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버려 그따위 것."
우리의 시간은 이상하게 흘렀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만난 사람처럼,
우리는 현재에 있으면서도 과거를 말했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만날 수 없었던 두 평행선이
우연히 엉켜 아주 잠시 교차했던 순간.
우리는 그 짧은 교차를, 평생 붙잡았다.
그 짧은 교차가 우리에겐 축복이었고,
동시에 저주이기도 했다.
만남에도, 헤어짐에도 타이밍이라는 게 있듯이.
우린 그 타이밍을 조금 어긋난 채로
붙잡아버렸는지도 모른다.
사각, 사각.
그가 좋아하던 건 연필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였다.
“이 소리, 좋다.”
그 말이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런 말 없이
창밖의 빛이 천천히 바뀌는 동안
서로의 세계를 건드리지 않고, 그러나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같은 방 안에서 각자의 우주를 항해하는 기분이었다.
현실 속 우리의 날들은,
프로젝터에서 튀어나온 8미리 흑백 영화처럼
서툴고 빠르게 흘러갔다.
아주 진하게, 아주 가끔씩만,
녹아내린 VHS 프레임처럼
형형색색의 조각으로 남았다.
나의 모든 걸 알았던 그와의 시간은 그랬다.
함께 걷지도 않았던 아파트 공터 앞에서
우리만 따르던 고양이가
이제는 다른 길을 걷고 있으리라 상상했고,
네 평 남짓한 방에 갇혀
지나가는 기차 소리와 달빛에 춤추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완벽해… 지금 이대로라면 심장이 멎어도 괜찮다’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밤과 아침이 뒤섞인 시차 속에서,
서로 함께 하지 못했던 과거의 순간들을
마치 여행하듯 주고받았다.
그때 화장실에서 바지 내리고 앉아 있던
빨간 잠바의 여섯 살 아이 얘기에
둘 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우린 제 시간에 오지 않은 계절을,
그럼에도 서로의 팔 안에 붙잡아 두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 뒷면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암이라는 벌레가 숨어 있었다.
처음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가끔 힘이 빠진 듯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모습이 전부였다.
하지만 벌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의 몸 안을 갉아먹고 있었다.
얼굴의 반이 마비되어
웃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모른 척하려 애썼다.
“오페라의 유령 같네.”
가볍게 농담을 던졌지만,
그 농담이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한 말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점점 말수가 줄었고,
음악을 만들던 손이 쉬어 가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여전히 글을 썼지만,
언제부턴가 사각 사각 소리 뒤엔
그의 숨 고르는 소리만 들렸다.
결국 그는, 지고 말았다.
그 벌레에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마지막까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순간마저 사랑이라고 믿고 싶어서.
그러다 어느 날,
"미안, 이젠 다 타버렸나 봐."
그 사람이 재가 되어 떠나던 날,
나는 영원히 깨고 싶지 않던 꿈에서
억지로 밀려나듯 깨어났다.
아무도 모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과 가장 무너진 모습을 동시에 알고 있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우리만의 비밀을 가슴에 품은 채,
기억의 플러그를 뽑았다.
아무도 모르는 방 안의 공기.
서로 말없이 앉아
나는 글을, 너는 음악을 만들던 시간.
연필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와,
기타 줄이 떨리는 진동이
한 방 안에서 서로를 안아주던 순간.
그 손끝의 온기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평행선이 잠시 교차한 기적처럼,
제 시간에 오지 않은 계절을
그럼에도 서로의 팔 안에 붙잡아 두었던
축복이자 저주.
우린 그 모든 걸
서랍 안 깊숙이 넣어 잠갔다.
세상에 꺼내는 순간,
빛이 닿아 금이 가버릴 것 같아서.
여전히 그 비밀은, 마치 작은 직박구리 한 마리처럼
가슴뼈 안쪽을 두드리며 날갯짓을 한다.
나는 그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
라일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비밀은, 가시 같아.
아무리 뽑아도 사라지지 않아.
오히려 영글고, 썩어 문드러지고,
더 깊은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가지.
그런 기억… 잊어버린 게 다행이야.
지워버려. 그따위 건.”
오히려 나보다 더 화난 듯,
성난 가시를 다시 들이대며
라일이 씩씩댄다.
이미 죽어 사라졌는걸 뭐.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건.
그런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