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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원 Nov 07. 2023

가진 것 모두 털어내고...

죽음이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 과정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70년 혹은 80년, 아니 어쩌면 100년간의 긴 인생 마라톤을 완주한 것에 대한 자연의 배려는 그래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러나 자연이란 신은 냉정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지상에서 가지고 있던 것은 모두 내려놓으라 한다. 끝까지 부여잡고 싶은 인간의 존엄도 버려야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다.     


엄마에게 마법 팔찌가 있다고 해도 자주 밖으로 나가는 엄마를 혼자 지내게 할 수가 없어서 엄마를 주중에는 동생네 집에서, 주말과 휴일에는 우리 집으로 와서 지내게 했다. 오늘은 일요일, 우리 집에서 지내는 날이다. 

균형을 잡지 못해 의자에서 자주 미끄러져 떨어지는 엄마를 위해 거실 바닥에 밥상을 차렸다. 밥상 주위에는 엄마가 음식을 흘리면 닦으려고 두루마리 휴지와 물티슈를 미리 가져다 놓고, 엄마를 방에서 거실로 데리고 와 밥상 앞에 앉혔다.

아직은 당신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할 수 있기에 식사 시중을 따로 들 필요는 없다. 거실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본다면 3대(代)가 모인 화목하고 정겨운 풍경이다.


 엄마 손에 든 젓가락에서 김치가 떨어진다. 곁에 앉아 밥을 먹던 나는 얼른 휴지를 두 칸 뜯어 김치를 집어내고 김치 물이 묻은 바닥을 닦았다. 이번엔 국그릇에서 건져 올린 미역 줄기가 미끄러지더니 상 위에 길게 눕는다. 나는 거의 기계적으로  물티슈를 뽑아 상을 닦았다. 젓가락 대신 숟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려던 엄마가 숟가락을 바닥에 던지고 울기 시작한다.

“이젠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 하는데 살아서 뭐 해.”

 떨어진 김치를 싸서 상 아래 놓아둔 휴지로 눈물을 닦으며 우는 엄마 얼굴에 김치에 붙었던 고춧가루가 달라붙었다. 엄마 얼굴에 붙은 고춧가루도 물티슈를 뽑아 닦아주다가 나도 그만 울어버렸다.


 엄마가 음식 흘릴 때마다 빠르게 휴지와 물티슈로 닦아내는 나에게 눈치를 주던 남편과 아이들이 내가 울자 황급히 움직였다. 남편이 가위를 가져와 김치를 잘게 잘라 엄마 밥 위에 놓아준다. “어머니 이거 드세요.”

“할머니 이거” 큰아이가 작은 접시를 가져와 반찬을 골고루 담더니 엄마 국그릇 옆에 놓아준다.

“엄마도 얼른 먹어” 눈물 흘리며 앉아 있는 나에게 작은 아이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말한다. 이럴 때 아이들은 나보다 더 어른스럽다.     


 나도 안다. 음식을 흘릴 때마다 내가 닦아내면 엄마의 자존심이 상처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되풀이한다. 남편과 아이들은 그럴 때마다 나에게 핀잔 섞인 눈빛을 보내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 엄마가 음식을 흘리면 내 자존심도 다친다. 내 엄마가 남편과 아이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나는 싫다. 언제나 단정하고 야무진 장모로 기억되길 바라며, 따뜻하고 자상한 할머니로 아이들이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큰 탓이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엄마지만 나에겐 엄마만큼 영리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없다. 그런 엄마가 음식을 흘리면서 먹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나는, 속상한 게 아니라 창피했다. 엄가는 언제까지 바른 모습만 보여주길 바라며 엄마에겐 너무 힘에 겨운 주문을 거의 매끼마다 하는 내가 한심한 생각이 들어도 멈출 수가 없다. 실수하는 엄마보다, 엄마를 변하게 만든 무정한 세월이 더 원망스러운데 어디에다 그 원망을 쏟아내야 할지 모르겠는 나의 분풀이일지도 모른다.


 “엄마도 옛날에 우리가 밥 흘리면 혼내고 그랬잖아.”

당신 숟가락 던진 것을 잊고 내 숟가락을 집어 드는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 반, 원망 반 섞어 말했다.

어렸을 적에 엄마와 함께 밥을 먹을 때는 항상 조심스러웠다. 숟가락, 젓가락도 본인 것만 사용하게 했고, 허리를 구부정하니 굽혀도 안 됐고, 반찬을 뒤적여서도 안 됐다. 쩝쩝 음식 씹는 소리가 크게 나는 것도 주의 대상이었다. (어쩌면 엄마는 깔끔함에 대한 강박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 그러다 보니 밥 먹을 때는 잔뜩 긴장이 돼서  밥이나 반찬을 더 자주 흘리거나 국을 쏟기도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행주로 상을 닦거나 야단을 치거나 했었다. 


“그래서 지금 나한테 복수하는 거야?”

‘복수’란 말에 엄마와 나의 눈치를 보던 남편과 아이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아이들이 웃자 엄마는 자신이 말을 잘했다고 생각했는지 한마디 더 한다.

“이젠 힘도 없는 늙은인데 복수하면 뭘 해 늦었지.”

“복수는 무슨, 엄마한테 배운 거지. 깔끔한 엄마 딸이라 그렇지.”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갑자기 엄마가 빈 숟가락을 내려다보며 한숨 섞인 말을 했다.  

지금 엄마의 이 말은 누구에게 하는 질문일까? 그저 혼잣말인가 아니면 진심으로 답을 듣고 싶은 질문인 걸까? 그걸 내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탄생, 성장, 노화,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간 생의 마지막 차례라서 그렇다고, 처음 세상에 올 때처럼 모든 것 다 버려야 갈 수 있는 곳이어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

엄마의 깔끔함도, 따뜻함도, 더구나 우리와의 기억마저도 버려야 갈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면 엄마 마음이 조금 편해지려나? 아니 엄마보다 어쩌면 내가 더 듣고 싶은 말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런 순간의 엄마를 이해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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