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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당근 Sep 30. 2024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 법

반대편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

Intro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만나게 될 때 두 가지 반응이 존재한다. 하나는 멍청하다며 내려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반대자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다. 하나의 생각만 듣고 그 생각에 갇혀 게토화되는 사람과, 나와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생각의 지평을 확장하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아래의 "배우"라는 단어의 어원을 보면, 우리는 그리스인의 강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적의 관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여기서 오해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적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리스인이 페르시아인이 된다는 소리가 아니다.)





여행, 그리고 두 가지 반응


그래서 과거에는 생각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여행을 시켰다. 특히나 한국적 사고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한국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가장 쉬운 방법이 외국의 다양한 시선을 경험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외국을 경험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하나는 나의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다양한 생각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행의 목적 자체가, 내 생각의 지평을 넘어서서 다른 생각을 듣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위에서 말한 여행의 목적을 바르게 성취한 것이다.


그런데 정반대로 이런 사람이 있다. 한국은 다 틀렸고, 내가 보고 들은 이 나라의 방식이 다 맞다는 거다. 특히나 서양의 나라 하나만 경험한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많았다. 이것은 하나의 갇힌 사고에서 또다른 갇힌 사고로 이동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갇힌 사고가 교정되지 않은 사람은 이렇다. 한국의 시선으로 외국의 모든 것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새로 배운 외국의 시선으로 한국의 모든 것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생각의 지평이 넓어진 것이 아니라, 생각의 지평의 위치만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갇힌 사고에서는 <나와 다른 생각>은 틀린 것이 된다. 즉,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진보 지식인과 새로운 보수


과거, 반대자의 생각을 듣는 것은 진보 진영이 매우 잘했다. 약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 소수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진보의 명제 중 하나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스스로를 진보라고 자처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PC주의 같은 이름 하에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면서 상대방의 주장을 폄훼하거나 듣지 않는 경우가 많다. 메타 네러티브에 대한 비판으로 튀어나온 사람들이, 새로운 메타 네러티브를 주장하며 자승자박에 빠지는 것을 볼 때가 너무 많다.


어쩌다 진보가 이렇게 되었을까, 왜 진보 지식인들이 진보를 떠나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볼 때가 있다. 뭐, 애초에 진보 지식인들이 진보를 떠난 게 아니라, 스스로를 진보라고 이름하는 사람들이 이름만 진보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즉, 진보의 시각으로 세상과 세상의 권위자들을 바라보고 비판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이제 이전의 진보가 새로운 세상의 권위자가 되며 진보의 비판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즉, 진영 논리를 펼치던 진보 진영이 보수가 될 때, 진보 지식인이 이러한 진보 진영을 바라보면 새로운 보수로 보이는 것이다. 즉, 진보 지식인의 눈에는 <이전의 보수>와 <새로운 보수>만 있을 뿐이다. 오히려 어떤 진보 지식인에게는 권위를 잃어버린 <이전의 보수>가 <새로운 보수>를 물리치는 동맹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진영 논리에 갇혀서 타 진영의 논리에는 눈과 귀를 닫아버리는 <진보 진영:새로운 보수>는 진보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약자의 목소리를 듣고 소수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진보의 명제라고 했을 때, PC주의가 주도권을 가질 경우 이때 발생하는 새로운 약자, 새로운 소수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진보이다. 그러니까 자기 진영의 목소리, 일방의 목소리만 들린다면 이것은 진보의 이름을 쓴 새로운 보수가 되는 것이다. 즉, 진정한 진보의 성격이 "PC주의"와 같은 하는 한 시대의 시대 정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약자와 소수자의 의견을 듣는 것이라고 한다면, 진보 지식인들이 현재의 진보 진영에 회의를 느끼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진보 진영이 광신도 집단처럼 되어가는 모습에질색하는 진보 지식인들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보수의 모습은 위에서 말한 여행의 예와 비슷하다. 진보 지식인들은 <한 나라의 관점>에서 다양한 나라의 관점을 볼 수 있는 <지평의 확장을 경험>했다. 이러한 진보 지식인들의 눈에 <과거의 보수>와 <진보 진영:새로운 보수>는 나라만 다르지 똑같이 자기 나라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반 젠더 이론을 비난하는 사람


아래의 링크에는 젠더 개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보면 다음과 같다.


젠더 이념 Gender Ideology

젠더 이념이 있다. 젠더 이념이란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젠더는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남자(sex)가 스스로를 여자(gender)로 바라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섹스는 신체적인 것이고, 젠더는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 중에 하나가 트랜스젠더이다. 트랜스젠더의 생각을 들어보자. 그들은 스스로의 성별(sex)을 뭐라고 생각할까? 성 정체성(gender)만 여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생각이 제대로 박힌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신체가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기에 자신의 섹스(sex)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상당수는 스스로의 몸(sex)이 여자라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젠더 이론을 지지하는 논문들조차 성과 젠더를 구분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말하는 거다.





반 젠더 운동 Anti-gender Movement

그리고 반 젠더 운동이 존재한다. 위와 같은 젠더 이론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 즉, 성(sex)과 젠더(gender)의 구분을 반대한다.


젠더 이념과 반 젠더 운동 중에 무엇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반 젠더 이론이라는 게 존재하고, 생각보다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설득력이 약할 수는 있지만, "내 이론만 올바르고 상대방의 이론은 멍청해"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 사람의 시선이 불균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우리는 양쪽의 의견을 들어보고 무엇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살펴봐야 하는데, 상대방의 입장을 들어보지 않고 그냥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과 젠더를 구분하는 것의 장점이 존재한다. 반대로 성과 젠더를 구분할 경우 생기는 다양한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과 젠더의 구분을 반대하는 사람과 찬성하는 사람의 설득력 있는 의견 모두를 들을 수 있다.




확증 편향


개인적으로 나는 어떤 사안에 있어서 다양한 매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뭐, 사실상 이게 과거의 어른들이 우리에게 이야기했던 내용이었다. 신문을 보되, 다양한 관점의 신문을 보라고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튜브가 언론보다 낫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들으면, 생각이 너무 과거로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유튜브와 같은 매체들이 일으키는 확증편향에 대한 이야기들이 너무 오래 전에 논의가 끝났기 때문이다.


확증편향에 대한 비판은 이미 유튜브, 넷플릭스 등의 다양한 매체에서 다루었기에 더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겠다. 다만, 유튜브와 같이 알고리즘으로 확증편향을 일으키는 미디어들은 내 생각의 지평을 확장시키지 않고 반대로 게토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생각의 균형을 잡는 법


그렇다면 어떻게 내 생각의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정치의 예를 들면, 다양한 언론사의 글을 읽는 것이 좋다. 특히나 내 생각과 반대편의 의견을 듣는 게 매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어떠한 것을 옹호하고 싶을 때, 그에 대한 비판자의 시각을 참조하는 게 도움이 된다. 그 예 중에 하나가 아래의 링크이다.


젠더와 성의 구별을 부정하는 것을 지적으로 불성실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상식적이라면 젠더와 성의 구별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래의 링크를 보면, 젠더와 성의 구별을 옹호하는 사람이 그것을 반대하는 세력의 존재를 (비판할지라도) 증명해준다.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우리는 반대편의 목소리를 통해, "반 젠더 운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다. 즉, 젠더 이념이 지적으로 당연한 게 아니라 최소한 논쟁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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