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대체 왜 그래?
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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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번호로부터 전화 한 통이 울린다.
스팸전화일 것이 분명하지만 일단 받아본다.
"여보세요"
어딘가 낯익은 목소리.
"안녕하시게! 잘 지내고 있었나! 나야. 같이 기차 타고 서울 왔던!"
기차 타고라.. 내가 언제 누구랑 기차를 타고 서울을 온 적이 있던가..
...아....!
"아! 저번에 그 170억 사장님?!"
앗. 나도 모르게 170억 사장님이라고 이야기해버렸다. 돈밖에 기억 못 하는 속물처럼.
에이 그럼 뭐 어때.
내가 돈을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170억 자산운용보고서를 보여준 것도 본인인걸.
핸드폰 너머의 노신사가 호탕하게 웃는다.
"허허허. 그렇게라도 기억해 주니 좋구먼. 이번 주에 시간 언제가 괜찮나? 내가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네만. 그때 신세를 많이 져서.."
이 할아버지 진짜 왜 이래.
왜 이렇게 집착이 쩔어.
열차 승차권 하나 취소해 준 게 뭐라고 이렇게 고마울 일인가. 그냥 좋은 기억으로 남겨두면 될 것을.
"아 제가 일반 일근직이 아니라서요. 근무표를 한 번 봐야 할 것 같아요. 제가 근무표 한 번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지금 당장 대답을 하기 싫어 근무를 핑계로 약속을 미룬다. 사실 내가 이 노신사를 왜 또 만나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바라지도 않은 상대방의 호의에 거부감이 든다. 목적이 무엇일까 의심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번에 준 명함 안의 정보도 모두 이상했었으니까.
"알겠네. 꼭 연락 주게나. 내가 신세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알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어르신.."
뚝.
이 사람 진짜 뭘까.
진짜일까 가짜일까.
'엄마 아빠가 늘 착하게 다가오는 사람을 조심하랬는데.. 세상에 공짜는 없다 했는데. 누군가 호의를 베풀면 의심은 해보라 했는데..'
괜한 스트레스 이슈가 하나 더 생긴듯 하다. 그날 대전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그냥 모른 척했으면 이렇게 신경 쓰일 일도 없었던 건데.
회사 주차장을 초점 없이 빙빙 돈다. 그러다 발에 걸리는 자갈이라도 있으면 툭 차버리기도 하고.
그때, 날카롭지만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로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야! 김북꿈! 거기서 뭐 하냐?"
동기 형이다. 좋게 말하면 동두천에서 근무하는 한국계 주한미군 느낌. 나쁘게 말하면 고릴라처럼 생긴 동기 형.
"이리 와. 담배나 피자. 커피는 이 형이 산다."
담배도 안 피는 사람한테 담배나 피자니.
하긴. 남자들의 의리와 사적인 이야기는 흡연장에서 오고 가는 법이니까. 간접흡연도 흡연이니 기꺼이 가야지.
동기 형이 멋지게 담배에 불을 붙인다.
"뭔데? 무슨 고민이길래 주차장을 빙빙 돌고 있는데?"
역시 회사 주차장을 초점 없이 빙빙 돌고 있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해 보였나 보다. 고민은 아니지만 내가 신경 쓰고 있던 그 이슈를 동기 형에게 이야기해준다.
"아니 며칠 전에... 케텍스 타고 올라오다가.. 이런 일이.. 근데.. 부자.. 170억.. 근데.. 집착.. 자꾸 만나자고.."
"너 병x이냐?
동기 형이 대뜸 욕을 한다.
그리고 나도 속으로 생각한다.
'뭐래. 병x이..'
"ㅋㅋㅋㅋ왜요?"
"그거 딱 봐도 네 장기 털라고 하는 거잖아ㅋㅋㅋ 너 그 사람 사무실 가지? 그럼 문 엶 과 동시에 덩치들이 너 잡고 안 놔준다. 그리고 이제 간은 충청도로.. 눈은 경상도로.. 심장은 서울로 흩어지겠지.."
가만 보자. 만약 그 170억 재산이 사람들 장기 팔아서 모은 돈이라면? 170억이라는 돈을 합법적으로 벌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큰돈을 어떻게 합법적으로 벌어.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나이가 70 정도는 넘어 보였으니까 20대의 싱싱한 장기가 필요할 수도 있겠어요.”
동기형이 인상을 팍 쓰며 담배연기를 내뿜더니 한마디 더 한다.
"그리고, 그렇게 돈 많은 사람이면 시간이 남아 돌지도 않을 텐데 왜 너를 굳이 만나려고 사정사정할까? 장기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번 의심해 볼 필요는 있어 보인다. 접근 의도가 불순해 보여."
맞는 말이다. 그 정도 재산이면 만날 사람이 수두룩 빽빽할 텐데. 굳이 나한테 매달릴 이유가 없다.
「 전화통화합시다. 」
이제는 전화하기에 앞서 먼저 문자를 남겨놓는 노신사. 점점 귀찮아진다. 노신사라는 말은 지난날의 이야기다. 이제는 할 일 없는 노인네로 보인다.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본다.
"아니 글쎄 내가 며칠 전에 서울 올 때 이런 일이 있었거든? 근데 그 어르신이 자꾸 한 번 만나자고 하네. 어떻게 생각해?"
여자친구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이야기한다.
"한 번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요즘 같은 세상에 납치나 장기매매 그런 일이 있겠어? 어딜 가도 CCTV가 다 있는데.. 인생의 기회는 우연히 찾아온다고 하잖아. 혹시 알아? 이번에 자기가 베푼 작은 호의에 감동을 받아 큰 가르침을 선물해 주고 싶을 수도 있는 거니까.."
인생의 기회는 늘 우연히 찾아온다고 한다.
내가 베푼 작은 호의에 누군가는 큰 감동을 할 수 있으며, 진심 어린 조언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날 어르신의 공허한 마음을 내가 잠시나마 채워줬을 수도 있는 것이다.
「 전화 부탁합니다. 오xx 」
「 전화통화합시다. 」
「 메시지 보면 전화하세요. 」
약속은 잡지 않은 상태로 몇 번 통화를 받아주니 점점 집착이 더욱 심해진다. 전화를 받지 않은 날에는 지속적으로 문자까지 보내며 나를 괴롭힌다.
이 정도면 뭔가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 아니면 어디 아픈 사람이거나.
인생의 기회고 나발이고 귀찮아 죽겠다. 당장이라도 차단을 하고 싶지만 그래도 최대한 정중하게 불편한 뜻을 내비친다.
「 통화 가능한지요 일 이분이면 됩니다. 」
이 문자를 마지막으로 나는 그 어르신을 차단했다. 지금 와서 보니 궁금하기도 하다. 마지막 일이분 통화에서 과연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
당시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내가 봤던 170억의 자산 운용 보고서는 지금 생각해 보니 최고의 포트폴리오였던 듯하다. 큰 시드머니를 바탕으로 국내외 안전자산에 투자하며 배당 수익으로 복리 효과를 최대한 누릴 수 있으니까.
지금의 나였다면, 그래도 밥 한 끼 정도는 했을듯하다.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방법으로 그 자리까지 가게 되었는지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할 테니까.
인생의 기회는 우연하게 찾아온다고 한다.
과연 저 때의 저 사건은 과연 나에게 기회였을까,
아니면 모두의 우려처럼 사기였을까.
그리고 나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고 하면,
나는 그 기회를 알아차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