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9호선 맨끝 자리에 기대어 앉은 한 소녀.
두 눈에 깃도는 생기가 다크서클의 그림자를 이긴다.
주섬주섬 꺼낸 책은
영어 단어장.
주황색 수능 단어장을 쥔 손은
새하얗고 야무지다.
분명 내 귀엔 고철과 인간이 앞다투어 낸 소음이 빗발치는데,
소녀를 둘러싼 공기는 고요하고 차분하게 내려앉은 듯 보인다.
마치 보호막에 둘러싸인 다른 세계처럼.
예쁘다.
공간과 시간 속에 짬을 내어
자신의 것에 한껏 집중하는 당신의 모습이, 정말 예뻤다.
초면에 실례인 줄 알면서 5초간 넋을 놓고 바라봤다.
더 보고싶은 욕심을 애써 누르며, 눈꺼풀을 살포시 내려본다.
눈을 감으니 선명하게 떠오르는 빛.
뽀얗게 물든 두 볼,
집중하는 눈빛,
까딱까딱거리는 발 끝이 내는 기운은
맑고 말갛다.
참 어여쁘다.
공부를 해서가 아니라,
성적을 잘 받기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기특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신의 것을 하는 모습, 그 자체만으로.
나의 몫을 묵묵히 하는 모습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이토록 황홀하고 조용한 빛은
한발자국 물러나서야,
건너편 지하철 좌석까지 물러서야,
그제서야 보이나보다.
내가 나일땐 전혀 몰랐는데
나도 이랬을까?
그리고, 난 지금도 이럴까?
작가의 말
: 이 에피소드의 부제는 '한 걸음 물러서서' 입니다 :)
<인상의 잔상>의 첫 에피소드네요. 이 날의 기억은 희미한 잔상으로 남을지라도,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제가 두 눈으로 확인한, 그 아름다움이 저에게도 자연스레 뿜어져나오길 바라며, 인사드립니다. 다음 에피소드로 찾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