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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 Aug 15. 2023

[짧은 생각] 짧은 전주 여행기

 몇 개월 전 전주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동안 방문한 전주는 너무 단편적인 추억 밖에 없어서 이번에 밟는 거리는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걸어보자 마음먹었습니다.

전주 카프카, 문 옆에 작은 공간은 작은 작업실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차를 주차하고 미리 찾아본 독립서점에 들렀습니다. 햇살이 부드럽게 들어왔고 서점도 매우 조용해서 왠지 뒤꿈치를 들고 다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조금 둘러보다 한 손에 꼭 들어오는 얇은 에세이 한 권을 골랐습니다. 


 한옥마을로 떠난 지 십 분 채 되지 않아 길을 잃어버렸지만 상관없었습니다. 성당 앞에서 사진 찍고 싶어 하는 연인도, 추석 날 게스트 하우스 파티를 목적으로 함께 떠난 친구도 없이 나 혼자 무작정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양반처럼 뒷짐 진 채 소복이 느리게 걷는 걸음을 좋아합니다. 그런 걸음은 길고양이도 좋아해서 뒤따라가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가는 데 목적이 없다면 이내 옆으로 지나는 것들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전동성당으로 간다는 한 수녀님의 도움으로 생각보다 빨리 한옥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약간 더운 날씨였기에 그늘이 드리운 의자에 앉아 한복이나 경성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예전에 옛날 교복을 입고 사진 찍은 추억이 떠올라 마음이 맨들 거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금 더 돌아다니다 구석진 곳에 있는 찻집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엔 외국인 커플이 먼저 와있었는데 남자 혼자 온 게 신기했는지 흘깃 눈길을 보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시선을 의식했겠지만 적의 따윈 없는 행동으로 받아졌기에 상관없었습니다.


 나는 보이차를 시키고 독립서점에서 구매한 책을 읽었습니다. 맘이 편한 곳에서 책을 읽다 보면 정신이 몽롱해지며 마치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느낌을 받곤 하는데 그곳에서 역시 책과 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한 시간쯤 책을 읽다 숙소로 돌아와 밀린 잠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파티에 참석해 마음 맞는 사람들과 서로의 인생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래서 전주에서 무엇을 했냐 묻는다면 솔직히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다른 장소에서 책을 읽는 것. 느린 걸음으로 가로수를 구경하는 것. 돌담의 유연한 곡선과 다른 인생의 시간을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여행을 다녀왔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날 찾은 전주는 누군가에겐 전쟁 같은 일상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를 경험했고 잔잔함을 즐겼으니 이만하면 나 혼자 은근히 숨겨두고 꺼내 볼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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