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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초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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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명 Apr 07. 2024

구렁이

초단편01



채호는 청색 시트에 앉아 줄곧 꾸벅거렸다. 고개가 차량을 따라 슬쩍씩 흔들리곤 했다.

<내리실 문은 …입니다.> 지하철 안내음이 채호 귀에 얼핏얼핏 스치고 있었다.

채호는 고개를 푹 숙여 덜 깬 눈을 찬찬히 끔뻑였다. 청바지, 검은 폴리에스터 정장 바지, 형형색색 등산 바지, 주름 스커트… 바닥은 안 보이고 다리 여럿이 겹쳐 동공이 꽉 막혔다. 인파로 보아하니 신도림역도 채 못 지난 듯했다.

<… 내리실 때 주의하여 주십시오.>

뒤창으로 들이치는 햇살이 어지간히 환했다. 채호는 물론이고 승객들 등줄기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매달리는 게 이른 봄 치고는 무더운 기운이었다. 채호는 찌뿌둥한 목을 괜스레 두어 번 까닥여 봤다. 찌뿌둥은 그대로고 애먼 졸음만 싸악 가셔 뒷맛이 찝찝한 참이었다. 우웅. 느닷없는 진동. 바지 주머니였다.

<뭔데 벌써 19도냐?>

<그니까 ㅋㅋ 날씨 미친듯>

메신저에 시답잖은 날씨 이야기가 오갔다. 채호는 핸드폰 대기화면에 뜨는 메시지를 감흥 없이 바라보다 방금 꾼 꿈을 되새겨봤다.


구렁이 두 마리, 윗통은 나무 껍데기가 박힌 듯 회갈색 비늘로 덮여 있고 아랫배엔 연한 개나리 노란색이 물든 구렁이 쌍이었다. 그중 작은 것이 큰 것 뒤를 쫓더니 꼬리를 덥석 물고는 별안간 눈물을 떨구는 것이었다. 와중에 큰 것은 별 미동도 없이 꼼짝 않았다. 작은 것이 이빨을 금방 거두긴 했지만 큰 것 꼬리에 이빨자국은 큼직하니 잘 보였다. 작은 것 눈에서는 여전히 한 방울씩 눈물이 샘솟는 모양이었다. 사냥하는 꼴은 영 아니었다.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되는 꿈이었다. 작은 것은 왜 제가 꼬리를 물고는 눈물을 보였을까? 혹시 악어의 눈물처럼 뱀들의 세계에도 어떤 눈물의 법칙이 작동하는 걸까? 물린 놈보다 문 놈이 더 서럽다는 악어의 눈물은 퍽 신비롭다. 물론 눈물이라면 슬픔이라든지 기쁨이라든지 그 수분 속에 어떤 감정이 똬리를 틀고 있으리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해석 덕에 그 신비성이 유지될 뿐이지만... 생물학이 악어 턱근육의 상호작용과 눈물샘의 압박 관계를 입증한 순간 그 신비성은 증발하고, 악어의 눈물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냥 H2O가 돼버린다. 그렇다면 그 작은 구렁이의 눈물이라고 별 게 아닐는지도. 몸집은 좀 작더래도 유독 턱근육이 발달했을 줄 누가 알겠는가?

뱀과 눈물에 대한 채호의 해석이 여기까지 다다랐을 때 열차는 막 신도림역에 정차하고 있었다.

<이번 역은 신도림, 신도림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취이이이익. 개폐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썰물처럼 쑥 빠져나갔다. 채호는 하품을 길게 한 번 뿜고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눈앞을 메우던 바지와 치마들이 일순 봄 햇살에 녹아내린 것만 같았다. 지하철 푸른 고무바닥이 연노란 햇살로 알록달록해지고 있었다. 커피 대신 퀴퀴한 골방 냄새가 나긴 했지만 지하철은 한산한 카페 분위기까지 풍겼다. 채호는 햇살에 비쳐 바닥에 그려지는 자기 그림자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검푸른 그림자가 차량에 발맞춰 선선히 흔들렸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잠시만 시간 좀 내주십시오.> 바닥에서 바위 같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들려온 육성에 채호는 퍼뜩 눈을 돌렸다. 자기 그림자 왼쪽으로 웬 흑갈색 덩어리가 땅에 바싹 붙어 소리치고 있었다. 또 시작이구만. 채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소리치는 덩어리를 흘겼다. 척 봐도 50 중후반은 돼 보이는 앉은뱅이 남자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앉은뱅이 최 씨였다.

<보시다시피 저는 다리병신입니다. 나고서부터 걸음이란 걸 못 해봤습니다.>

채호는 여기까지만 듣고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할 수 있었다. 뒤따라 가족 이야기가 나오고, 자기 한탄을 하며 본격적인 구걸이 시작되고, 이 불행을 지하철 바닥에 새겨 놓겠다는 듯 양껏 바닥을 기겠지. 그렇게 동냥을 마치고 나면 다음 역의 하차 신호에 발맞춰 벼락같이 뛰쳐나갈 것이 뻔했다.

옛 이스라엘 앉은뱅이는 “네 자리를 들고 걸으라.” 하는 예수의 말씀으로 고침 받았지만, 지금 채호 앞에 펼쳐진 이 현대적 앉은뱅이는 “내리실 문은 왼쪽, 왼쪽입니다.” 하는 지하철 안내음 따위에 고침 받을 예정이었다. 그럴 때마다 채호는 진정한 현대 의학이란 이런 게 아닐까, 진정한 희곡, 진정한 극장은 지하철 바닥에서 탄생하는 게 아닐까 하는 냉소에 빠지곤 했다.


<제겐 딸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이제 막 서른에 접어든 딸입니다. 딸아이야 저보다는 낫지요. 좀 절뚝이긴 해도 5분은 족히 걸으니까요. 제 다리를 그대로 대물리지 않은 게 천운이지만요, 그래도 정상적인 생활이라곤 아주 없습니다. 딸아이 다리를 보고는 뭐가 두려웠는지 아내는 그대로 도망갔지요. 아예 땅으로만 기는 저랑도 잘 살았으면서요. 20년도 훌쩍 지난 이야깁니다.> 최 씨의 대사가 거침없이 뻗어나갔다.

스토리 70점, 능숙함 65점, 발성 80점... 채호는 평균 70점 정도는 되는 단막극이라고 생각했다. 70점이면 승객 한두 명쯤은 마음이 동해 제 지갑에 현금이 얼마 있는가 확인해 볼 만한 점수였다. 물론 연극을 처음 보는 순진한 관객들에 한해서겠지만. 채호도 순진한 때가 있었다. 지갑에서 오천 원을 뽑아다 저 바닥에 들러붙은 손에 건네주기도 했었다. 그 시절 채호의 연민은 말 그대로 파도였다. 밤낮으로 넘실거리며 누구에게나 가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채호가 자선한 모든 지하철 앉은뱅이들은 다음 역에 도착하는 대로 뛰쳐나가기 바빴다. 그들의 내달리기, 그 민첩함은 만국 육상선수들의 귀감이 되어도 손색 없으리라. 세상 일에 씻길 대로 씻긴 채호의 연민은 이제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말하자면 이런 산뜻한 연극으로는 작은 파랑 하나 일지 않을 공고한 호수의 연민이 된 셈이다.


<그만하쇼. 댁네 딸아이한테 부끄럽지도 않어?>

오른쪽 관객석으로부터 괄괄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하철 연극은 무려 관객 참여가 자유롭다는 즉흥적 묘미까지 지니고 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최 씨는 그렇게 말이 얼어버렸다.

최 씨는 코를 땅에 붙일 듯한 기세로 고개를 곧게 숙이고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뒤통수만으로도 최 씨가 느끼는 당혹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뒤통수는 가끔씩 어떤 표정보다도 더 진솔하므로 채호가 최 씨의 뒤통수에서 느낀 이 당혹만큼은 연기가 아니었다. 열차는 완전히 속력을 내고 있었다. 다음 역이 금방이었다. 이대로 다음 역에 도착하면 이 70점 단막극은 곧바로 막을 내릴 것이다. 이제 저 앉은뱅이에게 가망은 없다. 침묵으로 보아하니 대본도 다 떨어졌고, 그렇다고 애드리브에 능한 배우도 아니기에 커튼콜도 뭣도 없을 것이다. 채호는 최 씨의 흙먼지 쌓인 뒤통수를 바라보며 단막극 엔딩씬을 구상하고 있었다.

별안간 옆 차량으로 이어진 문이 열리더니 회색 수트를 차려입은 여자가 튀어나왔다. 지하철 연극의 즉흥적 묘미가 다시금 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최 씨가 엎드린 위치와 수트 여자의 다급함이 가로세로 낱말퍼즐처럼 절묘하게 꿰맞춰졌다. 여자가 튀어나론 차량 문 바로 앞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 그게 바로 최씨였다. 두 다리가 문 쪽을 향하도록 엎드린 채였다. 일순 여자의 다급한 구두가 최 씨의 장딴지를 밟았고, 여자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넘어졌고, 잠시 정적이었다.

<어머… 어머… 아… 죄송해요. 이걸 어쩌면… 괜찮으세요? 어떡해…>

여자의 목소리는 당혹감과 부끄러움, 미안함이 고루 섞여 있었다. 서른이 조금 넘어 보이는 호리호리한 여자였다. 여자는 누워 꼼짝 않는 최 씨를 살피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나 이 앉은뱅이는 별 미동도 없이 되려 조금은 인자한 미소까지 띠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안 쓰러지고 지나갔으면 밟은 줄도 몰랐겠어요. 어차피 쓰임도 모르고 달려 있는 다리라 괜찮아요.>

<아… 그래도…>

<정말 괜찮다니까요. 저보다야 그쪽 다리가 더 걱정이에요. 앞으론 지하철 바닥도 좀 조심해요. 나 같은 장애물도 더러 있으니까.>

최 씨의 목소리가 퍽 다정했다. 추레한 몰골에 맞지 않게 보살피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회색 수트 여자는 급하게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만 원 두 장과 천 원 몇 장을 뽑아 최 씨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고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건너 칸으로 걸어갔다. 여자는 쓰러지면서 발목이라도 다쳤는지 걷는 모양새가 부산스레 불편해 보였다. 채호는 절뚝이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특히 구두에 눈이 갔다. 굽 꽤나 높은 검은색 가죽 로퍼였다. 저 정도 굽이라면 누구든 간에 밟히는 대로 곡소리다. 그런데 저 앉은뱅이는 장딴지를 밟히고도 찍소리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앉은뱅이는 연극이 아니었나? 70점짜리 단막극 아니었나? 이건 100점짜리, 아니 점수를 매기려야 매길 수 없는 그냥 현실이었나? 채호는 자기 가슴에 고요하던 연민의 고동 소리를 들었다. 심장이 괜스레 빨리 뛰는 것 같았다. 그 안에 어떤 죄책감마저 발맞춰 뛰는 듯한 숨찬 기분. 아, 차라리 연극이었더라면. 차라리 구둣발에 밟히는 순간 으악 자지러지는, 고통에 데굴데굴 구르는, 그렇게 끝나는 단막극이었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에 점수를 매기고 있었던가? 채호의 구레나룻에 맺힌 땀이 뺨을 타고 내렸다.


그 짧은 사건 뒤로 최 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동냥을 얻을 수 있었다. 심지어 괄괄하게 ‘그만하쇼.' 하던 관중 아저씨도 오천 원권 두 장을 내밀었다.

<미안하게 됐수다. 하도 거짓부렁 놈들이 판을 치니…>

최 씨는 고맙습니다 하며 가벼운 미소로 돈을 받을 뿐이었다.

채호는 지갑을 뒤적였지만 당장에 현금이 없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온몸이 금방 땀으로 흥건해졌다. 연민인지 죄책감인지 모를 것이 채호의 핏줄을 타고 몸 구석구석에 열을 퍼트리는 듯했다. 채호는 흔들거리는 자기 그림자에 다시금 눈을 가져다 댔다.


그 뒤로 역을 두 갠가 넘었다. 그동안 최 씨는 일어나 걷기는커녕 움직일 생각도 없어 보였다. 차라리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고요한 언덕 같았다. 채호는 자기 그림자와 고요한 앉은뱅이를 번갈아 흘금거릴 뿐이었다. 최 씨는 말 그대로 궁색 맞은 거지 꼴이었으나 연극의 냄새라고는 전부 달아나서 얼굴에 핀 평안이 더없었다. 최 씨가 입은 검은 외투는 온갖 흙먼지를 뒤집어써 회갈색으로 칙칙했는데 창에서 들이치는 봄 빛이 바닥에 반사돼 계절 꽃의 노오란 빛깔만이 최 씨의 아랫배를 따라 일렁거렸다. 채호는 최 씨를 바라보며 어쩐지 아까 꿈에서 본 구렁이가 떠올랐다.

<구렁이… 꼬리에 이빨자국이 난 구렁이…>

곧 지하철 안내음이 들려왔다.

<이번 역은 대방, 대방역입니다.>

그 순간 웬걸, 좀 전에 여자가 건너간 차량 문이 슬그머니 열리더니 회색 수트 여자가 최 씨에게로 다가왔다. 걸음걸이로 보아하니 아직도 다리를 저는 듯했다. 아까보다도 더 심하게 저는 것 같았다. 여자는 절룩이는 발길로 곧장 최 씨 옆으로 가 가만히 몸을 숙이는 것이었다. 여자의 눈두덩 주변이 붉게 덥혀져 있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 오른쪽입니다. 이 역은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으니, 내리실 때 발 빠짐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여자는 몸통을 숙여 최 씨의 양팔을 자기 양어깨에 걸치고는 등으로 최 씨의 몸통을 들쳐 올렸다. 최 씨를 등딱지처럼 걸친 여자는 최 씨의 실루엣 밖으로 몸집이 하나도 삐져나오지 않을 만큼 왜소했다. 그러나 동작의 능숙함이 도통 한두 번 해 본 솜씨로는 안 보였다. 여자가 최 씨를 업고 내리는 과정은 말 그대로 비틀거림이었지만 그 비틀거림 속에는 또 능숙함이 동반되어 있었다. 하루 이틀짜리 연약함이 아니었다. 최 씨는 출입문이 열리는 길로 더듬더듬 그렇게 업혀 나갔다. 업혀 가는 최 씨의 바지 장딴지에 찍힌 여자의 구두 발자국이 큼직하니 눈에 잘 띄었다.

스크린도어 너머 플랫폼에 도착하자 여자는 현기증처럼 주저앉았다. 그 주저앉는 모습까지도 솜씨 있었다. 여자는 참 적당한 속도로 무너졌다. 등딱지가 된 최 씨가 일체 걱정되지 않을 만큼이나 부드럽게 스러졌다. 주저앉은 여자와 앉은뱅이 최 씨는 이제 한쪽이 업혔다기보다 그대로 서로가 서로의 포옹이었다.

<… 출입문 닫습니다. 출입문 닫습니다. 안전하게 물러서시기 바랍니다.>

채호는 그 둘의 포옹이 멀리 하나의 점이 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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