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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랑 Oct 19. 2023

겁쟁이가 쉬는 방법

어쩌다 보니 갭 이어를 가지게 된 사연


 30대인 당신에게 1년의 휴식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얼핏 심리 테스트 같아 보이는 이 질문은 스스로 묻는 자문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조사하는 설문이기도 하다. 삶에 갑작스러운 공백이 생긴 것, 나의 이야기기 때문이다. 호랑이 눈썹을 빼고도 남아야 하는 나이에 휴직을 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공황장애가 생겼기 때문이다. 번아웃으로 인해 온 공황장애는 순식간에 삶을 집어삼켰다. 또래들은 다 멀쩡히 직장을 잘 다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한 것인지 자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 상태로 더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직장을 떠나려고 보니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1년짜리 무급휴직과 대학원에 가서 대학원생으로 파견 근무를 하는 것. 경제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무급휴직을 더 하고 싶었다. 비록 그동안 모아둔 저금을 까먹어야 하기는 하지만,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대학원에 가야 할 것 같았다. 겁쟁이들에게 소속과 수입은 필요하니까 말이다. 학업에는 그 어떤 열정도 없었다. 다만 직장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황에서 대학원은 좋은 피난처가 되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대학원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관인 교수가 이 학교에 오면 무엇을 공부하고 싶냐고 물었다. 전날 열심히 강의계획서를 읽고 갔으므로 자신 있게 ICT 관련한 강의를 들으면 연구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교수는 “ICT가 뭐의 약자인지 알고 연구에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하고 물었고 나는 갑자기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ICT로 시작하는 영어 단어를 삼행시 짓듯이 떠올렸다. “인터넷…. 컴퓨터…. 테크놀로지인가요?”라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교수는 에이비시도 모른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면서 “허, 참! ICT가 뭐의 약자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자기 연구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안단 말이오?”하고 말하고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으며 “오 마이 갓!”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교수의 눈치를 보며 파운데이션이 파일 정도로 바보처럼 하하 웃을 따름이었다.


 면접 후에 한 달 동안은 대학원 결과를 기다렸다. 이제 대학원에 붙으면 어떡하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별것 아닌 걸로 이죽거리는 교수의 모습을 보니, 저 밑에서 대학원생 본연의 업무인 교수 심부름과 부업인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자신이 없었다. 연구자 K도 나의 대학원 진학을 말렸다. 우여곡절 끝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녀는,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상담할 때마다 아름다운 청년 K가 되어 입학처를 불 지르겠다고 말하곤 하였다. 친구가 이런 길로 올까 걱정된다나. 대학원에 덜컥 붙어버릴까 봐 노심초사하던 어느 날, 결과를 받았다. 불합격이었다. 지인들에게 소식을 알렸더니, 불합격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생애 처음으로 적(籍)이 없다. 내 시간의 주인은 바로 자신뿐이다. 태어나 처음 놀이동산 자유이용권을 손에 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뜻이다. 놀기만 하면 되지 않냐고 사람들이 말했다. 그러나 쉬는 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는 것에도 의미와 계획이 필요했다. 시한부 자유를 지혜롭게 쓸 수 있도록 해줄지도 모르는, 아직은 엉성하기만 한 아이디어들을 몇 가지 생각해 냈다. 그중 하나는 글쓰기를 배우기로 한 것이다. 조선왕조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쓰고, 안네가 안네의 일기를 쓰고, 최민석 선생님이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쓴 것처럼(훌륭하게는 못하겠지만), 경험들을 적어 내려가고 싶다. 이 기록들이, 이 시간이 의미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켜 주기를 기대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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