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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xiom Feb 02. 2024

죽음과 죽음 사이의 거리 1

나는 정형외과 레지던트다.

서울에서의 재수생 시절.


나는 생애 처음으로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었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달려간 어느 대학병원의 중환자실,


그곳에서 나의 친조부는 사경을 헤매고 계셨다.


당시 친할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인간의 것인가 싶은 검갈색의 피부.


온몸에 주렁주렁 연결되어 있는 온갖 플라스틱 관들.


인공호흡기 튜브에서 들리는 괴이한 숨소리.


초점을 잃고 천장만을 바라보는 샛노란 두 눈.


난 그 광경을 보며 친할아버지께서 곧 떠나실 것임을 직감했다.


가족과 친척들이 옆에서 흐느끼고 있었고,


나는 세차게 뛰는 가슴을 붙잡으며 간신히 눈물을 참고 있었다.


그때 날 거슬리게 하던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침대 옆에 서있던 나이가 많은 의사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 20대 후반의 어린 레지던트였을 수도 있겠다.)


그는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침대 위에 있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니터엔 의미를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줄들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당시 난 그 줄들이 마치 살고자 발버둥 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의사는 그 줄들을 바라보다 이따금씩 할아버지와 연결된 플라스틱 관에 뭔지 모를 주사를 놓곤 했다.


그게 다였음에도 나는 그가 왠지 싫었다.


온 가족이 절망하는 상황에서,


의사 혼자 차분한 표정으로 무심히 주사를 놓는 그 모습은


마치 친할아버지의 죽음이 아무 일도 아닌 것 마냥 취급하는 것만 같았다.


당시 어렸던 난 자신의 미래가 어찌 될지 모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의사들은 다 사이코패스인가...’








환원주의란 말을 아는가?


환원주의란 철학에서 복잡하고 높은 단계의 사상이나 개념을 하위 단계의 요소로 세분화하여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이다. 


물체는 원자들의 집합이고 사상은 감각 인상들의 결합이라는 관념은 환원주의의 한 형태이다.


우리가 의무 교육을 통해 배우는 과학적 사고가 환원주의적 사고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과학적 세계관에 익숙한 우리는 모든 것을 환원주의적으로 ‘분석’해서, 즉 ‘쪼개고 나누어서’ 이해하려고 한다. (특히 이과 출신일수록)


대표적인 예로는 생물학이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을 들 수 있겠다.


인간을 유전자와 그 유전자가 만들어내는 단백질로만 움직이는 존재로 설명하려는 것이나,


개인을 과거의 ‘트라우마’나 ‘성적 콤플렉스’, ‘방어기제’ 같은 요소들로 설명하려는 것 말이다.

(사람을 MBTI도 이해하려는 것도 환원주의적 사고의 일종으로 볼 수 있겠다.)


이런 사고방식에 기반하면 인간은 단지 유전적, 환경적 요인에 의해 구성되고 움직이는 생체 기계, 충동 덩어리일 뿐이다.




“전자컴퓨터는 불행하게도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고, 멈추지 않고 비교적 잘 작동한다는 점에서만 인간 마음과 다르다.” 

- 1954년 <빈 신경학 학회지>에서 한 정신과 의사의 언급 -




이러한 환원주의는 복잡한 대상을 연구하고 설명하는 데에 필수적인 사고방식이지만

(과학 기술이 발달한 현대를 살아가는 데엔 반드시 필요한 사고방식이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지 않으려 하는 폐해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환원주의적 사고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많았었다.




“비록 인간이 어떤 것에 의해 조건화되고 결정된다 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 인간은 선택하고 결정하는 존재로서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 빅터 프랭클 -




하지만 ‘의학’ 또한 ‘과학’이므로,


이를 배울 때 또한 환원주의적 사고는 필수적이다.


그렇기에 전 세계의 의료인들이 각자의 분야를 배우는 과정, 


특히 어리고 미숙한 시절일수록,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환자를 ‘생체 기계’로 인식하고


환자나 환자의 아픔을 '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난 감히 단언하곤 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친조부를 담당하던 의사를 속으로 사이코패스라 욕하던 때는 잊고,


카데바를 해부하고 환자들의 고통과 죽음을 겪게 되는 의대생과 인턴시절을 지나며 


인간과 환자를 다르게 인식했다.


환자의 고통이나 죽음에 무뎌진 것이다.


정확히는, 그들의 고통이나 죽음을


‘근무지에서 벌어 나는 일들.’

‘해결해야 할 일들.’

‘절대 일어나선 안되지만 가끔씩은 막을 수 없는 일들.’로 여겼던 것이다.


죽음을 다루는 과를 하기 싫었던 이유도 감정적으로 슬프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단지 ‘위험’했기 때문이다. (타인의 목숨이 관련된 업무이니까)


그렇다고 의사가 환자의 고통이나 죽음에 무뎌지지 않으면 그것도 문제 이긴 하다.


감정 노동을 하는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업무와 감정을 분리하지 않으면 버틸 수도 없거니와


더 중요한 것은 냉철하고 정확해야 할 판단력이 흐려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수술을 하거나 약을 처방하는 등의 의학적인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선


과학적인 논리에 근거하여 판단해야 하므로


그 순간만큼은 환자를 '생체 기계'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친할아버지의 담당이었던 그 의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환자의 죽음을 매번 가족의 죽음처럼 슬퍼했었다면,


그는 할아버지 옆에 서 있을 자격도 얻지 못했거나 잃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환자를 생체 기계로'만' 보는 사고방식은


소위 말하는 짬이 찰수록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경력이 늘어날수록 환자를 생체 기계로만 봤을 때의 문제점들을 겪게 되며


과학을 넘어선 ‘인간’적인 영역에서의 실력 또한 프로라 불리는데 필수불가결함을 알게 된다.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리면서도


환자를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인간’으로 바라보고 대할 수 있는 것,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마음을 동시에 지닐 줄 알게 되는 것 말이다.

(이건 어찌 보면 비단 의료인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의 경우엔 경력뿐만 아니라


환자의 죽음을 ‘근무지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인간이 겪는 3대 비극 중 하나.’로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그건 2년 차 레지던트 때의 일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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