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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원 Sep 15. 2023

아버지 창피해하지 마라.

눈으론 볼 수 없는 것들.

  '콘크리트 유토피아' 영화를 두 번 보고, 한 번을 더 봤다.

"미쳤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병헌의 연기를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주중에 조조 영화를 두 번째 관람하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 영화완 상관없이 눈물이 나왔다.


세 번째 관람은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다.

지랄하는 세상에 맞서 싸우다 쓰러져도 기어코 일어나는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염원은,

 '내 가족 따순밥 먹이고, 두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게'가 아닐까? 


'아버지도 열심히 살았는데....'

그때의 나는 왜 아버지를 바보라고 생각했을까? 어려서? 단지 어려서라고 하기엔 너무 비겁한 변명이다.

어리석었던 지난 시간에 대한  자책감으로 이러저러한 다른 사람들의 영화 감상 후기와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영화 상영 내내 '아버지 미안해'를 수없이 되풀이하다 세 번째 영화관을 나왔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학교 가려고 교복을 입는데 엄마가 곁으로 오더니 조그만 소리로 묻는다.

“너 며칠 전에 버스에서 아버지 못 봤어?”

“아니. 언제?”

“한, 이삼일 전에...”

“못 봤는데...”

“그치?...”

“왜? 아버지가 언제 버스에서 날 봤데?”

“... 아니, 저번에 버스에서 너는 앞에 내리고 아버지는 뒤에 내렸는데 따로 걸어가더라고 가겟집 할머니가 그러더라. 그럼 아버지를 못 봤구나?

“그래? 난 몰랐는데”

나는 얼버무려 대꾸하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 따로 걸어가더라...’는 소리가 머리를 때려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이, 삼 일이 아니라, 일주일 전쯤이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버스를 탔다. 그날은 운 좋게도 빈자리가 있어서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친구의 가방을 무릎에 올리고 앉아 신나게 수다 삼매경에 빠져 얼마쯤 지났을 때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들 여럿이 차에 오르는 게 보였다.

나는 그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시간이면 아버지도 일을 마치고 버스를 탈 시간이다. 

‘혹시 아버지가 버스에 타면 어떡하지...’하는 나의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빗나가지 않았다.

시끌벅쩍하게 버스에 탄  노동자들 사이에 섞인 아버지를 보고 나는 얼른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노동자들의 작업복에 밴 땀 냄새와 섞인 술 냄새의 독특한 냄새가 차 안에 퍼지자, 버스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 인상이 찌푸려졌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 여학생들은 내놓고 싫은 기색을 보였다. 행여 그들이 자신의 곁에 가까이라도 올까 봐 지레 겁을 먹고 잔뜩 움츠리기도 했다. 나도 한 껏 인상을 쓰고 슬쩍 그들을 둘러봤다. 혹시 나와 가까운 곳에 아버지가 서 있을 끼 봐 두려워하며.

다행히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밀려 버스 뒤쪽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못 봤다. 사람들이 많아서 못 봤다. 앞에 다른 친구가 가리고 서 있어서 못 봤다.’

눈은 창밖을 보면서 내게 계속 주문을 걸고 있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뿜어내는 역겨운 냄새를 외면하고 있을 때, 나는 독하게 부릅뜬 눈을 차창 밖으로 돌리고 아버지를 외면하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왜 남들처럼 흰 셔츠에 양복 입는 회사를 다니지 못하고, 저런 허름한 작업복으로 술 냄새를 풍기면서 하필 지금, 왜 나랑 같은 버스를 탄 거야?’ 

같은 버스를 탄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행여 누가 저 사람이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까 봐 전전긍긍하며 앉아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그래야 끝까지 아버지를 못 보았노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적에 탄광에서 일하다가 다쳐서 한쪽 다리가 성치 않다. 그날 아버지는 절름거리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뒤를 따라왔다. 앞에서 도망치듯 걷고 있는 나와 되도록 멀리 간격을 두고.

아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매정한 자식의 뒷모습을 불쌍하게 바라보지는 않았을지....


그날 이후 아버지는 죄인처럼 내 눈치를 보며 지냈다. 마치 같은 버스를 탔던 게 무슨 커다란 잘못인 것처럼.  반면 나는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를 평소처럼 대했다. 밥도 같이 먹고, TV도 같이 봤다. 그래야 내가 아버지를 정말 못 본 게 되니까.

속으론 수없이 ‘나쁜 계집애’라고 욕을 하면서도 눈치만 보다 아버지에게 잘못했다고 말할 기회를 놓쳤다. 그렇게 죄 없는 아버지를 죄인으로 만들고 나는 평정심을 되찾아 가고 있을 때, 엄마가 물어온 것이다. 


엄마는 평소에 ‘귀신을 속이지 나를 속여?’라며 절대로 알 수 없을 것 같은 일들도 정말 귀신같이 알아내곤 했다. 그러니 나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다고 했지만, 엄마 눈에는 얼마나 어색하게 보였을까?

“늬 아버지 불쌍한 사람이다. 절대로 창피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내가 ‘못 봤다’고 매몰차게 얘기하고 나올 때 내 뒤통수를 친 엄마의 한마디가 귀에 쟁쟁하다.     


엄마가 ‘아버지 불쌍한 사람’이라고 한 의미를 지금은 안다. 가난해서 불쌍한 게 아니고, 절름거려서 불쌍한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불쌍하다는 의미였다는 걸.

6.25 전쟁 당시 의용군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던 아버지는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남한에 남게 되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아버지는 외삼촌이 서울에 거주하기는 했어도 전쟁 끝이라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가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꿈을 버리고 생활전선에 뛰어든 아버지는 힘든 시기를 보내다 엄마를 만나 우리 삼 남매를 낳았다. 시인을 꿈꾸던 소년은 어느덧 중년을 지나는 길목에 서 있고, 꿈을 접은 아버지의 안타까움은 생활에 묻혀버렸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아버지는 가끔 우리가 쓰고 남은 공책 뒷장에 시를 써 놓기도 하고, 작은 수첩에 시를 써서 가슴에 품고 다니기도 했었는데 이사할 때마다 엄마는 그 공책들을 정성스럽게 싸서 짐꾸러미에 넣어 옮기곤 했다. 


엄마가 불쌍하다고 했던 의미는 꿈을 접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내가 조금 더 일찍 철이 들었다면 아버지의 시는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버지의 시가 담긴 노트들은 버려진 지 오래다. 수업료 독촉을 받을 때마다 내가 화풀이로 아버지의 노트를 한 권씩 쓰레기통에 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노트가 언제부턴가 안 보이는 이유를 엄마는 진작 알고 있었을 것도 같다.

 ‘늬이 아버지 수첩이 안 보인다’는 엄마의 중얼거림과 '아버지 불쌍한 사람이다.'던 엄마의 낮은 목소리가

 "네 죄를 네가 알렸다?"며 가슴을 친다.


지금의 내가 그날의 상황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다면,

"아버지!  여기 앉아서 가!" 하며 벌떡 일어나 아버지 손을 잡아끌어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아버지를 앉혀서, 아버지의 동료들이 아버지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했을 텐데.

아버지를 바보라고 생각했던 내가 더 바보였다고 늦은 후회를 한다.


언제쯤이면 엄마처럼 인간을 보는 눈이 뜨일까?  

사실 그날 버스에서 잠깐, 아주 잠깐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었다. 내가 눈길을 돌리기도 전에 아버지가 먼저 나를 외면하고 황급히 뒤쪽으로 들어갔다는 것까지도 엄마는이미 알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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