 했는데 박흥주는 답이 없었다.
내심 걱정이 되었다. 박흥주는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큰 사고가 없는 한 장군까지 갈 마음이 있는 장교인데, 혹시 거사 전에 변심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그동안 나와의 신뢰 내 지시에 한 번도 아니라고 한 일이 없는 박흥주라 내 명령에 지옥까지 따라갈 거라 믿었다.
만찬장에서 병풍을 등 뒤로 중앙에 총독이 앉고 좌우에 두 아가씨가 앉고 반대쪽에 김 비서실장, 멧돼지와 내가 앉았다. 당연히 이야기는 오늘 준공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이야기를 했다. 오늘 같은 만찬에서는 기분 좋은 말만 할 것이지 멧돼지가 부마사태 이야기 김영삼 제명 이야기를 하면서 슬그머니 나의 부아를 질렀다.
“형님, 각하를 똑똑히 모시지요?” 이어 멧돼지를 향해
“이 버리지 같은 새끼!”
이어 탕! 한 발을 멧돼지에게 쏘았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바람에 총알이 손목에 맞았다. 이어 총독을 향해 한발 발사를 했다. 쏘면서 “대국적으로 청치 하십시오!” 했다.
“김 부장, 왜 이래?”
못들은 척 멧돼지를 향해 다시 방아쇠를 당겼으나 권총은 철커덕! 철커덕! 소리만 났지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밖으로 나왔다. 박선호에게 총을 달라고 해서 들어왔다. 그때 때 전기가 나갔다. 김 비서실장이 불 켜! 소리를 질렀다.
박선호의 권총을 받아들고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겨울 공화국
양성우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 쉬는 것을 보았는가
(중간 생략)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 대고
(중간 생략)
지금은 겨울인가
한 밤 중 인 가
논과 밭이 얼어붙은 겨울 공화국
(이하생략)
-양성우, 《겨울공화국》 중에서
여러 번 총독의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제목부터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권자가 투표를 해서 뽑아 주는 머슴 대통령이 국가와 혁명 그 위에 나라는 식의 제목이 아주 민주주의하고는 어울릴 수 없는 제목이지만 통치철학 5.16 혁명 철학을 알기 위해 여러 번 읽었다.
책 중간에 5.16을 민족혁명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읽는 것을 잠시 멈추고 창밖을 보았다. 하늘의 구름은 저렇게 편하게 흘러가는데 이 나라 민주주의는 언제 쯤 제대로 된 민주(民主) 구경을 할 수 있을까? 전율이 느껴지는 대목을 발견했다.
이 革命의 前程에는 定해진 時限이 없다. 제3공화국 수립만으로 革命이 끝나는 것도 아니요, 어디에서 어디까지라고 期限이 定해질 수도 없다.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27쪽
결국 정해진 시한도 없고 기한도 없이 永久革命이라는 뜻이다. 포장을 혁명이라고 했으니 혁명이지 쿠데타이고 영구집권을 한다는 것을 이렇게 배배 꽈배기로 과서 말을 현란하게 책에 쓰고 있으니 사람들은 이미 1963년에 영구집권 시나리오를 가지고 시작했는데, 일반인은 그걸 모르고 3선만 하면 물러날 것으로 믿었다.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 해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을 하던 중에 문 세광이 손 총에 육 여사가 사망하고 영애가 정신이 우울한 시기에 최 태자마마 편지를 보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 주기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는 걸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내 딸이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
―1975.2.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보낸 편지 중
이 편지를 영애가 읽고 최 태자마마를 청와대로 불러들여 최가 영애의 영혼과 육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세상을 풍자하는 은어 중에 ‘육박전’이라고 있다. 국어사전적 의미는 ‘서로가 맞붙어서 치고받는 싸움이다’ 하지만 1973년의 육박전은 육영수와 박 정희의 부부싸움을 육박전으로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었다. 신민당 국회의원 조모가 정 인숙 사건의 풍자 노래를 불렀다.
국정감사 정기국회에 정 국무총리가 대정부 질의에 답변하는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대신 가사만 읽었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나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영원히 우리만 알았을 것을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어요.
성일이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고관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대가 나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그렇게 모두가 밉지는 않았을 것을
죽고 나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어요.
국무위원자리의 총리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총리는 이런 시중의 노래를 들어 보았는지 알고 있는지 따졌다.
1978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 총재 최 태자마마는 영애를 명예총재로 추대하고 기업에 전화를 해서 기부금 명목으로 돈을 갈취하는 것을 조사해서 최 태자마마와 영애를 떼어 놓으려고 했다. 명목은 구국여성봉사단의 발전기금이라고 했으나 거의 세금 수준이었다. 안내면 세무조사를 받을 판이라 기업들은 눈치껏 재계서열 순위에 맞는 돈을 구국여성봉사단에 바쳤다. 심지어 유정회 국회의원을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다.
백 광현 서기관을 불러 최 태자마마와 여성구국봉사단을 조사하고 영애 관련 사항을 보고서로 만들었다. 총독은 보고를 받고 시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최 태자마마와 영애 앞에서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두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데 중앙정보보가 간첩이나 잘 잡으라고 모욕을 주었다. 최 태자마마도 절대 기업이 스스로 발전기금 낸 것이지 내가 강압적인 전화 하지 않았다고 하고 영애도 모함이라고 눈물을 흘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더구나 육 여사가 없는 상태에서 영애 눈물을 보니 총독 속이 얼마나 애처로웠을까? 이해는 가지만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라고 하는 동양의 처세술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건 아니었다.
보고서는 중앙정보부의 보존문헌실로 가서 봉인되었다. 이날 이후 이 나라에 희망이 없음을 알았고 1인 혁명을 결심했다.
조선시대의 사육신 교훈에서 보았듯이 혁명을 여러 명이 하면 보안을 지킬 수가 없다. 배반자가 나와서 혁명전야에 혁명 주모자들이 체포되어 사형을 당한다. 이런 보안 취약성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 혼자 계획하고 거사 직전 심복에게만 알리고 심복 중에서도 반대자는 그의 손으로 제거, 혁명을 해야 성공한다고 생각했다.
공자님이 살신성인(殺身成仁)을 강조하셨다는데 그는 四字成語로 말한다면 살신성민(殺身成民)을 하기로 했다. 이 한 몸 이 땅 民主聖殿에 바친다고 결심했다.
중앙정보부장 수첩 맨 뒤에 낙서를 했다. 시라고 보기에 너무 치졸하지만 몇 자 적었다.
나의 자유
나를 만일 신이라고 부를 때는
자유의 수호신이라고 부르겠지
나를 만일 사람이라고 부를 때는
자유 대한의 국부라고 부르겠지
독재의 아성 무너뜨렸네
내 목숨 하나 바쳐
자유 민주주의 회복하였네
나 사랑하는 三千七百萬 국민에게
자유를 찾아 되돌려주었네
萬歲 萬歲 萬萬歲 (이하생략)
박선호가 데리고 온 여인들은 각자 자필로 이름을 쓰고 지장을 받았다.
첫째, 각하가 말을 시키기 전에는 먼저 말을 하지 말 것.
둘째, 여기서 만난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것도 묻지 말 것.
셋째, 안가에서 보고 들은 것은 일절 외부에 발설하지 말 것 이를 어기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을 것을 서약합니다.
서약서 작성 후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신 양을 총독 옆에 앉혔다. 나이와 이름을 물어보고 예쁘게 생겼다고 칭찬을 했다. 삽교천 방조제 준공 뉴스를 보고 싶어 했다. 7시 뉴스에 나올 것이라고 TV채널을 9에 맞추었다. 만찬장 흥이 무르익었다. 심이 자신의 노래 〈그때 그 사람〉을 부르고 앵콜 송으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렀다.
멧돼지가 〈도라지〉를 불렀다. 남 효주가 들어와 박선호 과장이 보자고 해서 대통령에게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하고 나갔다.
박선호에게 가니 손가락을 동그랗게 표시하면서 준비 다되었음을 알렸다. 머리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하고 만찬장 안으로 들어왔다.
신 양이 〈사랑해〉를 부르겠다고 해서 심 가수가 기타 반주로 음을 맞추었다.
그 순간에 김 비서실장에게 각하를 좀 잘 모시십시오! 했다. 멧돼지를 향해 이 버러지 같은 놈 하면서 한방을 쏘았다. 이어 총독을 향해 한방 쏘았다. 그런데 첫발 멧돼지에게 쏜 것이 명중이 안 되어 손목에 피를 흘리면서 화장실로 도망을 갔다. 다시 한방을 쏘았으나 권총이 철커덕! 찰칵! 소리만 나지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 박선호에게 권총을 받아 안으로 들어와 총독과 멧돼지를 확인 사살했다. 비유하자면 로마를 위해 시저를 죽여야만 했던 부루투스 심정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죽이려면 총독만 죽이지 멧돼지를 왜 죽이냐 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 내 마음은 총독도 미웠지만 이놈은 인간도 아니라고 여겼다. 예비역 대위 출신이 지 휘하에 꼭 별을 자리를 만들어 경호실 국기 강하를 하면서 허름한 유정회 국회의원들이나 허름한 나라 대사를 불러 옆에 세우고 식을 했다. 완전 이 나라 부통령행세를 했는데 총독은 알면서도 묵인했다.
만찬장 안에서 총독과 멧돼지를 처치하는 총소리를 듣고 밖에서는 박선호와 박 흥주가 경호실 부하들을 제압했다. 정 인형과 박선호는 해병대 동기였다. 총소리가 나자 박선호가 총을 꺼내 꼼짝 마! 했다. 안 재송은 사격 선수답게 민첩한 동작으로 총을 뽑았다. 박선호가 먼저 뽑은 총으로 안 재송을 쏘았다.
혁명계획은 총독을 사살하고 육군참모총장으로 혁명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말을 육군참모총장에게 미리 말했다가 그의 생각이 나와 다르면 시행도 전에 내가 반역죄 될 것 같아 그에게 미처 말하지 못하고 거사를 했다. 실수라면 그 혁명위원회라는 것이 국무회의를 거쳐 계엄을 선포하고 다음 단계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다. 하지만 미완의 혁명이지만 총독을 없앤 것만으로도 이 나라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한 것이라고 2021년이 가을이 되면 역사가들이 나를 재평가하리라 믿었다.
김 비서실장에게
“형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보안을 철저히 하십시오!”
“응, 알았어.”
만찬장을 나왔다. 목이 말랐다. 물을 찾았다.
김 비서실장은 피투성이 총독을 국군지구병원으로 후송했다.
당직 군의관 안 대위에게 빨리 조치해! 이분 꼭 살려 했다. 군의관은 맥박을 확인했다. 응급 심폐소생술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병원장에게 전화를 했다. 비서실장이 “환자 한 명을 데리고 왔는데 원장님이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를 했다.
원장이 와서 환자 얼굴을 확인했다. 배를 걷었다. 반점이 보였다. 원장은 총독임을 알았다. 전화기를 들었다. 국군지구병원은 보안사와 직통연결 전화가 있었다. 보안사 참모장 준장에게 총독각하 서거를 알렸다.
(여기서 시간대가 갑자기 바뀝니다. 박정희 사망 장면에서 과거로 돌아가는데 의도사항이신가요?)-> 예, 내가 총을 쏘려는 마음은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결심은 부마를 눈으로 보고 실행했으니까요.
1979년 10월 17일 이날은 72년 유신선포 7주년 기념행사를 했다. 청와대 영빈관에는 3부 요인들과 유정회 국회의원들이 가득 찼다.
도열해 있던 일행은 총독 등장에 박수를 쳤다. 총독의 유신 결단은 구국의 결단이라는 칭송의 건배를 했다. 이 시간 부산에서는 유신철폐를 외치는 시민들의 데모가 일어났다. 부산대학교 교정에서 시작된 시위는 교문을 나와서 시가지 행진으로 번지면서 시민들이 가세했다. 부산대학교 정상천이 초안을 작성한 〈민주구국투쟁 선언문〉을 낭독했다.
반만년 역사 위에 이처럼 무자비하게 수탈을 하는 집단이 또 있겠는가? 일제의 수탈은 왜놈이 조선을 지배하느라 그런다고 하지만 이건 같은 민족 더구나 국민들이 투표로 뽑아준 공직자가 국민 위에서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수탈하고 잘못은 노동자 농민들에게 덧씌우고 있다.
YH 여공들의 죽음과 그들의 외침을 보라! 김영삼 제명을 보라! (이하생략)
영빈관에서 흥이 무르익어 유신이 영원할 것처럼 유신의 영원함을 위하여! 외치면서 축배를 서너 잔 마셨을 때 내무장관이 총독에게 다가가서 작은 말로 보고를 했다. 순간 총독의 얼굴이 검은 얼굴이 더 흙빛이 되었다. 만찬은 중단되었고 비서진과 관계기관 대책회의 참석자들이 총독 서재에 모였다. 정답은 이미 정해졌다. 부산에 계엄을 선포하기로 했다.
국무총리는 형식을 지키느라 밤 11시 30분에 비상 국무회의 소집을 했다.1979. 10.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의결했다.
박흥주를 대동하고 부산으로 잠행했다. 부산시의 데모는 인접 마산과 창원으로 퍼졌다. 10월 20일에는 마산과 창원에도 위수령이 발동했다. 서울에서 1공수여단과 포항 1해병사단에서 1개 연대가 급하게 부산으로 이동했다. 계엄군이 각 대학을 대대 단위로 나누어 점령했다. 내가 부산 시민들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박 흥주가 택시를 잡았다. 택시기사가 어디로 모실까요? 하는 말에 흥주가 광복동으로 가자고 하니 거기는 데모가 심해 갈 수 없다고 했다. 박 흥주는 기사에게 가다가 막히면 거기서 내리더라도 데모 장소 가장 가가이 가주세요 했다. 택시 기사는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출발하자마자 계속 총독 욕을 했다.
“손님, 총독이 요즘 미친 거 아닌 교? 부산시민을 홍어 좆으로 보면 큰 코 다칠 기라 예, 우리 부산 시민이 투표로 뽑아 준 김영삼을 누구 맘대로 제명하는 교? 공화당 유정회 그 새끼들도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선별수리가 뭡니까?”
그렇게 욕을 듣다 보니 택시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에 왔다. 시내 시민들은 데모하는 사람은 데모를 일반 시민은 데모데들에게 김밥과 빵과 우유를 전달하고 있었다.
1979년 12월 11일 남한산성이라는 은어로 불리는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신문 만물상 코너에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나를 표현했다. 개도 주인을 물지 않거늘 총독의 심복이 시해한 것을 두고 그런 평을 했다.
여러 명의 변호인이 나를 변호하겠다고 사설 변호인단을 구성한 것을 모두 물리치고 국선 변호인을 택했다. 유신총독시대에 대학생들은 데모하다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공장 노동자들은 노동 운동하다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때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많은 변호를 해 주었다. 만물상이 익명으로 기사를 쓴다고 나를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한다는 것이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생각을 했다. 세월이 지나면 좀 나아질까? 비유하자면 쥐 100마리 사는 동네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어서 쥐들이 고양이가 우리를 잡아먹는데 고양이 오는 것을 빨리 알 수 있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 주자. 그러면 우리가 방울소리 듣고 발리 도망갈 수 있다고 했다. 모두 좋은 의견이라고 찬성을 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토의를 했다. 쥐들은 모두 핑계를 댔다.
국민들은 다 알고 있다. 유신총독헌법이라는 것이 국민들의 기본권을 많이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총독 앞에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부 아첨의 발언만 했다. 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쥐의 심정으로 국민들의 제한된 기본권을 돌려주기 위해 총을 들었고 총독을 쏘았다.
총독을 죽이고 정권을 차지해서 내가 총독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불교 《금강경》을 많이 읽었다.
切有爲法이 如夢幻泡影하며, 如露亦如電하니 應作如是觀이니라.(일체 현상의 모든 생멸법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그림자 같고 번개 같으며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어다)
1980년 5월 24일 죽음을 맞이했다.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한 일이지만 죽음이 내일이라 생각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지난 50년의 시간이 영화 필름처럼 돌아갔다. 어린 시절 구미에서 지내던 일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에 차출된 일, 해방 후 국군 소위가 되었고 남들 중위로 진급할 때 파면당한 일 다시 복직되었다.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거 파면 당해서 김천에서 고등학교 체육교사를 할 때 안 선호가 그의 제자였다.
해병대 장교를 우수하게 근무했으나 해병대가 해군에 흡수 통합되면서 자리가 없어 안 선호는 전역을 했다. 전역해서 개인 사업을 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고 내가 공직으로 끌어들였다. 말이 공직이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하는 일이 총독 채홍사였으니 그는 여러 번 못하겠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더욱 못한다. 그래도 박선호는 그의 제자고 인간관계가 있어서 참고 할 수 있는 동안 하라고 달래 온 것이다. 새벽에 교도들이 나를 불러냈다. 남한산성에서 호송차를 타고 서대문 구치소로 이감시켰다.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 때에 우리 독립 운동하는 분들이 고문을 당하고 사형을 당하던 곳에서 내가 죽음을 맞이한 것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대법원 판결까지 3심의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한 번의 재판이 남아 있다. 이것은 하늘이 하는 재판이다. 사람이 하는 재판은 오판이 있을 수 있으나 하늘이 하는 재판은 오판이 있을 수 없다. 하늘의 심판인 제4심 역사의 심판에서 2020년 나는 승리한다. 그가 목적했던 민주회복이 그때는 완전하게 회복하고 국민들의 역사의식도 높아지고 역사가들이 그를 역사책에 의인으로 기록하자고 할 것이다. 그는 그날을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군대서 3군단장을 할 때 유신헌법이 공포되었다. 군단장 공관 철조망을 안에서 밖으로 도망갈 수 없게 거꾸로 설치했다.
연말에 3군단에 위문을 오면 공관에 구금을 하고 대통령에서 하야할 것을 녹음기에 녹음을 해서 방송국으로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해 연말 3군단 부대방문을 그냥 넘어갔다. 다음 전역을 해서 건설부장관이 되었다. 그때도 건설현장에 일대일로 만났을 때 저격을 하려 했으나 그런 기회를 만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잡은 것이 궁정동 10.26 만찬이었다.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안 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등방문을 저격한 것과 내가 총독을 저격한 것은 같은 차원의 거사였다. 도마 안 중근이 이등박문을 저격한 이유가 15가지였다.
안 중근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한 열다섯 가지 죄상을 말했다.
첫째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둘째는 대한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셋째는 을사 5조약과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넷째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다섯째는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여섯째는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일곱째는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케 한 죄요.
여덟째는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아홉째는 교육을 방해한 죄요.
열째는 한국인들의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열한 번째는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열두 번째는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는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한 죄요.
열세 번째는 한국과 일본이 분쟁이 끊이지 않고, 살육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데도, 마치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는 천황을 기만한 죄요.
열네 번째는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요.
열다섯 번째는 일본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때문이다.
내가 총독을 죽인 열다섯 개의 이유는 첫째는 구악을 일소한다고 신악을 만든 것이요 둘째는 목포에서 김대중 당선을 막기 위한 부정 선거를 저지른 죄요. 셋째는 3선 개헌을 한 죄요. 넷째는 유신헌법을 만든 죄요. 다섯째는 긴급조치를 발령한 죄요. 여섯째는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해 무고한 학생을 죽인 죄요. 일곱째는 김신조를 핑계로 만든 실미도 부대원들의 어이없는 죽음을 은폐한 죄요. 여덟째는 월남파병 군인들에 대한 전투수당 절반을 갈취한 죄요. 아홉째는 유정회 허수아비 국회의원을 만들어 거수기로 만든 죄요. 열째는 200명이 넘는 여자들을 강간한 죄요. 열한 번째는 부일장학회 영남대학교를 강탈해 정수장학회를 만든 죄요. 열두 번째는 민족의 자존심을 버리고 한일협정에서 저자세로 체결한 죄요. 열세 번째는 대한민국 영토를 미군기지로 전락시킨 죄요. 열네 번째는 전, 노, 김, 백, 손 등을 시발로 하나회를 조직 군대의 단결을 저해한 죄요. 열다섯 번째는 영애와 최 태자마마 보고에 대해 친국이라고 3자 대면을 시켜 나를 모욕을 주고 최 태자마마 영애의 나쁜 짓을 계속하게 한 죄이다.
1980년 5월 24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5월 20일에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바로 집행이 되었다. 너무 졸속으로 사형이 집행되어도 어느 누구 하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이미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기 시작한 것을 세상 민심은 알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신문보도를 통제해서 그런 기사가 나가지 않았지만 일본은 새로운 지도자로 전 이 부상한다고 기사화했다.
(위는 ‘나’의 1인칭 시점인데 아래에서는 3인칭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의도사항이신지요?)->모두 1인칭입니다.
5월 24일 새벽 3시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를 출발한 차량이 새벽 4시 조금 넘어 서대문에 도착행대. 지하실 독방에 나를 이감시켰다. 나의 죄수 번호는 101번이었다. 아침 7시에 사형집행실로 이동했다. 집행관이 유언이 있느냐? 묻기에 전날 변호사에게 녹음으로 유언을 남겼다라고 대답했다. 간단하게 한마디 남기라고 했다.
“국민을 위해 할 일 하고 갑니다. 부하 박선호, 박흥주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대법원 판결까지 3심 재판을 받았습니다만 저에게는 아직 한 번의 재판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하는 재판입니다. 사람이 하는 재판은 오판의 있지만 하늘이 하는 재판은 오판이 없습니다. 하늘의 심판인 역사의 4심에서는 저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내가 유신의 심장을 쏘아 무너뜨린 유신 위에 민주회복 국민혁명은 성공했기에 여러분들은 민주주의를 마음껏 향유하기 바랍니다.”
“저는 민주회복을 하고 갑니다. 자유는 하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유신이라는 괴물 헌법 아래 시름시름 병들고 말살되었습니다.
74년도 민청학련 사건 이후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일하다 소리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일하다 사라지는 마지막 사형수가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이후 어느 누구도 자유가 흐르는 민주의 강물을 가록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유의 강물이 민주의 강물이 도도히 흐르는 대한민국이 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자유 민주주의를 꽃 피우고 편안히 사십시오. 대한민국 만세! 자유민주주의 만세!”
(내용상 구분 위해 한 칸 띄움)
이런 나의 유언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12.12 군사반란으로 육군참모총장을 구속시킨 이후 전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서서히 최 대통령을 부담을 주었다. 중동으로 원유 도입선 확보 명목으로 대통령을 해외 순방을 보내 놓고 광주에 시민과 학생들 데모 진압에 공수부대를 투입시켰다.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은 소문이 소문을 낳고 유언비어가 되어 광주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5.17 계엄확대 전국으로 시행을 했다. 광주 5.18 진압은 1979년 부산 마산 사태에 부산을 강경하게 신속 진압을 하지 못해 이웃 창원 마산까지 번졌다는 총독의 논평을 반면교사로 삼아 공수부대 2개 여단을 투입하여 전광석화 같은 진압을 했다. 광주의 피를 먹고 제5공화국이 탄생되었다. 1979년 12.16일 장충체육관에서 선출된 최 대통령은 1년 이내에 민주적인 절차로 헌법을 새로 만들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출하는 것만 관리하고 물러나겠다고 했으나 그 1년의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1980년 8.15 광복절 기념식만 하고 하야를 천명했다. 민주헌법을 만들어 새로운 지도자를 뽑고 물러나겠다는 소박한 최 대통령의 꿈은 사라졌다. 다시 장충체육관에서 선거인단에 의한 체육관 대통령으로 전이 선출되었다.
제5공화국은 총독의 시대보다 좋다고 볼 수 없었다. 유신의 무겁고 우울한 공기가 서울 하늘을 내리 누르고 있었다. 가장 눈물겨운 것은 박 종철 군의 고문 사망사건이었다. 신문 만평에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한 줄의 만화가 많은 국민들 눈물을 흘리게 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질긴 것인데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인가? 죽을 만큼 고문을 했으니 종철이가 죽은 것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 대통령이 된 전두화과 노태우는 잘 알고 있었다. 공부보다는 축구나 럭비를 잘 하던 놈들이 대통령을 하니 나라꼴이 뭐가 되겠어. 문화를 개방한다는 명목으로 프로야구 도입하고, 각종 영화제 음악제 특히 대학생들을 정치에서 눈을 돌리게 하느라 대학가요제를 장려했다.
(‘나’는 위에서 사형 당하지 않았나요?)->죽었지만 회상입니다.
국선 변호인이 나를 접견 신청했다. 국선 변호인은 사회에서 잘 나가는 법무 법인에 가담 못한 변호사에게 개인 적으로 변호사를 고용할 형편이 못되는 피고인을 위해 국가가 순번을 정해 무료 변론을 하는 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