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 - 나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통로
작년에 연이은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회사의 성장 가능성을 예의 주시하던 Venture Capital (투자회사)로 부터, 지속적인 투자에 관한 소식이 들려왔다. 한껏 고무된 CEO(Chief Executive Officer) Mike는 약속된 투자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회사 빌드업 작업에 들어갔다.
조직을 더 키우기 위해 각 부서마다 공격적으로 사람들을 더 채용하고 특히 개발팀은 기존의 팀원들을 독려하여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할 수 있도록 새로운 팀들을 더 만들기로 결정했다. 더 커진 개발부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외부에서 명망 있는 인재들을 물색했는데 여러 명의 후보자 가운데 선정된 사람은 Mark라는 Jewish(유대인) 출신의 CTO(Chief Technology Officer)였다.
그가 오면서 큰 틀에서 개발팀 가운데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첫째는, All-Hands Meeting (전체 개발자 회의)이었다. 새로운 기술 트렌드에 대해서 서로 머리를 맞대 의견을 나누고 개발팀마다 선정된 과제를 바탕으로 차례대로 세미나를 진행했다. 매년 Apple, Google, Microsoft 같은 큰 회사들에게서나 봄 직한 움직임들이 회사 내에서 조용하지만 파급력 있게 시작된 것이다.
또 하나는 리더십 역량 강화를 위해 각 팀에서 매니저와 팀장이 주기적으로 함께 모여 외부강사를 통해서 교육을 받았다. 그 과정 중에 하나가 Lion Heart Leadership이라 불리는 교육과정이었다.
막 회사생활에 적응하며 팀원이라는 위치를 고수하기에도 힘겨워하던 나에게 그 모든 활동들은 그들만의 리그였다. 마치 먼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였다.
한 번은 교육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팀장이 볼멘소리를 하며 해야 할 일들은 많은데 왜 이런 소모적인 교육으로 시간을 낭비하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외부강사가 하루 종일 강조한 내용은 결국 한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메일 답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시간에 성의 있게 하라는 것이고 아무리 간단한 메시지 라도 무시하지 말고 반드시 reply(답장) 해야 회사 내에서 성공하는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팀장도 그 이야기를 듣는 나를 포함한 팀원들도 왜 그 당연한 일들이 리더십에 중요한 요인이 되지는 이해할 수 없다며 모두들 고개를 내저으며 의아해했다.
몇 년이 지나서 그 일이 불쑥 다시 기억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시스템을 관리하는 개발부서에서는 그 일의 특성상 수많은 이메일이 오고 간다. 특히 시스템의 성능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에 관해서는 받는 사람과 참고주소까지 더해서 메일을 받는 사람의 수가 계속해서 늘어간다. 보통은 이런저런 이유로 하루에도 수십여 통의 이메일이 편지함에 가득 차곤 한다.
그런 이메일의 홍수 속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메일을 한눈에 보기 좋게 정돈하여 보내는 개발자는 그가 작성한 코드도 마찬가지로 누구나 보기 쉽도록 체계적으로 관리된다는 것이고 또한 나중에 문제가 발생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반면에 이메일을 보낼 때마다 스펠링(spelling)을 틀리거나 무성의하게 보내는 개발자는 이상하리 만치 자주, 코드 안에 숨어있는 버그(bug)로 인해 본인이나 팀전체가 빈번히 힘든 일을 겪곤 했다.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상관관계인데 흥미로운 점은 이메일의 내용뿐 아니라 답장도 보내는 사람의 업무습관을 여지없이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우리 팀에서 함께 일하는 한 안드로이드(Android) 모바일 앱(mobile app) 개발자는 웬만해서는 답장을 잘 안 한다. 한 번은 캐나다에서 일하는 직원이 앱에 문제가 있어서 중요한 일에 차질이 생긴다며 계속 수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1년이 지난 이후에도 해결이 되지 않아 결국 그 직원은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본인이 사용하는 기기를 안드로이드폰에서 아이폰으로 아예 바꿔버리고 말았다.
마치 추리소설 속 셜록홈스가 된 것처럼 이메일을 통해 나름 유추해 낸 내용들이, 이메일을 보낸 사람의 실제 업무습관과 일치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발견하게 된 것처럼 혼자 흐뭇해하곤 했다. 그러다가 문득 누군가도 내가 보내는 이메일을 같은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겸손하게 고개가 숙여졌다.
그때부터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이메일을 보낼 때마다 내용을 주의 깊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메시지도 되도록 이면 예의를 갖추어 답장을 보내고 전체가 잘 정돈되게 보이도록 신경을 썼다. 그저 이메일을 제대로 보내려고 했을 뿐인데 믿을 수 없게도 내 업무 방식 또한 조금씩 내가 보내는 이메일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간단한 이메일 습관이 사람의 삶의 태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도 놀랍다.
성인이 된 우리는 작은 일을 대하는 태도가 더 큰일을 할 때 고스란히 열매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모두 다 잘 알고 있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갈등 속에서 결정한 크고 작은 선택들이 좋은 열매로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