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이 엘사 소리를 듣게 될까 봐..."
2022년에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LH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해서 딸 둘을 키우는 친구는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곧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딸이 '엘사(LH 아파트에 사는 사람)'라는 놀림을 받을까 봐 걱정된다는 것이다. 엘사 외에도 '휴거(휴먼시아 사는 거지)', '빌거(빌라 사는 거지)'라는 말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요즘은 개근하면 해외여행 같은 체험학습 한 번 가지 못했다고 하여 '개근거지'라는 조롱을 당한다고 한다. 비교와 혐오의 단어가 아이들 사이에서 오간다는 사실이 적잖이 충격이었다.
몇 년이 지나 내가 엘사가 되고 보니, 현대판 신분제의 존재를 확인한 기분이다.
공식적인 신분제는 폐지되었지만, 경제적 계층화의 모습으로 옷만 바꿔 입고 여전히 존재한다.
경제력을 추측해 등급을 나누고 부의 세습이 고착화되어 계층 간의 이동이 어려운 현실은, 현대판 신분제가 굳건하다는 걸 말해준다.
이쯤 되면 급을 나눠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는 게 인간의 본성인가 싶다.
내가 남보다 우월하다는 감정은 중독적이다.
게임을 할 때조차 내 캐릭터를 레벨업하며 짜릿해하고 나보다 레벨이 낮은 사람은 하찮아한다.
시쳇말로 '만렙'은 '쪼렙'앞에 기세가 등등하다.
명품과 좋은 차를 소유하고 좋은 집에 살고 싶어 하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사람은 남들보다 잘살고 싶어 한다. '남들보다'라는 조건에서 우월해지길 원하는 마음이 드러난다.
'남들보다' 낫기가 어렵다면 '남들만큼'은 살길 원한다.
우월해질 수는 없을지언정 조롱은 당하기 싫은 것일 테다.
이런 마음이 어긋나서 남을 깎아내리는 잘못된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내가 높아지는 것보다 남이 내려가는 게 상대적으로 쉽고 편하다.
높이 올라가려면 힘들게 노력해야 하지만, 남을 깎아내리는 건 입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남을 밟고 올라서라도 빛나고 싶은 마음은 거지보다 더 구차하고 가난하다.
어릴 때 동요처럼 부르던 '작은 연못'이란 노래가 생각났다.
작은 연못 안에 살던 붕어 두 마리가 싸워서 한 마리가 물 위에 떠올라 그 살이 썩어가니 결국 다른 한 마리도 살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비교와 혐오, 조롱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사회를 병들게 한다. 내가 사는 곳이 병드는 것이다.
남을 비난해서 얻은 영광은 유효기간이 짧아 금세 악취가 난다. 냄새로 진동하는 사람 곁에 누가 있고 싶어 할까. 가난한 마음으로 상대를 깎아내리는 자에게 진심을 다할 사람은 없다.
우월해지고 싶은 마음을 탓하고 싶진 않다. 정말 인간의 본성이라면 탓해봐야 별 소용이 없을 것이고, 그런 욕구 덕분에 인간은 발전해 왔다.
단지,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내가 잘라서 주어진 것만은 아니며 남을 향한 비난의 화살은 결국 다시 내게 돌아온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 같은 연못에 사는 물고기에게 탈이 없어야 연못의 물이 깨끗하게 유지되고 결국 모두가 살 수 있다. 앎을 통해 본성을 적당히 제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만이 갖고 있는 가장 부유한 자산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