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A room of one's own>이란 책을 보면 유제품 회사에서 보통 우유와 일 등급 우유가 쥐의 몸에 미치는 효과를 측정한 심리학도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실험은 보통 우유에 비해 일등급 우유를 마신 쥐들이 윤기가 흐르고 대담하며 몸집도 컸다는 결과를 보여주는데, 작가는 이를 보며 '우리가 여성 예술가들에게 어떤 음식을 주고 있는가?'에 대한 자문을 했다고 한다.
4월 박무(薄霧)가 잔잔하게 깔린 아침, 파리에서 노르망디 지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버지니아 울프가 자문했던 질문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예술가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던 노르망디, 이 지역은 예술가들에게 어떤 자양분을 제공했던 걸까? “
노르망디는 '노르망(nortman)'에서 유래한 말로, 북쪽(north)에서 온 사람(man)을 뜻한다. 노르망디 해안이 8세기부터 스칸디나비아 바이킹의 침략을 받자 911년 프랑스 왕 샤를 3세(Charles III)가 바이킹 우두머리인 롤롱(Rollon)에게 공작직위를 부여해 이 지역을 다스리게 했는데, 이때 '북부에서 온 사람들(바이킹)'이 정착한 것을 유래로 이 지역의 이름이 탄생했다고 한다. 이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보자면, 프랑스 북서부 지방에 위치해 바다를 끼고 있기에 해양성 기후를 보이는데, 이 영향 때문인지 일교차가 심하고 변덕스러운 날씨를 자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노르망디의 이 변덕스러운 날씨는 지역 예술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이 변화무쌍한 날씨를 먹고 자란 예술가들은 19세기 인상주의라는 화풍을 탄생시켰다. 소위 ‘빛의 회화’라 불리는 인상주의의 요람이 노르망디!
이 지역에서 반나절이라도 머무른다면, 인상주의라는 화풍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하루에도 몇 번씩 다채롭게 변하는 자연을 마주할 수 있다. 때때로 시공간이 바뀌는 기분이랄까? 비구름에 울적한 마음이 들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쨍하고 해 뜬 날도 보여주는 양파 같은 지역이기에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특히나 이러한 환경적 기질, 그러니까 이 자연의 변화무쌍함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풍부한 영감을 주었는데 그중에서도 빛의 변화에 따른 순간적 양상을 화폭에 담아낸 인상파의 창시자 ‘클로드 모네(Claude Monet)‘가 유명하다.
지베르니와 모네
모네가 1883년부터 죽기 전인 1926년까지 여생을 보낸 지베르니(Giverny)는 노르망디 지역에서도 생기 넘치는 매력을 뽐내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한데, 우리가 흔히 아는 Nymphéas(수련) 연작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모네는 지베르니 정원을 위해, 센강(la Seine) 물줄기를 끌어들여 수상 정원을 만들고 그 위에 일본식 다리를 설치하는 등 이 공간을 가꾸는데 무한한 애정을 쏟았다고 한다. 그리고 연못 위의 수련과 정원 풍경을 그리는 데 생애 마지막 30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하니, 모네에게 지베르니는 삶의 터전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시간대 별로 달라지는 빛의 흐름, 물 위에 반사되어 일렁이는 자연의 모습, 백내장을 앓는 동안 느꼈던 모네의 흐릿한 시선. 이 모든 환경적 요소요소들이 자양분이 되어 모네라는 작가를, 그리고 인상주의라는 화풍을 탄생시켰다.
오늘날까지도 당시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지베르니는 매년 400,000명 정도의 방문객을 끌어들이며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데, 지베르니의 유명세는 비단 인상파 거장의 터전에 대한 궁금증뿐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 ‘인간이 공간을 가꾸고, 그 공간이 한 예술가를 만들었다’는 것을 체감해보고자 하는 호기심, 나아가 공간과 인간의 상호적인 관계에 대해 고찰해 볼 수 있는 경험도 한 몫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일본의 스님이자 일본 정원의 정수라 불리는 젠가든(Zen garden)의 명장 마스노 순묘의 <공생의 디자인>이란 책을 보면 '저는 공간이 인간을 키운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개인과 환경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클로드 모네의 작품이 지베르니를 투영하는 이유와 맞닿아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인간은 개개인이 밟고 사는 대지의 기운을 먹고 자라난다는 사실, 이 불변의 가치만으로도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과 환경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네가 지베르니를 묘사했듯, 데미안 라이스(Damien Rice)의 음악이 아일랜드 특유의 우중충한 분위기를 대변하고,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의 노래가 부드러운 듯 웅장한 토스카나의 자연과 닮아 있다는 것. 이 당연한 섭리를 보면서 문득 이런 질문을 떠올려본다 - “우리는 우리가 지내는 공간에서 무엇을 자양분 삼아 어떤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을까?”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스스로 성장하기 좋은 주변 환경을 부단히 가꾸어 나가는 일에서 시작해보아야 할 것 같다.
<참고 내용>
과거 루브르 궁전의 튈르리 정원에 있는 오렌지 나무를 위한 겨울 온실에서 유래한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은 모네의 수련을 전시하기 위해 특별히 공간을 설계를 했으며, 자연채광에서 감상할 수 있는 방대한 크기의 수련 연작을 소장하고 있다.
모네의 집에는 일본의 ‘우키요에’ 작품들이 많이 있는데, 모네는 당시 유럽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한 색감, 평면적이고 뚜렷한 선’을 가진 우키요에에 매료되어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