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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May 23. 2023

그가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밤 열 시 반, 그가 집에 들어선다. 여자가 소파에서 일어나 인사한다. 소파에 담요가 흐트러져 있고 탁자 위엔 구겨진 휴지와 빈 컵, 과자 봉지가 늘어져있다. 그는 여자에게 시선을 돌리며 인사한다. 고양이가 꼬리를 감으며 바지에 털을 묻힌다. 엉덩이를 토닥이자 가르랑 거리며 엉덩이를 치켜든다.


오늘은 무얼 했냐고 묻지 않는다. 여자는 우물쭈물하다 몸을 꼬며 웃을 것이다. 피곤해서 집에 있었으며, 기력이 없어 밥을 건너뛰었고, 휴대폰 게임을 했다고 부끄러운 듯 말하다가 '그럴 수도 있지!' 나 아팠단 말이야!'하고 외칠 것이다. 여자의 하루를  묻는 일이 언제부터 금기가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뭘 좀 먹었냐고 묻는다. 여자가 자랑스레 쿠키를 구워 먹었다고 한다. 가만히 누워있었다는 소리보단 낫다. 굶었다는 소리보다도 훨씬 낫다. 밀가루가 얼마 없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친다. 아몬드가루와 커버춰초콜릿도 새로 주문해야 하는지, 가격이 얼마나 될지, 생활비가 얼마나 남았는지 두드려보다 그만둔다.  


그는 모든 일을 계산하는데 이골이 난다. 숫자를 따지고 분배하고 전전긍긍하는데 싫증이 난다. 계획을 세우고, 여자의 상태에 따라 계획을 바꾸고, 급작스런 여자의 요청으로 계획이 틀어지는 게 지겹다. 퇴근길에 세탁기를 돌릴지 청소를 할지 고르는 것도 그만두고 싶다.


그는 눕고 싶다. 고양이를 껴안고 눕고 싶다. 씻지도 않고 자고 싶다. 일단 한두 시간쯤 잔 다음 생각하고 싶다. 매일 15시간씩 일하는데 진력이 난다. 그러나 빨래를 돌려야 한다. 내일  입을 옷이 필요하다.

 

세탁기로 가며 싱크대를 힐끗 본다. 개수대에 스파츌라, 믹싱볼, 접시와 머그잔이 켜켜이 포개져있다. 개수대 바닥에 카라향 껍질과 토마토 꼭지가 붙어있다. 새 잔을 찬장에서 꺼낸다. 손을 씻으러 가며 안방을 슬쩍 본다. 이불이 아침에 나온 모양 그대로 세워져 있다. 고양이 물그릇이 말라있다. 그는 가만히 안방 문을 닫는다.


그는 묻고 싶다. 병원은 다녀왔는지, 상담은 어떻게 돼 가는지, 혹시 일은 언제부터 할 계획인지 묻고 싶다. 그가 언제까지 이렇게 일해야 할지 묻고 싶다. 논문을 쓸 작정은 있는지, 계획이 있긴 한지 묻고 싶다. 집에 있으면서 로봇청소기 전원 정도는 누를 수 있지 않은지 묻고 싶다. 최소한 설거지는 매일 하면 안 되는지 묻고 싶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하루에 대해 말을 꺼낸다. 퇴근길에 마주친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고 상사를 흉내 낸다. 여자가 맞장구치며 웃는다. 오늘 여자는 배부른 고양이처럼 만족스럽다. 여자가 이만큼 기력이 있는 날은 드물다. 회복중인지도 모른다. 그는 생각한다, 운이 좋은 밤이다.  



눈을 뜬다. 그는 거칠거칠한 얼굴을 매만지며 침대에 걸터앉는다. 또 하루가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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