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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원 Oct 27. 2023

지가 한 욕, 지 치마폭에 떨어진다.

엄마의 명언

"으응... 내가 알아서 해요. 왜들 그래요?"

엄마는 꿈에서 또 누군가와 다투는 중인 것 같다. 요즘 들어 부쩍 잠꼬대가 심해진 엄마.

어느 때는 하고 싶은 말 실컷 하라고 그냥 있기도 하지만 괴로운 신음 소리가 길어지면 나는 엄마를 흔들어 깨운다. 내가 엄마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엄마, 물 좀 드릴까? 불 켠다?"

내가 흔드는 바람에 꿈에선 나왔어도 갑자기 밝아진 방안 풍경에 엄마의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방금 전까지 다투던 누군가를 찾는가 보다.

"에휴~~!"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길게 내뿜는 엄마. 머리맡에 두었던 물컵의 뚜껑을 벗기고 엄마에게 물을 권했다. 

"아니 그런데, 도대체 사람들이 왜 남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참견들인지 몰라."

물컵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엄마는 볼멘소리를 했다.

"누가 또 엄마 심기를 건드렸을까?"

"내가 내 새끼 학교 보내는 것도 자기들이 하라는 대로 해야 돼?"

엄마는 마치 내가 방금 전에 엄마와 말싸움을 하던 사람인양 눈에 온 힘을 모아 치켜뜨고 나를 똑바로 보며 소리친다.

"엄마! 나야~"

나는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와서 엄마 손을 가만히 잡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랬다. 동네 사람들 몇몇은 내가 중학교에 가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없는 집에서 빛내가며 자식 학교에 보낸다고 모이면 수군거렸다. 특히 내가 교복 입은 모습을 보면 앞에선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았고, 바로 내 등뒤에선 꼴사납다는 표정과 '쯧쯧~~ ' 입소리로 욕을 했다. 물론 내가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런 어른들의 눈총은 어린 나이에도 충분히 느낄 만큼 따가웠다.


어느 여름날 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학교 숙제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두런두런 말소리가 서서히 나를 잠 나라로부터 끌어내서 잠은 완전히 깼는데 엎드려 잠든 상태 그대로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빛 받으러 온 아줌마에게 엄마가 일장 연설을 듣는 중이었다. 내가 깊은 잠 속에 있을 때부터였으니 상당히 긴 시간을 엄마는 그분에게 시달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엎드린 채로 나도 같이 들었다.

"생각해 봐요. 내가 하도 딱해서 그래. 맨날 찬물에 손 담가 빨래해서 먹고살기도 바쁜데, 국민학교  졸업했으면 어디 공장이라도 보내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빚져가며 중학교를 보낸다고... 남들이 다 욕해요."

아마도 내 교복과 중학교 입학금은 그분에게서 빌려 온 것 같다.


"지난번에 빌린 돈은 애들 아버지 일 한 것 받아오면 드릴게요. 그리고 애 학교 보내는 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어디 밤새워 일하는 곳이라도 알아보지요 뭐."

"아니, 큰 딸은 어떻게 보낸다고 쳐. 그럼 아래로 두 동생들 학교 갈 때는 어떻게 하려고? 애들 금방 커!"

"공부라도 시켜야 나같은 고생 안 하고 살지요."


엎드려 있던 탓에 코가 눌려 답답하기도 했지만 난 계속 그대로 꼼짝 않고 있어야 했다. 안 봐도 뻔히 보이는 빚쟁이 앞에 죄인처럼 앉은 엄마의 모습이 안쓰러워 눈물, 콧물이 계속 흘러 숙제하려고 펼쳐놓은 노트를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내 새끼 내가 학교 보낸다는 데 누가 욕을 해요? 없는 집에선 애들 학교 보내면 안된답디까?"

"아이고~~ 이런 고집불통 마누라 같으니라구! 하여튼 다음 달 까진 이자까지 쳐서 돈 꼭 갚아요! 난 그만 가요."

자신의 걱정을 듣지 않는 엄마를 고집쟁이라고 말하며 그분이 가는 소릴 들었다.


"이제 일어나도 된다. 나가서 세수하고 와."

엄마는 내가 진작에 깨어 울고 있었던 걸 알고 큰소릴 내어 그분을 돌려보낸 것이다.

나는 자식 앞에서 빚 독촉을 받은 엄마가 자존심 상할까 봐 되도록 깊은 잠이 든 척하고 있었는데... 어설픈 연기가 더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아 화가 났다.

"엄마, 나 학교 안 가도 돼. 공장 가서 돈 많이 벌어서 저런 아줌마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래."

"쓸데없는 소리 말고 코나 풀어!"

홧김에 벌떡 치켜든 얼굴 코끝에  긴 콧물이 거미줄처럼 매달린 게 느껴졌다.

"니들은 공부해야지. 돈은 나중에도 벌 수 있어."

"사람들이 엄마 욕한다잖아. 엄마가 뭘 잘 못했다고..."

난 정말 그 말이 더 속상했다. 엄마가 무엇 때문에 욕을 먹어야 하는지.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어쩌면 뭇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엄마는 분수를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게 잘 못이라면 잘 못인 거다.


"그깟 욕, 내가 안 들으면 그만이지. 지가 한 욕 지 치마폭에 떨어지지 욕에 발 달려서 나한테 온다든?"

엄마는 조용하고 나직하게 나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고, 마치 엄마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그 표정과 목소리가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하는 중국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비장하게 느껴졌다.


그다음 달에 엄마가 그분에게 빌린 돈을 갚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날 비장함이 담긴 엄마의 말은 기억하며 아직도 엄마의 명언 중에 명언으로 꼽는다.

"지가 한 욕, 지 치마폭에 떨어진다."


"엄마! 누구랑 싸웠어? 내가 가서 뭐라고 할까?"

"놔둬라. 그니도 이제 할머니가 돼서 기운 없어 보이더라. 같이 늙어가면서 싸우면 뭐 하냐. 그래도 그이가 아니었으면 너희들 학교를 어떻게 다녔겠냐? 다른 건 몰라도 수업료 내야 한다고 하면 군말 없이 빌려준 고마운 사람이다."

다른 기억은 사라져도 고마움은 남는가? 나쁜 기억보다 좋은 기억이 더 오래가는가? 엄마만 그런가?

가끔 엄마를 보면서 생각한다. 나의 정신이 짙은 회색빛 구름 속에서 방황할 때 좋은 것만 기억하려면 좋은 생각만 해야겠다고. 그러기 위해선 지금 내 치마폭에 떨어진 '욕'들을 빨리 털어버려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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