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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Feb 16. 2024

글 길 따라서

   나는 구 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갓난아기 때 내가 원하던 세상은 이런 게 아니라고 악을 쓰며 밤이 새도록 울었고, 영문 몰라 달래다 지친 어머니도 나를 잡고 같이 우셨다.

   

네댓 살쯤이었을까, 나를 업은 네 살 많은 막내오빠 등에서 울었고 오빠에게서 나를 받아 업은, 나보다 두 살 위인 작은 언니 등에서도 울었다. 버글거리는 형제들의 마른 소란이 싫어서.

   바스락, 나무를 스치며 지나는 겨울바람 냄새에도 나는 울었다.      


예닐곱 살쯤 부모님은 막내인 여동생을 데리고 다른 고장으로 장기간 장사를 나가 계시고 큰언니는 시집갔고, 다른 언니 오빠들은 학교에 가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낮에 혼자 있던 기억이 많다. 마루 끝에서 옆으로 누우면 흰색으로 페인트칠 한 흙벽에 작은 물고기 모양으로 흘린 노란 페인트 자국이 늘 보였다. 그걸 바라보며 ‘내가 앞으로 나이가 많아져도 저 자국을 기억하고 있어야지’ 이유 모를 다짐을 했고, 어른이 됐을 때의 내 모습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일곱 살이 되자 한글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오빠들이 오가며 가르쳐주어 입학 전에 글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국어와 음악시간이 좋았고 글 잘 썼다고 선생님에게 칭찬받은 적이 몇 번 있다.


삼 학년 때 함박눈이 내리며 쌓이던 날, 담임선생님이 창밖을 바라보며 내 준 글제가 ‘눈’이었다. 그 자리에서 써낸 ‘눈이 왔어요. 하얀 눈이 왔어요.’로 시작한 나의 글은 선생님의 칭찬을 받으며 낭독되었다. 마지막 문장은 ‘오후에 오빠들과 눈사람을 만들다가 눈이 왜 반짝거리는지 오빠에게 물었으나 대답을 안 해줘서 토라져 집으로 왔다’였다.

   오빠들과 눈사람 만들다가 집으로 먼저 들어온 건 사실이었으나 눈이 왜 빛이 나는지 물어보고 토라져 집으로 왔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쌓인 눈 위에 해가 비쳐 반짝임에 눈이 부셨던 혼자만의 느낌을 허구로 마무리한 것이다.


오 학년쯤이었을까. 여름날 늦은 오후에 방에서 언니, 동생과 낮잠을 자다가 눈을 떴다. 부모님 없는 집안의 적요와 찐득한 소금기를 견딜 수 없어 엎드려 흐느꼈다. 오빠가 닫힌 문 밖 마루에 걸터앉아 윗마을 연상의 연인인 성자 언니와 잔잔히 나누는 이야기 소리도 먼 나라의 읊조림일 뿐 내 외로움과는 상관이 없었다. 문 밖 오빠도 성자 언니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이것은 내 깊은 저곳에서 말라있는 적막이었으므로. 세상은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시절엔 어디나 그랬듯 동네에 교과서 외엔 책 한 권 있는 집이 없었으니 독서의 기억은 없다.  

   겨울이면 밖에선 구슬치기를 했고, 방에선 주로 화투를 잡고 지냈다. 친구와 있을 땐 함께 주거니 받거니 민화투, 혼자 있을 땐 그날의 재수를 점쳐보는 오관 떼기였다.

   독서는 단 한번, 마루에 만화책이 있던 아랫마을 창신 언니 집을 하교 길에 들러 당시 인기 가수인 ‘이미자’를 패러디한 ‘오미자’ 시리즈 열 권 중 몇 권을 만화로 읽은 기억뿐이다. 그리고 책은 아니지만 전위적 사고로 두 동생을 이끌던 작은언니가 정기구독 해줘 주 일 회 받아보는 신문 ‘어린이 동아’를 읽었고, 거기에서 전국 어린이들의 소식과 동시를 접했다. 그때 읽은 동시 한 편이 내게 아직 감빛으로 남아있다. ‘감 감 말랑 감 우리 아기 볼’


육 학년 때는 음성군내 글짓기 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가 일등상을 받았고, 중학교에 들어가 국어 시간에 그 내용에 옷을 더 입히고 길이를 늘여서 제출해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그 해 가을에 서울로 전학을 왔다.


중학교 이 학년 때였던가, 로맨티시스트였던 넷째 오빠가 보던 월간문예지 ‘현대문학’이 펼쳐진 채 방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그걸 들어 무심코 책장을 넘기다가 어느 단편소설에 눈이 갔다. 젊은 남녀의 사랑이 전개되는 과정을 다룬 이야기였는데 그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기억한다. ‘그는 그녀의 브래지어 끈을 풀었다.’ 거기서 더 이상 진행시키지 않고 끝낸 서사가 세련되게 느껴졌다.  


교사들의 폭력이 난무하던 고등학교 시절 K국어선생님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군대 분위기에 익숙했던 우리들에게 마음을 건드려주는 수업 방식은 생소할 정도였다. 그는 무슨 질문이든 하라 했고 숙제는 우리들의 고민 써오기, 소설 한 편 써오기 등이었다. 가끔 단편소설도 읽어주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그가 읽어주는 강신재 소설 <젊은 느티나무>의 첫 문장을 듣는 순간 나는 그에게서 비누 향기를 맡았다.    

   그는 책 읽으란 말을 수업 때마다 했다. 내일부터 책을 꼭 읽어야지 마음먹은 다음 날 ‘카프카’의 『변신』을 열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벌레가 될 수 있는지, 책장에서 벌레가 기어 나오며 얘기하는 것 같아 징그러워 바로 덮었다.

   학년이 끝날 때까지 K선생님과 함께하진 못했다. 캐나다로 아주 떠난다는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을 받은 날, 집에 와서 이불 쓰고 울며 가을밤을 새웠다. 아침에 부은 눈으로 책가방을 챙기며 생각했다. 나도 국어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이학년 때 특별활동에 도서 반을 신청했는데 경쟁자가 많아 친구들과 가위 바위 보로 이겨서 도서 반에 들어갔다. 도서실에서 모인 첫날, 선생님은 효율적인 독서방법을 말해줬다. 이른바 묶음 독서 방식인데 한 작가로든 계절로든 묶어서 읽으라고. 그러나 학교 측에서 특활반 편성은 요식행위였는지 그날 한 번으로 끝이 났다.


고향 친구들과 편지가 오갔다. 하교 길에 친구에게 쓸 멋진 어휘가 떠오르면 귀가 버스에서 내려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뇌며 집으로 뛰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편지지를 꺼내 그 어휘를 넣어 편지를 썼다.


삼 학년 가을에 지금은 제목을 잊은 어느 수필에서 중년의 남자가 함박눈 내리는 날 걸어서 다른 남자와 결혼해 살고 있는 옛사랑 여인의 집을 방문한다. 탁자에 앉아 따끈한 차 한 잔과 함께 무슨 얘긴가를 나누고 나오며 현관에서 ‘언제 또 이 여인 앞에서 이렇게 신발 끈을 매보랴.’ 둘의 만남이 영원히 마지막임을 암시하던 뒷부분의 여운이 길었다. 대학 입학 예비고사일이 가까웠음에도 그 문장 안에 계속 머물고 싶어 그 수필과 ‘김진섭’의 『백설부』를 밤늦게까지 필사했다.


예비고사에 떨어졌다. 대학 본고사 시험 볼 자격이 안 돼 국어선생님 될 준비는 시작도 못했다.


다음 해 스무 살이던 1976년도에 친구 자취방을 방문했다. 아랫목에 앉아 펴놓은 이불 아래로 발을 밀어 넣고 친구가 보다가 놓은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을 펼쳤다. 박완서의 『도시의 흉년』이 2회째 연재 중이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도 칠십 년 대 그때이고 공간도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이었으니 학창 시절 억지로 읽으려다 매 번 머리 아파 놓아 버린 세계명작소설과는 달랐다.

   냉소적이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쾌하게 때론 통쾌하게 마구 치고 나가는 그녀의 필력은 세상에 냉소적이던 나를 마구 신나게 했다. 그때까지 글이란 솔직함을 감추고 아름다운 문장으로만 써야 되는 줄 알고 있었으므로.

   박완서, 그녀의 소설이 나에겐 명작이었다. 다음 달부터 그 문예지를 다달이 구매해 읽고, 취업해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일 년 정기구독을 했다. 그때 활동하던 한국 작가들을 그 문예지 안에서 만났다. 오정희 박시정 김원일..

   조세희의 『뫼비우스의 띠』를 읽고 났을 때 일터였던 강남의 토지 분양사무실에서 바라본 서편 노을이 처연했다.


옮겨 간 직장을 다니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책은 못마땅한 나를 버티게 해주는 자존심이었으므로. 도서 반 선생님이 일러주셨던 묶음 독서방식을 택해 ‘쎙떽쥐베리’의 작품들을 문예지와 병행해 읽었다.


출퇴근길 버스를 갈아타는 정류장 가까운 곳에 ‘종로서적’이 있었다. 퇴근하며 그곳에 들러 책을 읽었고, 일찍 퇴근하는 토요일엔 운이 좋은 날도 있었다. 위층 방에서 있던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참석하기도 했으니까. 그 시절 인기 있던 라디오 애정 드라마 작가 ‘정하연’과의 대화에서 조금은 거친 그의 입담이 매력 있어 보였다.


스물여덟 살에 결혼을 했다. 책을 잡기 어려웠다. 두 아이 입덧, 낯선 이들과 가족이 되는 과정, 출산 육아 모두 녹록지 않았으므로.

문예지를 다시 일 년 구독했으나 읽지 못했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었나 보다. 신문 광고란에서 00 식품 주최 생활수필 공모전이 눈에 띄었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결혼생활에 대한 혼란과 기저에서 스멀거리는 불만을 슬쩍 비추다 말고 행복하다고 마무리 지어 보낸 글에 입선도 장려상 소식도 받지 못했다.

   해외에 사는 동생에게 친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틈틈이 편지로 전하는 고자질이 습작의 전부였다.       


서른여덟 살에 성서 모임에 들어갔다. 첫날 진행자가 학생들 논술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더라고 하며 묵상 내용을 말로 하지 말고 글로 써보기를 권했다. 나는 쓰겠다고 맘을 먹었다.

   유년의 내가 처음 고향집 뜨락으로 불려 나갔다. 겨울날 건넌방 호롱불 아래에서 수제비 떠먹는 우리 대가족의 수저 소리를 들었고, 일찍 담배를 배운 오빠의 담배심부름으로 구멍가게를 뛰어갔다가 집으로 뛰어오던 늦은 밤의 공포를 보았다.   

   미사 중 성가를 부를 때 번득 떠오르는 문장을 주보 여백에 메모해 집으로 가져와 노트에 썼고 모임에 가서 발표했다.


쉰다섯 살에 대학에 들어갔다. 시인 ‘백석’을 처음 알게 됐고 ‘향수’ 시를 지은 정지용에 대해 더 알아가며 그의 다른 시에도 ‘향수’를 처음 대했을 때만큼 놀랐다. 『백록담』 중 장마철 한라산에서 노니는 말의 모습을 그린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익여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말의 엉덩이를 배경으로 상상하는 꽃물 수채화라니.


어느 날 아침, 강의실에 들어가 앉으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한 여자가 카메라를 들이대며 물었다. 공부를 왜 하는가를. 나는 고개를 돌려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러 색들로 물든 단풍잎들이 바람에 휘청거리며 지금은 만추의 계절임을 일러주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나의 자존감...” 내가 조금 울먹였던가. 그녀가 ‘KBS 다큐 3일’ 팀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졸업을 했다. 가까운 도서관에서 개설한 고전 독서모임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때 반쪽도 못 읽고 덮어버린 ‘카프카’의 『변신』도 다루었는데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경제적 가치가 가족의 사랑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걸 비난만 할 수 없다는 것, 벌레는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는 불쌍한 가장이며 세상의 모든 사람이기도 했다.

   이 모임에서 한 동료가 문예창작교실을 소개해줬다. 독서량이 많이 부족한데 써도 될까. 부족한 이대로 한 발 내딛기로 했다.


그곳에 나간 첫날 인사에서 준비 없이 가슴이 밀어 올린 말을 뱉었다. “어머니 몸에서 잉태되기 이전부터 찾아다닌 이곳, 저는 여기서 다 벗을 거예요.”      




   문학과 삶이 어찌 별 개랴.

   그렇게 걷기 시작한 글길 위에서 나의 결핍으로 고생 많았을 부모님과 형제들을 만났고 결혼으로 이룬 내 가족도 바라보았다. 돌아보면 회한 뿐이었다. 사악함으로 영혼에 떡칠을 하고 한 구석에서 기어 나오는 나도 만났다. 누가 나를 홀대하지나 않나 무장하고 살피며 모두 나에게 잘해주기만을 바라며 보낸 시간들. 상처는 누군가가 주기도 하지만 주지 않는 상처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가 스스로 만들어 덥석 안으며 아프다고 구르던 내가 보였다.


가끔 괜찮은 나를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행복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만의 고귀한 정체성을 밟아버리고 세상의 틀에 나를 끼워 맞추려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없는 억지 삶을 살았으니 남에게 보이기 위한 표정에만 신경 썼고, 그러느라 내가 가지고 있던 슬픔들을 들여다보기는커녕 그 슬픔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못했다.


시대에 속아 지내던 옛 시절, 그때의 잣대로 부러웠던 것들이 이 길에선 허망하였다.



어린 날 마루 끝에서 흰색 벽에 흘린 노란 페인트 자국을 바라보며 미래의 자신을 궁금해하던 나에게 말한다.

나는 지금 글 길을 찾아 걷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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