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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유 Apr 19. 2023

3. 톰보이, just tomboy

킹갓제너럴엠페럴갓그레이트라이언퀸덤 (22.04.02)


  '아이들'은 천재다.

  이번 I-dle의 아이들 신곡 '톰보이 Tomboy'을 들을 때마다 매번 가슴이 뻐렁치고 있다. 도입부만 나오면 갑자기 치명척인 부치에 빙의해 몸을 흔들게 된다. 나는 지금 라리. 부치 파이트를 시작해야할 것만 같다. 혼자 상상에 취해 어색하게 둠칫둠칫을 하다 보면 괜히 가슴이 웅장해지는 것이다. 이 감각은 대략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아, 부치가 뭐냐고? 나도 잘 모르겠다. 순진무구한 앨라이들에게 짧게 설명하자면, 뭐랄까. 여성애 레즈 관계에서 보다 주도적인 위치를 점유하는 사람이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실제로 레즈 문화 내에서는 '남성적(이라고 여겨지는 통념상의 이미지) 레즈비언'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톰보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부치에 걸맞는가. 

굳이 정확한 뜻을 찾아보고 싶어서, 위키를 뒤져봤다.



  '남자의 성역할을 하는 여자 또는 중성적인 매력을 띄는 여자'.

  누가 봐도 '부치'에 대한 설명이 아닌가? 물론 킹앤퀸 작곡작사가 소연님께서는 다른 의미로 쓴 것이겠지만, 모든 작품 해석은 독해하는 사람의 몫이므로. 나는 이 곡을 퀴어페미니즘의 혁신이라고 감히 말하겠다. 


It's neither man nor woman
Man nor woman
It's neither man nor woman
Just me, I-dle


  노래 '톰보이'의 말미 가사다. 남성도 여성도 아니라는 말은 자꾸만 곱씹게 된다. 남성과 여성, 그 둘의 이분법으로 나뉜 어떤 젠더도 아니라는 이야기로 들린다. 노래 '톰보이'는 남성성은 물론 여성성에 씌워진 젠더롤을 거부한다. 특히 아이들의 이름 앞에 '여자'아이들이라는 성별 구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곱씹어본다면, 그 사실은 좀 더 명확해진다. 

  아이들은 페미니즘으로서도 여성의 한계를 규정짓지 않고 다양한 길을 찾아나섰다. 특히 여성아이돌이라는 직군이 완벽한 여성성의 현신을 요구하지 않나. 가냘픈 몸, 하늘하늘한 옷차림새, 환한 미소. 이를 모두 내던지고, 기꺼이 자신을 '톰보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렇다고 헤메코(헤어, 메이크업, 코디)가 완벽하게 남성성을 흉내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넘어서서, '톰보이'라는 모습을 아이들만의 방식으로 구현하고, 무대 위에서 이를 증명한다. 여자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톰보이'는 트랜스젠더다.



  쌉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들어보세요.

  트랜스젠더란 무엇인가? 어원부터 살펴보자면 trans-는 '변화'를 뜻한다. 그렇다면 trans+gender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젠더의 방식을 변화시킨 사람이다. 몇몇 혐오자들에게는 트랜스OO가 'OO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 실제로는 사회가 수행토록 요구하는 젠더롤을 넘어서서 자신에게 가까운 젠더를 자신의 몸과, 사회적 역할과, 성별 공동체로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사람을 뜻한다. 해당 젠더는 사회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으며 (여성/남성 등),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논바이너리), 애매하다고 여겨져 그 가운데 어딘가를 헤맬 수도 있다(젠더 플루이드).

  더 넓게 말하자면, 트랜스젠더는 젠더롤을 가로질러 특정 젠더 수행을 거부하는 모든 이를 통칭한다. 수잔 스트라이커의 '트랜스젠더의 역사'를 발췌하자면, 그가 정의한 트랜스젠더는 '젠더 규범과 기대에서 벗어난 모든 종류의 변이'를 뜻한다. 실은 레즈비언 부치도 게이 바텀도 그리고 기타의 수많은 퀴어도, 일반적으로 여성성과 남성성의 규범을 벗어나있다. 또한, 사회적으로 각인된 젠더롤을 파괴하고 여성성의 수행을 완벽하게 거부하는 '탈코'도 트랜스젠더다.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배우가 있다. 변요한과 조정석 배우다. 두 배우의 공통점, 뮤지컬 '헤드윅'을 거쳤다는 점이다. 변요한 배우를 좋아할 땐 해당 극을 두 번 가량 관람했다. 아쉽게도 조정석 배우의 뽀드윅은 보지 못했다. 그렇게 완벽한 연기를 펼친다는데, 언제쯤 관람할 수 있을까.

  뮤지컬 '헤드윅'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살아온 트랜스여성 '헤드윅'의 일대기를 다룬다. 사실 팬이었던 나는 애정하는 남성 배우가 꾸밈 노동으로 치장한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으로 공연을 다녔다. 그렇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배우가 극 중에서 수행하는 모습은 남성도 아닌 여성의 중간을 오간다.

  극 초중반까지 가발과 긴 속눈썹으로 여성성을 강조하던 헤드윅은 자신에게 남은 남성기가 있음을 밝히는 곡을 부른다. 극의 끝에선 모든 것을 벗어던져 남성도 여성도 아닌 불완전한 자기 자신을 똑바로 마주한다. 한평생 자신이 꿈꿔왔던 사랑의 반쪽 Origin of love 대신, 자신을 긍정하는 성장을 겪는 것이다.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야, 그저 나. 

  젠더롤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날 살아가고 존재하게 하는 것이 먼저다. 다양한 정체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빡빡한 사회를 거스르는 우리가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도, 헤드윅도, 우리도 모두 일맥상통한다. 그저 나, 나일 뿐이다. 살아있는 나.

  아무래도 좋으니 살아남자, 우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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