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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창인 Aug 20. 2024

영화 보기와 비평하기: 영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2024년도 상반기 총결산에 앞서서

Background Music: César Franck - Sonata for Violin & Piano in A Major, FWV 8.

(Violin: David Oistrach, Piano: Svjatoslav Richter)




총 61편의 영화를 보았다.

신년에 이르러 올해는 가능한 한 모든 시네마 영화를 보리라 다짐했고, 지금까지는 그 결심을 나름 성공적으로 지켜나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상업 영화를 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구태여 예술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메가박스에서 24편, CGV에서 10편, 이외 독립 영화관에서 17편.

주로 메가박스 코엑스, CGV 용산 아이파크몰, 이수 아트나인에서 영화를 본다.

특히 코엑스점은 대형 극장 프랜차이즈 치고는 상당히 다양한 독립영화(혹은 예술영화)를 자주 걸어준다. 이전에 공전의 히트를 쳤던 걸작들을 스크린 위에 소환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애오라지 기억의 좁은 한 켠 뿐에 남은 시절의 격동과 감동을 다시금 현실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영화인(映画人)이라는 둥 시네필(Cinephile)이라는 둥 여러 웅대한 칭호들이 내게는 부끄럽지만, 여하튼 영화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는 진정 감사한 일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낡고 빛바랜 필름 위에 다시 새로운 색을 덧입혀 나가는 것, 그것이 영화 예술이 영원히 기억되고 불후한 생명력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금년 6월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재개봉했던 기타노 다케시, "기쿠지로의 여름(菊次郎の夏, 1999)"



미술이 설치를 만나며 평면의 구속을 탈피하고 현대에는 공간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듯, 영화 예술 또한 공간이 주는 힘을 경시할 수 없으리라. 극장의 불이 모두 꺼지고 시선에는 황홀한 비존재(非存在)의 풍광만이 가득하다. 그곳에는 기뻐하고 슬퍼하며 사유하는 영혼과 영혼의 의지와 관계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흘러가는 먼발치의 세계만이 실존(実存)한다. 안락의자 위 사람의 껍데기는 모든 괴로움을 잊은 듯 스스로를 수유(須臾)에 소멸시킨다.

꿈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만이 홀로 우두커니 앉아 불이 켜진 극장을 배회하고 있다. 마지막 영화가 끝나고 거리에 나아가면 여남은 차들과 사람들 몇몇이 새벽을 재촉하듯 제각기의 속도로 움직인다. 성긴 발걸음의 물결 속에서 야음이 짙게 드리운 지하의 역사(駅舎)와 차갑게 식은 전동차의 자취를 따라간다. 어스름한 그믐의 달빛을 가로등 삼아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수히 답보하였다. 여행의 모든 설렘이 공항에 모이듯, 극장에 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모든 걸음걸음이 내겐 영화요 예술이다.

각종 OTT와 스트리밍 사이트가 범람하는 21세기, 극장의 가치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있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시네마 천국(Cinema Paradaiso, 1988)" 中 / MUBI 제공




영화를 종합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는 시답잖을 정도로 고루한 표현으로까지 들린다. 분명 영화는 예술이 가용한 모든 수단 - 문학, 미술, 음악 등 - 을 동원한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미술이 공간의 예술이고, 음악이 시간의 예술이었다면, 영화는 시공간을 지배하는 예술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와 이미지, 사운드라는 상이한 성질의 질료들이 영화라는 매체 속에서 한 데 어우러져 형이상학적인 관계를 맺기도 하고 이로 말미암아 현실 세계의 무언가를 표상하거나 비판하기도 한다. 19세기 이전 수백 년간 각자의 영역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해 온 이들이 영화의 맥락 안에서 하나의 모습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질료이기 전에 하나의 기호로써 이해되고 기호적 맥락에서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비평의 역할은 첫째, 영화 매체 내부에서 다양한 형상으로 추상화되어 부유하는 기호(보다 정확히는 기표, signifiant*)들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규명할 것, 둘째, 영화에서 구체화되어 드러나는 메시지나 제재, 배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앞서 정립된 관계와 의미작용(signification) 시킬 것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를 인용하면, 이것은 영화의 기호들이 어떤 '기호체제'에 속하는지 결정한 후 그 체제가 다른 체제 안으로 번역(Translation)될 수 있는지 여부를 살펴 새로운 언표(言表)를 생산하는 과정이다. [1][6] 기호들의 관계는 플롯이나 극작법, 미술 이론, 영화 음악 이론, 촬영 기법 등을 통하여 분석되고 간략화될 수 있다.


*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근대 구조주의 철학의 시초로 평가되는 사람으로, 그는 언어를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로 분리해냄으로써 언어를 설명하였다. "나무", "Tree", "木", "Arbre"라는 텍스트는 모두 기표이다. 기의는 이 텍스트들이 의미하는 "나무"라는 개념 자체이다. 이때 "나무"와 "Tree"가 같은 개념을 지시하는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으나 그것이 이해되는 체계 속에서는 필연화된다. 소쉬르 등의 구조주의부터 들뢰즈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에 이르기까지 각 사조나 철학자에 따라 용어를 둘러싼 논의들이 다르므로, 여기서는 우선 기표와 기의 그리고 의미작용의 뜻을 소쉬르적으로 둔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말하는 비평의 기준이 구조주의적 맥락 전체에 동의하기 때문에 위와 같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님을 밝히며, 필자는 작품에 따라 상기한 이론들을 포함한 철학・미학적 사조들이 적절히 선택되어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의미작용 시키는 데서 발생한다. 우리는 예술 작품, 특히 다소 난해한 영화나 현대 미술에 대한 누군가의 비평과 해석에 대해 "(작가 이름): 아, 그런 뜻이었구나!"와 같이 조롱 섞인 코멘트가 달리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혹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에서 으레 현대 예술 작품이 기술보다 의미론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을 비판하며 하얀 스크린을 내세우고 "이 작품은 인간의 고독과 허무함을 상징한다"라고 비꼬는 경우도 많다. 현대 예술의 발전과 미학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오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비평에 있어서 맥락이 배제되며 기호의 분석이 선행되지 않은 해석의 위험성을 고발하기도 한다.


동일한 기표라 할지라도 그것이 의미하고 상징하는 대상은 작품에 따라 무수히 많은 모습으로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구체화된 메시지나 해석에 경도되면 기표와 기의의 역할이 전복되어 기의에 대한 개인의 정형화된 인식을 바탕으로 기표의 관계를 억지로 끼워 맞추는 오류를 범하게 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일반적으로 "붉은색"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붉은색이라는 색채 이미지는 어떤 느낌인가? 대개는 "따스함", "뜨거움", "열정" 따위의 감각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면 코카콜라라는 브랜드에 사용된 붉은색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여기서 붉은색은 "따스함"을 표상하기보다는 차라리 "시원하다"는 느낌을 준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하나 상술한 바와 같이 "붉은색 = 뜨거움"이라는 일반적인 의미작용에 치우쳐 기호를 해석하면 "코카콜라는 뜨거운 음료"라는 괴리된 해석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비평뿐 아니라 작품 자체에서도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성에 이격(離隔)이 크거나 모순이 발생하는 경우도 많다. 이 관계의 논리적 부정합성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 또한 비평의 역할이다.

andrebanyai / Shutterstock.com


한편 들뢰즈와 가타리를 다시 보면 언표를 생산함에 앞서 그 체제가 다른 체제 안으로 번역(Translation)될 수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1][6] 이것을 영화에 적용하면 영화 내에서 떠돌고 관계 맺는 기호들의 관계가 실제 세계의 현상을 설명하거나 통찰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 될 것이다. 관객들은 시나리오나 미술, 배경, 캐릭터 등 다양한 형이하학적 요소들을 바탕으로 형이상학의 세계에 존재하는 기호들의 관계를 끌어와 설명하고자 하며, 대부분의 경우 관객들 사이의 기표와 기호에의 의미작용 결과가 적당한 범위 내로 수렴한다.


그러나, 특히 예술 영화라고 불리는 영화들의 경우, 작품이 제시하는 시뮬라크르*의 장막에서 부유하는 기호들만이 존재할 뿐 그것의 원본이 되는 현실 세계를 명확히 추적할 수 없거나 애초에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즉, 영화를 포함한 예술에서 행해지는 시뮬라시옹**이 어떤 작품에서는 거대한 알레고리***로서 주제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본과 관계하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에 따르면 시뮬라크르는 원본과의 연관성에서 벗어나거나 심지어는 압도하기도 하는 주체로서 기능하기도 하므로 [7], 이 경우 원본을 맹목적으로 추적하려는 태도는 그 의미를 퇴색한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비평에서 구태여 "작가가 진짜 의도한 바를 찾기"가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며, 어떤 작품에서는 이 행위가 오히려 비평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영화 감상은 의도 찾기나 추리 게임이 아니다.

* 시뮬라크르(Simulacre): 본래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이데아(Idea)의 복제인 현실의 복제품을 지칭하는 용어로써, 이데아에 비해 열등하며 복제가 거듭될수록 원본으로부터 멀어지는 성질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들뢰즈 등을 중심으로 시뮬라크르는 현대프랑스철학에 의해 원본과 반드시 같아지려 하기를 거부하고 정체성과 역동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 시뮬라시옹(Simulation) = 시뮬라크르 하기.
*** 알레고리(Allegory) = 어떤 한 주제 A를 말하기 위하여 다른 주제 B를 사용하여 그 유사성을 적절히 암시하면서 주제를 나타내는 수사법. 은유법과 유사한 표현 기교라고 할 수 있는데 은유법이 하나의 단어나 하나의 문장과 같은 작은 단위에서 구사되는 표현 기교인 반면, 알레고리는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은유법으로 관철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스즈키 세이준, "아지랑이좌(陽炎座, 1981)" / Screenslate 제공


또한 영화나 미학은 통계학이 아니다. 다수가 동의한다고 해서 정답이 아니요, 다수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만 좋은 영화도 아니다. 아울러 메시지가 많은 이들에게 공감받을 필요도 없고 선명하게 드러날 필요도 없다. 각자가 해석한 상징과 주제의식이 스크린 위로 드러난 기호들의 관계에 잘 맞아떨어진다면, 어느 하나의 해석적 방법론이 반드시 옳다거나 다른 것보다 우등하다고 여길 논리적인 근거는 없으며, 각자의 지적・사회적 배경에 따라 얼마든지 많은 해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오히려 추상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순수 예술로서 기존의 미학과 영화적 공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담론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영화적으로 더 큰 의의를 가질 수도 있다. (물론 재차 강조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기호론적인 측면에서 정합한 관계성이 작품 내부에 치밀하게 직조된 경우에 성립한다. 기호를 지리멸렬하고 무차별적으로 나열함에 그치는 경우나 그 관계성을 도무지 규명할 수 없는 경우, 기호를 단순히 소비하게 함과 더불어 기호에 대한 이성적인 사유를 차단하고 마비시키는 경우 작품은 쉽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위의 주장을 확대하면 전통적인 플롯, 즉 아크플롯(Arch plot)과 그에 종속하는 미니플롯(Mini plot)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는 데까지 활용될 수 있다. 흔히 안티플롯(Anti plot)이나 논플롯(Non-plot)이라 불리는 것들이 그것이다. 아크플롯과 미니플롯이 계명으로 여기는 사실성과 핍진성, 개연성, 인과성 등은 아크 플롯에서는 사라진다. 논플롯에서는 이야기의 흐름과 진행이 거의 소멸됨에 이른다. 이 경우 우리는 시나리오에 대한 평면적인 이해를 기반으로 시도되는 영화의 의미 구성에 번번이 실패하게 된다. 따라서 영화감독이나 감상자는 심층적으로 분석되는 개별적 텍스트나 이미지, 미장센(Mise-en-Scène), 나아가서는 음악의 역할에 집중하게 된다.


영화가 문학과는 구별되는 종합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시나리오, 플롯과 텍스트, 이미지와 미장센, 소리와 음악의 요소 중 어느 하나가 반드시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학으로부터 독립된 영상 예술로서의 관점에서 보면, 총체적인 시나리오 자체보다 각각의 통사적인 텍스트나 이미지 등이 기호로써 서로 관계함으로 도출되는 의미나 미학이 다른 예술의 형태와 차별되어 영화만이 갖는 특수한 가치를 드높일 수도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가 주장하는 영상예술의 특수한 미학적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 바로 금년도에 개봉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Zone of Interest, 2023)"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야기의 진행이나 세계의 변화, 캐릭터 간의 갈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논플롯 작품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이라는 시대 배경을 두고 펼쳐지는 텍스트와 이미지, 사운드의 끝없는 호응과 대립에 압도되고 이를 바탕으로 작품이 비판하고자 하는 바를 인식하게 된다. 영화는 "설명"하는 예술이 아니라 "설득"하는 예술이다.

조나단 글레이저, "존 오브 인터레스트(Zone of Interest, 2023)" / Festival de Cannes 제공


하지만 이것이 안티플롯이나 논플롯이 아크플롯이나 미니플롯에 비해 우월함을 시사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크플롯이나 미니플롯의 경우 그 발전사를 추적하다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즉,  수천 년을 걸쳐 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만큼 그 선례가 방대하며 장르에 따라 어느 정도 극작법이 정형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영화사적 맥락에서 독창적인 방법론과 개성을 가지는 작품들이 안티 플롯이나 논플롯을 채택하고, 작가주의를 표방하는 많은 감독들이 평면적으로 이해되기 쉬운 텍스트적 설명에 의존하기보다 순간적인 이미지나 추상화된 상징을 활용하는 방식으로써 예술적 카타르시스를 추구하기에 높은 평가를 받는 경향성이 있을 뿐, 이 자체가 영화를 고평가 하게 되는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아니다.


정리하자면 어떤 기법을 차용했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지는 영화의 미추(美醜)를 평가하는 절대적인 척도가 될 수 없다. 되려 그러한 영화의 내부적 요소들이 적절한 맥락 하에서 해석되고 비평되었을 때 영화사적으로 어떠한 발전적 함의를 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바흐의 푸가(Fugue) 작품이 슈톡하우젠의 구체음악(Concerte Music)적 맥락에서 해석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각 시대의 미학적 맥락에 따라 향유되는 아름다움이 있을 뿐이다.


J. S. Bach - Prelude and Fugue XIV in F-Sharp minor (performed by Glenn Gould)
Karlheinz Stockhausen - Gesang der Jünglinge


끝으로 영화 별점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아름다음을 정량화하는 행위도 우습긴 하지만, 앞에서 설명한 비평의 기준과 영상 예술에 대한 내 미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평가를 하고자 언제나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사람인지라 취향의 영역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쉽지 않다. 아울러 나는 수 천 편의 영화를 본 전문가도 결코 아니다. 대학 생활 중 들은 강의나 읽어온 책으로부터 체득한 얕은 철학적・미학적 지식을 나름대로 사유하고 이를 영화 예술에 적용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봐주면 좋겠다!


아울러 나는 나쁜 영화를 까기(?) 보다는 좋은 영화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따라서 인상 깊게 보지 않은 영화는 애초에 평가를 잘 공유하지 않고, 왓챠피디아에만 조용히 점수를 남긴다. 혹여 내 왓챠피디아나 아래 별점의 예시에, 본인이 좋아하는 영화가 나쁘게 평가되었다고 너무 상심하시지 말길 바란다! (예시로 든 영화를 고른 기준은 다른 게 아니라 그 별점대 작품 중 내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가장 인상 깊게 본 작품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애초에 나는 영화 전문가도 뭣도 아닌, 그저 영화를 좋아하는 아웃사이더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왕가위, "화양연화(花樣年華, 2002)"


★★★★★ (10) 영화사적, 미학적 가치가 뛰어나며 창의적이고 발전적인 아이디어들이 돋보이는 작품.

(ex. 화양연화(왕가위), 살인마 잭의 집(라스 폰 트리에), 존 오브 인터레스트(조나단 글레이저))

★★★★☆ (9) 미학적 가치가 훌륭하고 다양한 측면에서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인상 깊은 작품.

(ex. 샤이닝(스탠리 큐브릭), 괴물(고레에다 히로카즈), 기생충(봉준호), 친절한 금자씨(박찬욱))

★★★★ (8) 일부 아쉬움이 있으나 괄목할 만한 미학적 가치를 지니거나, 시나리오와 미장센 등이 훌륭하게 조응하며 의미를 구성하는 작품. (ex. 초속 5센티미터(신카이 마코토), 코코(리 언크리치), 퍼펙트 데이즈(빔 벤더스))

★★★☆ (7) 영화 구성에 있어 흠잡을 데가 거의 없거나, 단점에도 불구하고 장점이 충분히 부각되는 작품.

(ex. 기쿠지로의 여름(기타노 다케시), 인터스텔라(크리스토퍼 놀런), 목소리의 형태(야마다 나오코))

★★★ (6) 상업적인 완성도가 높으며, 장르적 쾌감을 보장하는 작품. (추천 영화의 마지노선)

(ex. 비긴 어게인(존 카니), 위대한 개츠비(바즈 루어만), 악마를 보았다(김지운))

★★☆ (5) 클리셰가 지나치게 많거나 독창성은 있지만 간과할 수 없는 결함이 있는 영화.

★★ (4)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주제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낮은 영화.

★☆ (3) 영화 작법이나 촬영의 기본에서부터 문제가 있거나 심각하게 진부한 영화.

★ (2) 윤리적인 측면에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거나 장점이 일절 없는 경우.

☆ (1) 활자가 아까운 수준의 필름 쓰레기.



참고문헌


[1] 김상범,『기호와 현대철학』, 바른북스.


[2] 조주연,『현대미술 강의: 순수 미술의 탄생과 죽음』, 글항아리.


[3] 피종호,『포스트모더니즘 영화미학』, 한양대학교출판부.


[4] F. de Saussure, 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 (Paris:1916), Payot.


[5] Gilles Deleuze, Marcel Proust et les signes (Paris:1964),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6]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Mille plateaux (Paris:1980), Les Éditions de Minuit.


[7] Jean Baudrillard - Simulacres et Simulation (Paris:1981), Éditions Galilée.


[8] Noël Carroll - On Criticism (Oxfordshire:2008),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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