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랑 Mar 28. 2024

숨바꼭질

나의 적에 관한 이야기

 나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삼십 대 중반에 웬 숨바꼭질이냐고? 먼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누구나 그의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가끔 연예인들이나 유명한 스포츠 스타들과 함께 매스컴에 등장하곤 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가 어떤 특별함도 없는 나를 찾아온 지는 오래되었다. 그를 초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기에, 손님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나는 불쑥불쑥 찾아오는 그를 좋아할 수가 없다. 게다가 올 때마다 행패를 부리니 그의 방문은 나에게 그저 두려움이다. 이 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이 불쾌한 숨바꼭질의 전말은 이렇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단풍이 들기 시작하던 어느 가을 날이었다. 그날의 나는 어땠더라. 아마도 조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하려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불안했던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울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약해진 사람을 알아보는 자였다. 그는 인사도 없이 순식간에 내게 다가왔다. 눈앞에 드리운 그늘에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이었다. 그는 나의 왼쪽 가슴을 힘껏 내려쳤다. 찌릿한 심장을 움켜쥐고 주저앉아 그의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강렬한 첫 만남을 겪은 후에도 나는 그가 그인 줄도 몰랐다. 어쩌면 심장에 이상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병원에 찾아갔다. 의사선생님은 차분하게 '공황장애'라는 그의 이름 넉 자를 말해주었다. 이름조차 공포스러웠다. 그때는 몰랐다. 일방적으로 쫓기는 숨바꼭질을 시작하게 된 것을.     


 첫날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나를 수시로 찾아왔다. 그가 찾아오는 횟수도 잦아졌다. 사흘에 한 번, 이틀에 한 번, 하루에 한 번, 하루에 두 번, 하루에 세 번. 그가 주로 나를 찾는 시간은 모두가 잠든 새벽 세시였다.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에 깨어보니 그는 이미 떠나있었다. 그런 날에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너무 아파서였을까 그가 다시 찾아올까 두려워서였을까. 다음으로 그가 나를 찾아내는 시간은 식사 시간이었다. 그가 다녀간 뒤에는 속이 메스꺼웠다. 음식이 역겹게 느껴져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빈속이지만 다 게워낼 것만 같았다. 그의 괴롭힘은 점점 심해졌다. 몇 달째 잠도 못 잤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나는 점점 피폐해져만 갔다. 오랜 시간 정성들여 쌓아놓은 일상은 모래성처럼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나는 그를 적극적으로 피하기로 했다. 술래를 피해서 안전한 곳으로 꼭꼭 숨기로 마음먹었다. 어쩔 수 없이 직장도 쉬기로 했다. 그는 내가 어디에서 일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는 이상할 정도로 집요했다. 좁은 방구석에 숨어있을 때도, 새로운 학원에 갔을 때도, 런던의 어느 햄버거 집에서 친구와 햄버거를 먹고 있을 때도 나를 찾아내고야 말았으니까. 십 평 남짓한 가게를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에서 똑똑히 그를 느꼈다. "왜 그래?" 친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폈다. 나는 벌벌 떨고 있었다. "그가 여기에 있어." 친구는 밖에 나가서 좀 걷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런던의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친구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나는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지껄여댔다. 다리도 천근만근이었다. 그날의 런던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친구가 내 헛소리를 듣다 못해 숙소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나도 모르게 안도했던 것만은 기억한다.     


 또 다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도 런던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어. 친구들도 가족들도 자는 시간이라 아무한테도 이야기 못했어. 혼자서 두려워서 울다가 잠이 들었어." 런던이 그의 주 활동지였던가? 하지만 나는 내 친구가 그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언제부터 그랬어?” “나도 꽤 오래되었어.” “그런데 너 그런 말 한 적 없었잖아. 완전히 좋아진 게 아니었어?" 항상 유쾌하던 친구의 얼굴에 슬픔이 드리워졌다. "아니야. 나도 최선을 다해봤는데 잘 안됐어." 친구의 표정은 자포자기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그녀를 보는 내 얼굴도 그러했으려나. 친구는 핀란드의 외딴곳에 살았다. 인적이 드물고 외부 자극이 적은 무균실 같은 곳. 그곳에서는 그의 방문을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본인을 다 잊은 것이라 생각했었다고. 하지만 런던처럼 공간이 비좁은 가게들이 많은 곳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숨어든 그에게서 도망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절망적이었다.      


 그는 삼 월에는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아무래도 괴롭힐 다른 누군가를 찾은 모양이었다. 나는 안도해야 할지 그가 찾았을 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걱정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그가 내 존재를 잊었길 바랄 뿐이다. 그가 불안한 사람을 어떤 식으로 파고들어 괴롭히는지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그의 존재가 날 불안하게 하지만, 그가 날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불안해서는 안 된다. 요즘도 항상 부적처럼 비상시를 대비한 항불안제를 지니고 다닌다. 이 영원할 것 같은 숨바꼭질이 한시라도 빨리 끝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