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 이태원참사 1주기를 추모하며
22년 10월 29일, 당시의 나 역시 2차 가해자였다.
이태원은 너무 먼 곳이었다. 광주에서 서울갈 일도 드문데, 서울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기회도 많지 않았다. 이태원이라는 지명 자체만 알았을 뿐, 그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완전 딴 세상 같았다.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내가 알고 있는 압사사고는 삼 면이 막혀있고 그 길목에 사람들이 갇히는 경우였다. 예를 들어 영국의 힐스버러 참사라던지. 그런데 이태원의 어느 골목에서 압사 사고가 터졌다고 했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며, 온통 SNS가 난리였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이태원'을 검색했을 때, 곧장 보인 것은 피해자들의 모습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압사당하고 있는 현장의 영상이었다. 누군가는 손을 뻗으며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누군가는 이미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처참한 현장이 노골적으로 찍힌 영상을 보며 얼어붙었다.
그 영상은 이후 지워졌다. 이태원에서 일어난 해당 사고가 단순 사고가 아닌, 시스템 부재로 인한 '참사'였음이 알려졌기 때문에. 그리고 피해자들을 자극적인 소재로 이용하는 영상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므로. 하지만 그렇게 정리되기 직전, 29일에서 30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나는 그대로 뇌가 굳어버린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명확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국가에선 마약 이야기를 했고, 누군가는 술에 취한 사람들 때문에, 아니면 특정 누군가가 사람들을 확 밀어버리면서, 해당 참사가 벌어졌다고 말했다. 개인의 잘못, 개인의 문제로 몰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고는 내 머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데, 나는 그런 방식으로 피해자와 희생자를 2차 가해로 한 발짝 몰아갔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이젠 모두가 이태원 참사에 국가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변한 건 없다. 어느 책임자도 제대로 사죄하지 않았고 처벌받지 않았다. 용산구청장도, 행안부 장관도, 보석으로 풀려나거나 탄핵이 저지당했다. 이태원 참사로 별이 된 159명의 피해자와 유가족, 그리고 시민들은 갈 곳을 모르는 분노와 슬픔을 1년 내내 끌어 안아야 했다.
23년 10월 29일 토요일, 참사 현장이었던 골목 인근, 이태원역 1번 출구 인근에 오후 2시부터 추모기도회가 펼쳐졌다. 4대 종단이 모두 참여했고, 유가족과 시민단체는 물론 시민들도 끝없이 운집했다. 당초 경찰이 추측했던 인원을 훨씬 넘어섰는지 바리케이트 뒤로 사람들이 서거나 앉지 시작했다. 나 역시 참사 현장을 살피고 추모하며 그 자리에 있었다. 비록 골목에 추모글 한 마디를 남기려 해도 인근을 둘러싼 언론사의 카메라 때문에 가까이 가는 게 부담스러워 결국 포기해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기도회에서 나를 위로한 건 다름 아닌 무지개 깃발이었다.
함께 추모제 전반을 함께 참여했던 선배 활동가 인경과 함께 있을 때였다. 문득 저만치에 누가 봐도 6색의 무지개가 박힌 깃발이 하나 펄럭였다. 기도회 한가운데였다. 우리 둘 다 저 깃발이 어디 단체에서 온 것인지 추측했지만, 전국퀴어모여라도 행성인의 공식 깃발의 모습이 아니었다. 적힌 글씨도 없었다. 결국 사람들을 헤치고 헤치고 다가가 깃발을 들고 있는 이를 만났다.
"깃발을 들고 계신 게 너무 반가워서 인사 드리고 싶었어요. 저는 광주에서 오늘 추모제에 참석하려고 올라온 성소수자 시민입니다."
내 말을 들은 그 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은 성소수자단체 '친구 사이'의 소속 회원이며, 한 영화 감독이기도 한, 성소수자 당사자라고. 왜 이 깃발을 들고 나오게 됐는지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미 공식추모제가 열릴 서울광장에는 다른 성소수자 분들도 많이 와계세요. 제가 알기로도 제 주변에 5분 정도가 해당 참사로 돌아가셨거요. 깃발을 들고 나오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어요. 내가 이걸 들고 나가도 될까. 그런데 어제(추모제 전날) 만나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 동료들이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성소수자도 시민인데 당연히 깃발을 들고 나가도 괜찮다.' 그래서 이 자리에 처음부터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있어서 얼마나 반가웠고 감사했는지, 그런 이야기를 대중 없이 쏟아내고 돌아서는 길이었다. 이태원은 곳곳에 트랜스젠더바와 퀴어프렌들리바가 있는 곳이었다. 종로의 대를 이어 퀴어들의 성지로 자리매김한 이태원에서, 그곳에도 우리가 살고 있었다. 비록 여전히 몰상식한 이들이 기도회를 진행하는 동안에 욕설과 폭력을 휘둘러 경찰에게 저지당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함께 하고 있었다. 기도회가 끝나고 서울광장까지 행진하는 동안에도 손을 잡고 함께 걷는 퀴어 커플들을 흔하게 볼 수 있을만큼.
행진을 하며 인상 깊었던 풍경 하나.
서울광장으로 향하는 행진은 차선 하나를 막고 이동하는 경로였다. 그런데 차도는 4차선이었고, 그말인 즉슨, 우리가 걷는 길목 바로 옆으로 차가 다녔다는 소리였다. 그걸 막는 건 고작 청년 경찰들의 맨몸이었다. 누군가 잘못 핸들을 꺾는다면 그대로 대규모 사상자가 나올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라, 인경과 나는 공포에 떨었다. 거세게 시속 60키로 상당으로 지나가는 차들을 보며 기함하던 우리는 경찰에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안전 장치 하나 없이 걸어도 되는 건가요? 저희도 저희지만 경찰 분들이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
"아, 괜찮습니다. 저는 괜찮으니 걱정 마십시오. 여러분을 제가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직 20대 초중반쯤 되어보이는 어린 청년 경찰은 누구보다도 경찰답게 대답했다.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선의를 가지고 경찰이 됐을 청춘이 결국 걷는 길이라는 게 차와 사람 사이를 몸으로 막는 것이라니. 그리고 그런 일마저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는 경찰의 대답에 문득 서글퍼졌다. 길목에 있는 용산 사저 앞은 누군가의 명령으로 무서울만큼 빼곡하게 경찰의 경호가 이뤄지고 있었다. 개개인의 선의로는 뚫을 수 없는 권력이었다.
행진을 하며 인상 깊었던 풍경 둘.
과로를 해가며 용산 사저까지 겨우 걸은 나와 인경은 결국 행진 뒤로 대열을 이탈했다. 이미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만으로도 체력 소비가 엄청났다. 서울광장까지 모두 걸어갈 체력은 없었고, 광장에서 진행될 추모제를 위해 힘을 비축해야 했다. 잠시 인도에 서서 행렬을 살폈다. 머리에 해당할 행진의 선두는 이미 보이지 않은지 오래였고, 우리가 가장 뒤에서 합류했다고 생각했던 대열은 뒤로 끝도 없이 이어졌다. 대부분은 시민이었다. 아주 평범한 시민.
"집회 시위에 익숙하지 않아보이는 사람들이 많네요."
"그만큼 많은 시민들이 분노하며 참여했다는 뜻이겠죠."
그 뒤로도 한참, 한참을 이어지는 행진 대오의 끄트머리를 보며 우리는 생각에 잠겼다. 서울광장으로 이동하고 나니 그보다도 많은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광장에 서서 시민사회와 유가족이 무대 위에서 읊는 추도사를 들었다. 골목마다 위험이 있었으니 정부가 그 자리에 없었고, 책임도, 질서유지도, 소방 경찰도, 지자체도, 국회도, 그 상황을 방관하고 묵인했다는 절규가 들려왔다. 이 참사로 159명이 사망했고 수백명이 부상당했으며 수천명이 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인터넷에서는 혐오와 모욕이 떠돌았다는 사실을 외쳤다. 당연히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없으며,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까지 아우성쳤다. 그 목소리를 그 자리에 있던 수 천명의 시민이 들었다. 시민들이 응답했다.
추모제가 끝나고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리려 했던 분향소에는 광장의 한 면을 다 채울만큼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골목에도, 그리고 분향소 옆에도, 모두를 위로하고 추모하는 포스트잇이 가득했다. 시민의 분노를 외면하는 권력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어디까지 우리를 저 바닥까지 끌고 들어갈까. 광주로 돌아오는 4시간 동안 제대로 잠에 들지 못했다.
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가 지난 1년간 겪어왔던 상흔과 절망, 그리고 희망과 연대, 투쟁의 기록을 담은 다큐멘터리 '별은 알고 있다'가 지난달 29일 세상에 공개되기도 했다. 어디서 특별히 찾아볼 수도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11월부터 전국 곳곳에서 상영회가 이어지고 있고, 오는 11월 29일에는 광주광역시에서도 '별은 알고 있다' 상영회와 이야기마당이 펼쳐진다. 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 광주전남지부에서는 19번의 추모 걷기를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마다 광주 전역을 돌며 진행한 바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이야기 마당에서 들어볼 수 있을 단 한 번의 기회다. 영화가 주는 울림과 고민의 깊이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다. 꼭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