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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쥴리 Apr 18. 2024

이 악물고 버티니  다른 계절이 오긴 온다.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하는 절기 '곡우'가 내일이다. 어쩐지 미세먼지가 며칠 전부터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예쁘던 들도 다 졌고 낮과 밤의 일교차도 조금씩 줄어든다. 슬슬 여름옷을 꺼내야 할 때가 돌아왔다. 작년 여름에 전남편과 헤어진 후 본가로 다시 돌아오면서 제대로 정리를 못한 봄, 여름옷 들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 역시 뭐든 미루면 업보처럼 돌아온다니까.


본가로 돌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결혼에 돈을 거의 다 탕진한 업보인지 이제 와서 혼자 살 집을 구하러 다녀보니 맘에 드는 곳은 다 내가 감당하기가 어려웠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쇠약해져 있었다. 나의 엄마는 어떻게 보면 냉정한 사람이라 절대 그냥 돌아오라고 품어 주지는 않았다. 엄마는 나에게 제안을 했다. 네가 갖고 있는 돈으로 본가 네 방만한 방을 구하기도 힘든데 보증금처럼 엄마한테 돈을 드리고 다달이 생활비를 얼마씩 내라고, 그럼 엄마도 식사나 다른 부분들을 신경 써주시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정말 서럽기만 했다. 엄마가 왜 그래? 그냥 좀 받아주면 안 되나?


 그래도 당장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니 엄마 말도 일리가 있었고 나는 당장 이사를 해야 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내가 모은 돈을 다 보증금으로 드리고 나중에 독립할 때 돌려받는다는 조건으로 결국 협상을 하고 본가로 들어왔다. 내 방을 다시 정리하고, 신혼집으로 모조리 가져갔던 물건들을 다시 결혼 전에 있었던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이 마치 원래 내가 있던 곳에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다만 내가 조금 엉망이 됐을 뿐.


본가에서 지내는 삶은 윤택하다. 엄마가 끼니를 챙겨주시고 출퇴근도 편리했고 내가 좋아하는 산책로가 있다. 무엇보다 가족과 다시 함께 사는 게 기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독립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깨는다. 역시 아무 생 없이 무턱대고 결혼을 하는 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해서 이 악물고 버텨보았다. 계절별로 머리도 바꾸고, 일도 열심히 하고,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어 보고, 가벼운 근교 여행도 다녀왔다. 노력을 해봐도  마음은 쉽게 다시 행복해지지 않았다. 손에 한 움큼 집어든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조금씩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기다리는 것 밖에 없다.


 더 이상 남자를 믿을 수 없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영원을 약속하는 것이 여전히 무섭다. 살면서 그렇게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신뢰해 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왜 그 첫 상대를 그 사람으로 골랐던 걸까. 여전히 그런 생각들을 수백 번은 한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여름이 다가오고, 내가 가장 바쁠 시기가 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또 한 바탕 살아내면 될 계획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기억이 또 옅어질 거라 믿어보면서.


작년이 생각나서 조금 힘들었던 봄이 드디어 끝났다. 여름이 찾아온다. 나의 마음도 곧 찾아올 무더위처럼 다시 뜨거워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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