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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돌향 Feb 23. 2024

학생들의 소리가 물소리, 새소리처럼 들릴 때

연암 소설에 가탁해 교직 생활에 대해 말하다. 

김쌤전(金쌤傳)


  서울 성북동의 한 언덕산에 가르치는 일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교사가 하나 살았으니 학생들은 그를 일러 김쌤이라 불렀다. 그는 나이 마흔에 손수 집필한 문제집이 만 권이었고, 또 교과서의 뜻을 정밀히 부연하여 저술한 참고서가 일만오천 권이었다. 대통령이 그의 행의(行義)를 가상히 여기고 교육부 장관이 그 이름을 기리고 있었다.   

  김쌤은 나의 오랜 지기(知己)다. 함께 교단에 서 있는 교육자 동지로서 그의 성장과 변모를 곁에서 지켜봐 온 나는 누구보다 그를 잘 알고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라 자부할 수 있다. 처음 교단에 섰을 때 그는 가르침의 열의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똘똘 뭉친, 차라리 성직자라 할 만했다. 그때 그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은, 

  “세상에서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소리가 딱 두 가지 있다네. 첫째는 강학 시간에 아이들 대답하는 소리, 둘째는 아이들 입에 밥 들어가는 소리지.”

였다. 

  하지만 교직에 들어선 지 10여 년이 지난 후 학교에서 그는 늘 지치고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기 일쑤였다. 아이들이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거나,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면 싸움터에서 부상을 당한 아폴리네르*처럼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퇴근길에 오르곤 했다. 이때 그가 종종 내뱉던 말은,

  “아이들과 나 사이에는 견고한 유리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아. 우리는 서로에 대해 투명하게 잘 알고 있지만 투명한 것만으론 부족하지.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나는 유리벽 이쪽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올 재간이 없어.”

였다.

  올해는 그의 교직 생활 15년째 되는 해다. 몇해 전부터 그는 여전히 유능하지만 인간적으론 몹시 건조한 교직 생활을 해 오고 있었다. 그의 강의는 간결하고 일목요연했으며, 진학지도는 합격률이 높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가 아이들과 여러 시간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고 지친 아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늘 다른 세상을 꿈꾸는 듯했고 눈에는 초점도 생기도 전혀 없었다. 한때 지극히 헌신적이고 알뜰자상했던 그가 이처럼 메마르게 된 결정적 원인이, 나는 15년 동안 한 해도 쉬지 않고 이어진 그의 담임 생활에 있다고 믿고 있다. 작년부터 그는 습관처럼 이런 말을 했다.

  “아이들도 선량하고, 교사인 우리들도 선량해. 우리는 문제가 없지. 하지만 우리들이 갇혀 있는 이 유리상자 안에서 아이들과 교사들은 서로 다투고 상처 입히게 마련이야. 피할 수 없는 것 같아. 선량한 이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너무 슬퍼. 이보게 친구, 이 유리상자를 깨뜨려 버려야 할 텐데, 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네.”


  실종되기 하루 전날,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더랬다. 

  “친구, 어제 내가 꿈을 꾸었네. 참 아름다운 꿈이었는데 잠에서 깨니 베개가 흥건히 젖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더구만.”

  그의 말은 묘하게 불길한 느낌을 주었지만 다음에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야지 생각하고 더 이상 길게 말을 이어 가진 않았다. 그 다음날이었다. 그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종적을 감춘 것은.

  그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나는 그의 집에 방문해 단서가 될 만한 물건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찾아낸 것이 초록빛의 낡은 다이어리였다. 그 안에는 전날, 그가 말했던 꿈 이야기가 소상히 적혀 있었다. 교사로서 그가 간절히 소망했던 학교의 모습이 무엇인지,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내용이라, 해당 일기의 전문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 본다. 


꿈속에 나는 한때 교사로 지냈던 그 학교를 찾아갔다.

학교의 풍경은 많이 변해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얼마 만에 찾아온 곳인지...

교정 곳곳에선 선생님과 그를 둘러싼 아이들이 잔잔히 무언가를 함께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느티나무 푸른 가지가 그늘을 드리우고, 향그럽고 삽상한 바람이 아이들의 머리칼을 부드러이 쓰다듬고 있었다.  

선생님과 아이들의 목소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깃을 친 새들의 지저귐보다는 높지 않았으나 그들은 서로의 말소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수업이리라. 

학교 수업이 이렇게 다정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그릴 수 있다니, 내가 학교에 있을 때엔 경험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답고, 또 한때 교사였던 내 마음에 문득 부러운 마음이 일어 눈물이 왈칵 솟으려 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교무실 안에 선생님은 그때처럼 지금도 몹시들 분주하시다. 

빙긋이 웃음이 나온다. 

복도를 천천히 거닌다. 

교실 어디에나 차분한 열의가 창문 밖으로 전해져 온다. 

아이들은 조근조근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이야기의 어떤 순간엔 작은 파문처럼 기분 좋은 웃음이 교실 전체에 망울망울 번져간다.

복도를 거닐면서 내가 알던 선생님 몇 분과 마주치기도 하고 낯선 선생님, 처음 보는 학생들과도 마주쳤지만 그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제 이곳은 내가 잊혀진 공간이라는 사실이 실감되면서 마음이 먹먹해졌다.  

한참이 지나 학교에 다시 돌아와 보니,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었는지

이곳에서 지내던 시간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시기였는지 깨닫게 된다.

그때 아이들에게 충분히 마음을 기울이지 못했던 내 자신은 또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그의 일기를 다 읽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어야만 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드니 책꽂이에 장회익 교수의 "공부 도둑"이란 책이 눈에 들어온다. 책갈피가 꽂힌 부분을 펼쳐 보니 연필로 밑줄을 그은 곳에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물 소리새 소리가 번거롭지 않듯이 학생들의 소리 또한 즐거움의 한 요소로 들릴 때 교단은 빛난다.

  눈물 한 방울이 책장 위로 토옥- 떨어진다. 흠칫 놀란 나는 황급히 책장을 덮는다. 

  ‘불쌍한 김쌤, 불쌍한 우리 아이들... 아! 그는 쉽게 돌아오지 않겠구나...’



* 기욤 아폴리네르(1880 ~ 1918): 프랑스 시인이자 소설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종군하여 부상을 당했고 전쟁이 끝날 무렵 유행성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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