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학생인권조례 전후 학교 현장의 변화
첫 브런치 글로 무엇을 쓸까 하다가 기존에 오마이뉴스에 기고했던 글 중을 다듬어 올리기로 했다. 기사로 쓰기에는 너무 길 것 같아서 삭제했던, 그러나 적고 싶었던 이야기를 덧붙였다. 공개하기에 부끄러운 경험이지만 자백하는 기분으로 적었다. (다소 사담이 많을 수 있습니다. 머쓱..)
서울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될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조례가 제정되기 전의 학교를 떠올렸다. 서울 학생인권조례가 주민발의된 2011년(2012년 시행)에 나는 중학교 과정에 있었는데, 당시 교실 안에서 교사가 학생을 때리는 일은 거의 일상이었다. 갓 입학했을 무렵 복도에서 머리채가 잡힌 채 끌려가는 친구를 보고 경악하는 우리에게 학생부장 교사는 말했다.
"너네도 이렇게 되기 싫으면, 머리에 장난질하지 마라."
그때도 지금도 교사들이 말하는 체벌의 이유는 다양하다. 머리를 염색해서, 치마가 짧아서, 수업시간에 졸아서, 교사를 보며 웃어서... 초·중등교육법에서 체벌이 금지되고 서울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며 학생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체벌은 차차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벌점과 윽박지름은 여전히 남아 있다. '벌'의 방식은 달라졌더라도, 학생을 겁주는 학교의 본질은 변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 안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나 또한 처음 당한 체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업 중이던 교실에서 하품했다는 이유로 뺨을 얻어맞은 날이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하품하는 게 왜 맞을 일인지, 나는 놀란 것인지 화난 것인지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채로 연신 교사에게 잘못했다고 빌어야 했다. 맞은 건 난데 교사가 더 화를 냈다. 나를 때린 사람에게 사과하는 경험은 단번에 몸에 각인됐다.
혼나는 것이 무서워 그날 이후로 나는 '모범생'이 됐다. 개근하고, 학업에 성실하고, 학칙을 잘 지키는 학생이 되려고 노력했다. 누군가는 교육이 성공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은 폭력의 질서에 순응하며 나를 잃어가는 시간이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담임교사의 추천에 1년간 선도부 활동을 했는데, 주로 하는 역할은 교문에서 용의 복장규정을 위반한 학생들에게 벌점을 주는 일이었다. 머리길이, 머리색, 치마길이, 체육복, 슬리퍼 등 세세한 규정들에 맞게 점수를 적고 종이를 내밀었다. 내가 내민 종이들은 쌓이고 쌓여 내 친구를 향한 체벌이 됐다. 학교 입구에서, 복도에서, 교무실에서 손바닥을 들고 매 맞을 준비를 하는 학생들을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선 도저히 지나갈 수가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이 가져온 결과를 마주할 용기도, 책임질 자신도 없어서 종종 빈 종이를 내밀거나 점수를 일부러 적게 적어서 주곤 했다.
지도교사가 옆에 서있는 날에는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때로는 사정하며, 때로는 협박하며 한 번만 봐달라는 요청에 교사의 눈치를 보며 상대와 실랑이를 해야 했다.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두 번째 역할이었다. 항의하는 학생과 학교를 대신해서 싸우는 일. 정작 용의 복장규정을 만들고, 체벌로 통제하던 교사들은 쏙 빠져서 한 발 떨어져 우리를 지켜볼 뿐이었다. 우리에게 교문은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공간이었다. 1년의 임기가 끝나자마자 나는 지옥 같던 교문으로부터 도망쳤다.
1학년 때에는 불평하던 친구들도 매일 다 같이 맞다 보니 덤덤해졌다. 그렇게 아무도 이 상황을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게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 또한 다른 학생을 보면서, '쟤가 맞을 만해서 맞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어느덧 권위에 쉽게 굴복하고, 인권침해에 둔감해지고, 연대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학생을 이렇게 만드는 교육을 성공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느 날엔가는 친구의 다리가 온통 멍으로 가득한 것을 봤다. 미술 수업 중에 머리를 빗어서 맞았단다. 그 다리를 보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면에서 깨어나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날부터 친구들이 맞을 때마다 교육청에 신고하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친구들의 반응은 항상 같았다. "우리가 선생님을 신고해도 되는 건가?", "이 정도도 신고할 수 있나?" 친구들의 그런 질문들 앞에서 항상 말문이 막혔던 기억이 난다. 당시 우리에겐 이 상황이 부당하다는 자각도, 부당함을 이유로 시정을 요구해 본 경험도 없었기 때문이다.
폭력이 영원할 것 같던 학교에 갑자기 학생인권조례가 등장한 날이 기억난다. 늘 그렇듯 자는 학생을 때리던 한 교사가, "아 맞다. 이제 이러면 안 되지?"라며 사과하는 척하더니만 이내 학생인권조례를 욕했다. 학생인권조례라는 게 제정되면 학생을 때릴 수 없게 된다고 불평을 늘어놨다. 처음 '학생인권조례'의 존재를 알게 된 날이었다. 그 이후로도 교사들은 여전히 습관적으로 우리를 때렸다. 하지만 곧 당황하며 사과했다. 교사가 학생을 '때리지 않는 습관'을 익히는 동안, 우리는 어떤 사람도 맞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익혔다.
같은 교실에 앉아 있었지만 교실의 풍경도, 학생인 우리가 학교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져 갔다. 몸에 밴 복종의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어도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늘 문제로 지목당하고 규제당하는 존재였던 학생이, 이제는 무언가를 정의할 힘을 갖게 된 순간이었다.
2012년 2학기 무렵부터는 체벌이 사라진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변화가 우리 사이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부당하게 벌점을 받았을 때, 원하지 않는 방과 후 학습을 강제할 때, 치마 길이가 짧다며 교사가 강제로 아랫단을 뜯어낼 때 항의하는 학생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조례 제정 이후 학생들이 강제학습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자, 그때까진 의무·강제되던 야간자율학습도 슬그머니 선택으로 변경됐다. 그럼에도 온전히 자유롭게 야간자율학습을 결정할 순 없었지만, 학생들은 사유서를 제출하면 바로 하교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질문해도 되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학생들이, 학생인권조례 제정 뒤 질문의 힘을 얻으며 만들어진 변화였다. 교사들은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애들이 엉망이다."며 불평했지만 나는 엉망진창이 된 우리가 반가웠다.
물론 체벌이 사라진 것만으로 아주 엉망이 되기는 쉽지 않았다. 하루는 신발이 때가 타 색을 알아볼 수 없다며 벌점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신발이 흰 신발임을 증명하느라 애썼는데 아무리 해명해도 벌점을 피할 수는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아마 그는 내 신발색이 진짜로 궁금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졸업한 뒤 아무 신발이나 자유롭게 신고 다닐 수 있게 되자 문득 '왜 나는 그때 그 규정이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규정을 어기지 않았다고 해명하는 쪽을 택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눈앞에 놓인 벌점이라는 제재를 피하기 위해 규범에 순응했던 것이다. 체벌이 사라진 자리에 상벌점제가 굳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2021년도에 복장규정을 허용하고 있던 서울특별시 학생인권조례 제12조 2항의 단서조항이 삭제됐을 때 몹시 반가웠다.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라는 말이 있다. 사회학자 존 맥나이트의 말이다. 존 맥나이트가 말하는 혁명의 정의야말로 학생인권조례가 가져온 변화가 아닐까.
그동안 학교 안에서 학생은 문제라고 '정의된' 사람들이었다. '문제아'라는 노골적인 단어 외에도, 용의 복장과 행동 하나하나에 벌점을 매기는 구조 자체가 학생을 문제적 존재로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학생인권조례의 등장으로 학생들은 자신을 문제아로 만들어온 학교의 문제를 제기할 힘을 얻게 됐다. 10여년 전 학생들에게 학생인권조례는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서울·경기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 여러 지역에서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거나, 학교 규정을 보다 인권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개정 움직임이 뒤따랐다. 그리고 2023년, 제정 11주년을 맞은 서울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될 위기에 놓였다. 게다가 서울뿐만이 아니라 경기, 충남 등에서도 학생인권조례 폐지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처음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경기도 지역, 거기에 2022년 취임한 임태희 교육감은 같은 해 7월 취임 기자회견에서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교사들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라며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11년 전에 교실에서 들었던 교사의 불평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 문장이다. 이는 학생도 인권을 가진 존재임을 부정하려는 시도와 다름없다. '학생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기본적인 요구는 언제까지 끝없는 역행과 맞서야 할까.
학생도 사람이라는 학생인권조례의 선언을 통해 10년 전 학생들이 경험했던 변화를 우리는 계속 만들어나가야 한다. 벌점을 받을까 노심초사하며 '죄인이 된 기분'으로 교문을 들어서야 하는 학교에서는, 어떤 교육도 얘기할 수 없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학생을 '문제'로, 수동적 존재로 만드는 교육으로 되돌아가자는 이야기와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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