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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랑 Mar 21.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여 년 전쯤이었다. 친구가 나에게 한 작가를 소개해 주었다. “이렇게 글로 웃기는 사람은 처음이야.” 친구의 그에 대한 짧은 감상평이었다. 그 시절 나는 한국문학은 너무 엄숙하다고 생각해 멀리했었기 때문에, 친구의 말에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은 다른 한국문학 작품에서 본 적 없는 신선함과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나를 그의 팬으로 만든 것은 엉뚱하게도 책 말미의 ‘작가의 말’ 때문이었다. 내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었던 문장은 이러했다. “끝으로 만약 당신이 지금 비극을 겪고 있다면, 그 비극이 진심으로 희극이 되길 바란다. 나는 생이란 그래야 한다고 애타게 믿고 있다.” 이상하게 그 말이 사회 초년생으로 고군분투하던 나를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 부분을 조심스럽게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다. 그리고 종종 그 문장을 되뇌었다. 나의 생이 희극이 되기를 응원해 주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기분이었다.     


 시간은 매섭게 지나갔다. 그리고 작년에 우연히 그 작가가 글쓰기 강의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작가에게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 기회이니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작가는 매주 몇 편씩 수강생들의 글을 선정해서 함께 읽는 방법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첫 과제를 제출하고 나서 처음으로 맞이했던 수업 시간에 느꼈던 설렘을 잊을 수가 없다. 내 글이 뽑힌 것이다. 믿을 수가 없어 손에 들린 종이뭉치를 보고 또 보았다. 수강생들이 내 글을 읽으며 함께 웃을 때는 기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아무도 글쓴이가 나인지 몰랐음에도 자꾸 새어나오려 하는 미소를 참아내려고 애썼다. 선생님은 아주 잘 썼다고 말씀하셨다. 당시에는 ‘내가 진짜 잘 쓰나 보다! 어쩌면 난 작가로 태어난 건가봐!’하고 자신감도 솟아났다. 하지만 후에 알고 보니 허무하게도 그건 선생님의 입버릇이었다. 처음 글을 쓰는 새싹들을 짓밟을 수는 없으니 다 잘 쓴다고 해주셨던 것이었다. 나중에 뒤풀이에서 모든 수강생들이 선생님께 잘 썼다는 코멘트를 받았다고 자랑을 했으니 말이다.     


 글쓰기 수업으로 쓰는 것에 재미를 붙인 나는 브런치라는 플랫폼에서 글을 쓰게 되었다. 내가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은 너나할 것 없이 “내가 구독해 줄게!”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구독자는 늘지 않았고 브런치는 썰렁하기까지 했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말했더니 그는 자기도 당했다며 코웃음을 쳤다. “그건 다 거짓말이야. 내 친구들도 다 날 구독해 준다고 했지만 몇 달째 구독자 다섯 명이었는걸.”이라고 말했다. 그랬다. 지인들이라고 다 독자가 되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은 욕망보다 쓰고 싶은 의지가 더 컸다. 그래서 지인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글을 썼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백만 구독자가 생겼다고 하고 싶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많지 않은 구독자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쓰는 이를 감동시키는 댓글을 받을 때가 있었다. “작가님이 하고자 하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겠기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라든지 “작가님을 보니 제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위로가 많이 됩니다.”라든지 “작가님의 마인드가 좋네요.”라든지. 부모님께도 들어본 적 없는 따뜻한 말들을 들을 때면, 이런 댓글을 받아도 되나 황송하기도 하고 내 글이 누군가에게 감흥을 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나는 왜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일까? 처음에는 흘러가는 시간을 기록으로라도 잡고 싶다는 불안감에 글을 썼다. 하지만 읽어주는 이들이 생기니 나의 글쓰기에도 다른 의미가 생겼다. 지인들조차 들여다보기를 거부한 나의 심연에 닿는 일을 우연히 내 글을 읽은 이들이 해준다는 것은 벅찰 정도로 감동적인 일이다. 그래서 나의 경험과 사유가 그 이야기가 필요했던 누군가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노라고 바라게 되었다. 십수 년 전 ‘작가의 말’이 나를 위로해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쓰면 쓸수록 글쓰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때로는 머리를 쥐어짜며 자학을 할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나는 계속 글을 쓸 것 같다. 러브레터를 쓰는 마음으로 누군가 받을지 모르는 편지를 온 마음 담아 적어내는 기쁨을 알아버렸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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