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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 Nov 20. 2023

고쳐사는 집

먹고, 자고, 씻고...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활동 뿐만 아니라 가장 쓸 데 없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다시 말해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그것. 바로 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집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내가 살고 싶은 곳을 고르기 위해서는 예산, 직장, 인프라, 집의 현재 가치 그리고 미래가치 투자 전망까지, 따져야할 것이 한 두 개가 아니다. 내 월급은 **만원, 저축할 수 있는 돈은 **만원, 소위 말하는 재테크라는 것을 통해 내가 낼 수 있는 부수익 **만원, 이걸로 내가 원하는 집을 살 수 있는 시기는... 이건 계산이 잘못된게 아닐까? 몇 번이나 계산기를 두드려보고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그러다가 결론을 내렸다. 내가 살 집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구나. 이 불공평한 사실을 절절히 느끼기 시작할 때 쯤, 불현 듯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언제까지 기다려주지도 않을 집에 목 매고 살아야하는거야?’ 집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수동적인 마음이 드는 스스로를 안타깝게 여긴 후, 내가 원하는 집을 직접 발품 팔아 찾아서 손에 넣으리라,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고쳐서 살리라라는 마음이 들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골집을 고치기 전까지 집과 관련한 목표는 ‘집 꾸미기’, ‘저축해서 집 사기’ 정도에 머물렀다면, 이제 공간을 거의 새로 짓는 수준으로 집을 새로 고치면서 집은 고쳐서 사는 것, 그리고 만들어가며 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집을 다 뜯어냈으니 깨끗한 도화지가 된 집에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면 되는 차례이다. 이전부터 어떤 집에 살고싶은지 천 번도 넘게 이야기한 우리는 하고싶은 것이 참으로 많았다. 그 많은 선택지들 중에서 취사선택을 하면서 헌 집을 새로 디자인 하는 과정에, 뜻밖의 철학적인 질문에 직면하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무작정 예쁘게, 보기 좋게, 편안하게를 넘어 집의 각 공간에서 어떤 활동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다 보니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해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살아가는 공간을 직접 고치고 만든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에서 만들어진 레이아웃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붓을 쥐고 하나씩 그려나가는 과정과 같았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사람이 내 손을 잡고 그려주는 것이 아니다 보니,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없었고 혹시나 잘못하면 어쩌지라는 불안과 고민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림에 비유를 하긴 했으나, 우리가 하고 있는 작업은 집 짓기가 아니던가! 잘못 고친 집을 그대로 지워낼 수도 없고, 철거와 폐기의 실제적인 어려움을 구구절절 겪은 직후였다보니, 방향성을 담아내는 모든 과정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이 집에 살 사람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우리였다. 주체성을 가지고 집을 나에게 맞춰가는 과정이니,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조심스레 하나씩 정해나갔다. 집은 그릇과 같아서 안에 담기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모습과 형태가 바뀔 수 밖에 없다. 즉 좋은 집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결국, 집도 사람도 서로를 닮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고친 집에서 ‘잘 살아내야겠다.’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그렇게해서 별채의 작은 방 사잇벽을 허물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 아틀리에를 만들었다. 남편의 20대, 내가 그를 모르던 시절 그가 어떤 생각과 영감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수많은 작품들이 도시 집 창고에서 썩고만 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는데, 이 참에 아틀리에로 옮겨와 예쁘게 전시를 할 생각이었다. 또 부지런히 움직이는 재주, 뭐든지 만들어내는 재주를 가진 두 손으로 앞으로도 많은 창작활동을 하고 마음 속 영감이 계속해서 타오를 수 있도록 이젤과 그림 재료를 옮겨 두고, 얼마든지, 언제든지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두었다. 오래된 서까래를 살리고, 폐기물에서 헌 문을 건져내어 솔질을 해 박박 문질러 닦은 후 창호지를 붙였다. 아침이면 볕이 드는 본채에는 여주로 여행 갔을 때 숙소의 주인이 골동품을 한없이 구경하며 감탄하는 내게 3만원이라는 헐값에 판 나비장을 두었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그 나비장 또한 물로 깨끗하게 씻어내고 오일로 닦아내니 우리 시골집에 원래부터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빌트인 가구처럼 보였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들로, 어떻게 살겠다는 다짐들로 집을 구상하고 하나씩 채워나갔다.     


시골집의 묘미는 대체로 자연의 일부로써 집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숲과 한 몸이 되어 이질감이 들지 않던 우리 집의 정취에 한 눈에 반했는데, 실상 들여다보니 엄청난 생명력과 전파력을 가진 대나무 숲이 집을 야금야금 먹어서 수리 전 한옥의 별채 바닥을 뚫고 대나무 뿌리가 올라와 있었다. 대나무 뿌리를 전부 캐내고, 별채 앞을 콘크리트 미장을 두른 후에야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는데, 사람이 사는 공간이라 해서 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는 것이 사는 이치라는 것을 깨닫고서야 비로소 집 앞에서 조금이나마 겸허해질 수 있었다. 집을 꾸며나가다 보면 집 짓기도, 집 고치기도, 뭐든 안 될 것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오만함을 떨어서는 안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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