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오빠는 누구였을까. 내가 큰오빠를 기억하는 첫 번째 장면은 확실하면서도 막연한 수묵화의 느낌이다.
어릴 적, 동네에서 제일 넓었던 아랫말 경호네 바깥마당에서 동네 청년들이 배구대회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양 팔로 내 어깨를 뒤에서 감아 내린 셋째 오빠의 손을 내가 잡고 서서 같이 배구 구경을 하고 있는데 큰오빠가 집 쪽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셋째 오빠에게 말했다. “나 토낄 거여.” 신작로와 맞닿아있는 비탈길을 따라 급히 내려가던 그의 뒷모습이 작아지다 사라졌다.
그가 말한 대로 서울로 토끼던 그때가 그가 중학교를 졸업한 해라고 들었으니 열일곱 살이고, 그와 띠 동갑인 나는 다섯 살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둘째 셋째 오빠가 조금씩 돈을 넣어 모아둔 돼지저금통을 그가 뜯어 윗마을 친구에게 준 것을 알게 된 어머니가 그에게 그 돈을 당장 받아오라고 호통을 쳤고, 어머니를 무서워한 그는 그 길로 도망을 간 거라는 걸 내가 조금 커서 알게 되었다.
그렇게 서울로 간 큰오빠는 S호텔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었다. 넷째 오빠가 그곳에 가서 만나고 오기도 했고 넷째 오빠 편에 그는 잼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랬던 기간이 길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또 어디로 갔는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어머니는 자주 큰오빠 이름을 부르며 우셨고, 큰언니는 이렇게 소식이 없는 걸 보면 걔가 혹시 제주도에 있는 건 아닐까 말했고, 그의 군 입대 영장이 나오면 아버지는 큰 글씨로 ‘행방불명’이라고 써서 돌려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5.16 군사혁명 후 군 기피자 자진신고 기간에 군 입대를 피할 길 없던 그가 군대에 가기 위해서 소식을 준 것이다. 그는 가끔 큰언니가 “혹시”라고 말했던 제주도에 있었다. D호텔에서 일한다고 했다. 서울 호텔에 있다가 소식이 끊긴 지 칠 년 만이었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오 학년이 돼있었다. 부모님은 서울에서 장사를 하고 계셨고 우린 아직 고향에서 형제들끼리만 지내고 있던 때였다. 그가 서울에 계신 부모님을 먼저 뵌 후 읍내 지서에 가서 군 입대 자진신고를 하기 위해 고향집으로 왔다.
라디오와 귤과 커피를 가지고 나타났던 그를 귀향 초반엔 봐줄 만했으나 본색이 드러나자 나의 마음은 그에게서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는 늘 술을 마셔 늘 취해있었고, 작은언니는 종일 술상을 차리느라 바빴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어머니가 오신다는 말을 들으면 만취 상태에서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차렷 자세로 서며 긴장했다. 잠을 잘 땐 모로 누워 양 무릎을 구부리고 가슴에 붙여 새우의 모습 같았다.
그러면서 그는 언제부터인지 아랫마을에 사는 연상이며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심하게 불편한 성자언니와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 소식을 알게 된 어머니는 서울에서 내려와 어머니의 친구이기도 한 성자의 어머니를 마을 입구 주막으로 불러내 막걸리를 가운데 놓고 “난 니 딸 내 맏며느리로 못 받아들인다.” 단호히 말하고 서울로 다시 올라가셨다. 성자 어머니도 서슬 퍼런 어머니 앞에서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그동안 그래왔듯 밤이면 당신 집 윗방에다 그들끼리 사랑 나눌 깨끗한 이불을 펴주었다. 그녀의 집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그들의 사랑은 계속됐다. 폭우가 쏟아지는 어느 여름날 저녁 무렵, 우리 집 사랑채에서 성자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으니까.
그의 나이 서른 살이 되자 어머니는 그의 결혼을 서두르셨다. 그의 동생들도 혼기가 차고 있어 마음이 급해진 어머니는 제주에 있는 그를 서울로 불러 올려 선을 보게 했다. 선을 보고 내려간 오빠는 그 여자와 결혼 안 하겠다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시켜 그 여자와 결혼 안 한다면 내가 너 있는 제주도로 쫓아가겠다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냈고, 겁먹은 오빠는 결혼하겠다는 답신을 다시 보내왔다. 결혼준비가 급속히 진행됐고 결혼 날짜가 임박해 그가 올라왔다.
결혼 전날, 함을 신부 집에 갖다 주고 밤늦게 집으로 온 그가 대문 밖에서 문 열어달라고 엄마를 부르던 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초인종이 고장 난 상태였다 해도 누구든 그렇게 하듯 잠겨있는 양철대문을 손가락을 구부려 통통 치며 동생들의 이름을 부르면 될 것을 왜 서른 살이나 먹은 남자가 까치발로 머리를 대문 위로 치켜올리곤 “엄마, 엄마, 엄마!” 엄마만을 반복해서 불렀을까. 그때 나는 대문 앞 수돗가에 있다가 깜짝 놀랐다. 그 큰 소리에 불안과 다급함이 잔뜩 배어 있었으므로. 나는 대문을 열어주며 그가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결혼식이 끝나고 그날 저녁에 큰오빠와 새언니가 저녁에 집으로 왔고 결혼식에 왔던 고향 어른 몇 분도 어머니와 함께 오셨다. 술이 한 잔씩 돌고 고향 어른들이 신랑에게 노래를 시켰다. 그가 부른 노래는 유주용의 ‘부모’였다.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 부르던 그 순간은 그가 정말 서른 살로 보였다. 그런데 그가 노래를 마치고 울며 건넌방으로 건너갔다.
그와 새언니는 집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그들이 생활할 제주도로 내려갔다. 이후 그들에게서 자주 잡음이 들려왔다. 그렇게 육 년의 시간이 흐르고 올케 언니가 갑자기 병사하게 되었다. 하나 있는 그의 딸이 네 살 때였다. 사별한 그는 바로 부모님 집으로 올라와 딸을 부모님께 맡기고 다시 제주도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또 연락 두절이었다. 죽었다더라, 아니 어디에서 누가 봤다더라, 부재중인 그에 관한 잔 소문은 확실한 출처도 없이 사철 바람에 가끔씩 묻어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16년이 지난 어느 봄날, 부모님은 그가 교통사고로 제주의 한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전화를 받으셨다. 다음날 그는 들것에 실려 서울 부모님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올라왔다. 나는 기억한다. 그때 머리에 깁스를 하고 병원에 누워 “씨이팔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도 나는 아직도 엄마가 무섭다” 하며 울부짖던 그의 모습을.
몇 달 후 퇴원을 해 부모님 집에서 여러 달 통원치료를 더 했고 몸이 회복되자 그는 다시 제주도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해 겨울, 부모님은 네 살 때 제 아빠와 떨어져 이제 스무 살이 된 그의 딸에게 아빠한테 가서 대학 다니길 권했고, 부모님의 권유대로 그의 딸이 그리로 내려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부녀의 공동생활이 시작됐다. 감감무소식이던 때가 차라리 나았을까. 그곳에선 불안한 소리가 자주 들려왔고 이내 그의 죽음 소식을 접했다.
부모님이 그의 딸을 그에게 보낸다고 했을 때 제주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맘을 나는 서울에서도 느꼈었다. 그때 그는 이렇다 할 직업도 없었고, 불행했던 육 년의 결혼생활 빼고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생활을 해보지 않아서인지 딸과의 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다. 딸을 책임져야 한다는 상황을 무서워했던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도망가 문을 잠그고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술만 마시다가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급성 간경화, 그의 나이 쉰 넷이었다. 교통사고로 상한 몸을 치료한 후 제주로 돌아간 지 육 개월만이고, 그의 딸과 합류한 지 이 개월 만이었다. 잘 자란 그의 딸과 합심해 건강한 삶을 살아가길 바랐던 가족들의 기원은 무리였을까.
비탈길을 내려가던 뒷모습이 키 작고 동글동글한, 지금의 내 체형과도 닮아있던 큰오빠, 그에 대한 나의 의문은 계속된다. 그의 불행이 언젠가 그가 표현했던 독한 엄마만의 탓이었을까. 그가 선이언니와 결혼했다면 끝까지 행복했을까. 결혼식 날 밤에 노래 '부모'를 다 부르고 그는 왜 울며 나갔을까. 이런저런 궁금증과 의문에 대한 답은 영원히 유보된 채 큰오빠, 그는 지금 제주 서귀포에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