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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유 Oct 31. 2023

12. 영화 '걸캅스', 그리고 '발레리나'

여성 서사 영화들은 나아가고 있다

[아래의 내용에는 영화 '걸캅스'와 '발레리나'의 스포일러와 개인적인 감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9년에 나를 열광시킨 영화가 있다. 열광하다 못해 영혼 보내기를 포함해 10번은 영화표를 구매했던 영화. 그럼에도 겨우겨우 100만 관객을 달성한 영화. 개봉 전부터 개봉 이후까지 온갖 루머비하에 시달렸던 영화.


걸캅스다.


 영화 '걸캅스'의 줄거리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주인공 박미영(라미란)과 조지혜(이성경)그리고 양장미(수영), 세 명의 여성 경찰이 디지털 성범죄로 인해 자살 시도를 한 여성을 구하기 위해 뛰는 코미디 액션극이다. 성범죄 피해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 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하루 남짓, 그 사이에 관련 범죄를 지속적으로 저지른 일당을 찾아내고 체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어떻게 보면 여성 배우들이 주연인 평범한 코미디 영화에 지나지 않으나, 당시 해당 영화에는 말도 안되는 억측과 비아냥이 쏟아졌다. 굳이 들춰보고 싶지도 않지만 '시나리오 유출'이라는 허무맹랑한 인터넷 게시글과 함께 해당 배역들이 온갖 멍청한 짓을 하는 영화라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래선지 영화 자체의 재미와 전혀 별개로, 영화 '걸캅스'는 뜨거운 감자였다. 혐오의 언쟁 속에 봐야 한다 말아야 한다로 온갖 말이 쏟아졌고, 덕분에 손익분기점을 겨우겨우 넘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어려운 고비였다. 영화 '미쓰백' 이후 이어진 '영혼 관람'이 영화를 지탱케 했다.


그래서 내가 이 영화를 무슨 사명감의무감으로 봤느냐?

그랬다면 내가 열 번이나 봤을리가 없다. 영화 산업에 미친 부자도 아니고.


 여성이 여성을 위해서 구원하는 서사는 언제나 심장을 뛰게 한다. 어느 여성이든 누구나 연령이나 체형에 상관 없이 당할 수 있는 성범죄 피해가 소재라면 특히. 어리고 약한 이들이 서로를 지키는 영웅 서사에 어린 시절부터 나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하지만 지난 미디어를 곱씹어보건데 대체로 그런 이야기는 영웅-주인공이 남자였으며, 희생자는 여성일 때가 많았으나 대체로 냉장고 속 여성이 되어 싸늘한 시체 1이 되곤 했다. 그야말로 영웅의 각성을 위한 소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식의 스토리 전개가 워낙 많다보니 어린 시절에는 쉽게 이입했지만, 나이가 먹은 이후로는 자꾸 영웅보다 영웅의 그늘 뒤에서 죽은 여성들이 안쓰러웠다. 언제나 목표나 대상, 피해자가 되고 마는 여성 배역들이.


 왜 여성은 여성을 지키지 못하는가? 그런 고민이 영화계에서도 이어진 덕분에 '걸캅스'라는 영화가 나왔다고 생각했다. 애초부터 가상의 '여자형사기동대'라는 조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여성서사극 '걸캅스'는 나를 뽕차게 만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정의를 위해 현장을 뛰고 있을 무수한 여성 직업인들을 떠올리면 심장이 웅장해진다.


그리고 걸캅스가 개봉한지 약 4년 뒤, 영화 '발레리나'가 개봉했다.




 영화 '발레리나'를 넷플릭스에서 틀기 전 대단한 사전정보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배우 '김무열'의 팬이고, 그가 잠시 까메오처럼 나온다기에 재생을 눌렀을 뿐이었다. 전종서 배우에 대한 호감은 있었다. '연애 빠진 로맨스', '' 등 독특한 여성 주연 작품에 자주 등장했고, 특히 '콜'에서의 존재감과 열연이 무척 인상 깊었었다. (혹시 두 작품을 보지 않으신 분은 넷플릭스 등 OTT를 통해 꼭 감상하시기를 바란다. 벡델데이 수상작인 연빠로와 전종서/박신혜 주연 스릴러 콜은 정말 재미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발레리나'의 스토리를 간단히 살펴보자.


주인공 옥주(전종서)의 절친, 민희(박유림)가 어느날 자살을 선택하며 유서로 옥주에게 자신의 복수를 부탁한다. 무작정 죽음의 원인을 파헤치던 옥주는 민희가 어떤 조폭에 의해 성범죄를 당했고 해당 피해 사실이 담긴 영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영상으로 민희가 협박당하며 죽을만큼 고통스러워 했다는 사실도. 옥주는 경호일을 해왔던 자신의 과거 경력을 이용해 남자와 조직에게 칼을 뽑아든다.


 어떻게 보면 아주 평범한 복수 느와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전체의 미장셴은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듯 순간순간 아름다웠다는 점, 그리고 여성과 여성과 여성이 자신과 친구를 위해 싸운다는 점이 내 심장을 뛰게 했다.


 성범죄와 디지털 성범죄는 왜 이렇게도 떨어지질 않는 문제인지. 문득문득 화장실에 갈 때마다 이름 없이 난 못질을 쳐다보던 날들이 생각난다. 비록 그와 함께 '내 몸은 질이 낮으니 촬영이 되더라도 성적 상품 가치도 없을 것'이라는 식의 자조와 비하가 따라 붙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두려움은 여전히 존재한다. 성범죄는 어떤가. 올해 여름, 조금 노출이 있는 차림의 옷을 입고 타 지역을 갔다가 한 중년의 남성이 비키니를 입은 사진과 내 가슴을 몇 번이고 번갈아봐 친구들과 나를 경악시켰던 경험은 한동안 날 멘붕에 빠트렸다.


 옥주는 민희의 죽음을 피하지 않고,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여 기꺼이 복수한다. 그녀가 가진 고통이 자신의 일이라는 것처럼 공감하고, 아파하고, 또다른 피해자인 이들을 현장에서 도망치게 한다. 그들은 다시 각자의 총을 쥐고 자신의 가해자였던 이를 쏴죽이고 불태워 죽인다. 전종서의 멋진 액션씬은 또 얼마나 아름답던지. 여성 배우가 스토리의 메인에 서있는 서사는 이토록 나를 들뜨게 했다. 비록 죽음이라는 선택을 한 민희조차도 마지막 '복수'라는 키워드를 주체적으로 던지고 가는 존재로 보였다. 모든 여성이 여성으로서 존재했다.


 영화 발레리나 포스터를 찾기 위해 검색을 하자 '전종서만 눈에 띄는 영화' '재미 없었다'는 혹평들이 쏟아진다. 남들은 그렇게 봤을지도 모르겠다. 흔한 복수극, 평범한 액션 영화. 하지만 나에겐 발레리나는 이 세상 많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을 위한 복수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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