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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 May 16. 2023

오만과 편견

1

미디어는 자극적인 주제를 다룬다. 관심을 끌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선한 것은 재미가 없다. 어쩌면, 선한 것은 당연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자극적인 것들만 눈에 채이다 보면, 마치 세상이 점점 혼잡해지고 근간이 뒤틀려간다는 느낌을 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인간의 집단지성은 어찌 되었든 좀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수렴해 간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할 뿐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분명 세상에는 어두운 부분이 존재한다.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이면의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이 있다면 분명 악도 있다. 선도 악도 아닌 것 역시 있다. 선과 악의 흑백 논리의 문제는 그것을 이해하거나 이해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온다. 선을 이해하고 악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가 애초부터 없었음을 눈치채야 한다.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 놓치고 있다. 




2

인간은 너무나 나약해서 관계나 환경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타인이 없으면 '나'도 없어진다. '나'가 없다는 사실은 개인에게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항상 타자라는 비교급을 상정해 둔다. 비교급이 있어야 마음이 놓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바로 이 타자를 완전히 이해한다거나, 이해시키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이미 기인한다. 선과 악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것에는 선도 악도 없다. '이해'는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오만과 편견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함, 혹은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여전히 나와 남을 나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떠나보내기 위해서는 이해가 아닌 수용을 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수용한다는 인식마저 없어져야 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 혹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가 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타인의 모난 모습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아닌, 그의 행위 자체에 어떤 의미도 없었음을 수용해야 한다. 물론 이 말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당장 누군가 나의 오른뺨을 때린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분노가 차오를 수밖에 없다. 분노를 무시하라는 것은 아니다. 감정을 없애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일어난 감정을 느끼는 주체가 이미 무상함을 눈치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눈치채고 나면,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온전함을 경험하게 된다. 오른뺨을 맞은 후, 왼뺨을 내놓아도 상관이 없어진다. 이미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자신과 타인을 이해할 필요조차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분노, 욕망, 어리석음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난 뒤에도, 그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을 명백히 깨닫게 된다.


나는 사실 글이라는 그럴싸한 도구로 독자를 현혹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눈치챘다면, 이 글마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바라는 일이다. 앞서 말했듯, 나의 글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수용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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