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편

당신에게 자해란?

by 미지수

보시기에 앞서 이 글에는 자해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립니다. 읽으시는 데 있어 참고해 주시고, 만약 불편하시다면 다른 글을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덧붙여서, 자해는 절대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아래는 그저 한 청소년의 자해에 대한 생각일 뿐, 절대적 정답이 아님을 명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에게 자해란?

나에게 자해란 일종의 숨 쉴 틈이었다. 억울하거나 분이 찰 때, 너무 우울하고 속상해 견딜 수 없을 때,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줬을 때, 나는 어김없이 손목에 바코드를 새겨나갔다.

만일 이런 나에게 자해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자유'라고 답하고 싶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아픔이자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나 스스로를 해침으로써 나는 비로소 자유를 느꼈으니까.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내가 후회하는 유일한 자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를 좀먹어가는 과정을 '자유'라고 착각한 것 일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한 착각이었다.

열세 살 때 처음으로 했던 자해는 4년이 지난 지금, 열일곱이 되어서도 끊지 못한 자유가 되었으니, 어찌 후회하지 않는단 말인가. 사실 내가 가진 자유는 내가 살기 위했던 마지막 몸부림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분명히 말한다, 자해가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타인의 시선

언젠가,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본 적이 있다. 나의 손목을 처음 봤을 때 어땠느냐고. 몇몇 사람들은 걱정된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다며 나를 피하곤 했다. 걱정된다는 사람들에겐 그저 웃어넘겼고 감당할 수 없다며 피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아마 나의 평소 모습과 내 손목이 보이는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짐작하는 미지수이다.

나는 평소에 매우 잘 웃고, 사소한 것에도 잘 웃는 그런 다소 만만한 아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보이는 나의 모습과 내 손목이 보이는 모습에서 오는 차이가 심할 수밖에. 어쩌겠는가, 내가 나에게 준 첫 자유가 이런 모습인걸.


날것의 솔직함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몇몇 분들은 이 글에 나타나는 지나친 솔직함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을 부인하고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존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몇 가지를 말씀드리려 하는 것이다.

나는 현재 우울증, 불안/공황장애, 조울증을 치료 중에 있고 그 과정은 장장 4년 동안 이어진 긴 여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아픔을 솔직하게 풀어내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고, 여기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나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적어보는 것이다. 아픔을 마주할 용기도, 시간도, 여유도 없던 그런 나는 아직 여리고 어린 미지수니까.


마지막으로, 전국의 미지수들에게

만약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미지수들이 있다면, 나는 꼭 하나 말해주고 싶다. 손목에 상처가 가득하고 이젠 마음마저 너덜너덜해진 미지수라면, 그런 사람이라면 너무 애쓸 필요 없다고 말이다. 지금 당장엔 멈추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지만, 한 발 멀어져 본 세상은 더욱더 아름답고 깊어질 것이라고. 나의 자유가 반드시 해결책은 아니라고.

다고 중구난방인 글을 마치며 또 한 번의 감사를 전하는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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