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주의도 신앙이다
토론을 할 때에 우리는 신앙과 신념을 구분하여 대화를 한다. 무엇보다도 각자가 가진 신앙은 토론과 대화를 하는 것에 있어 성역과 마찬가자이며, 이것을 건드리는 것은 싸우자는 것과 똑같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종교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전제가 무엇인지, 다시 말해 자신의 신앙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안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스스로를 합리주의자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개 자기 생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대화 예의를 무시한다는 점이다.
일단, 합리주의자가 타종교와 대화를 하고 싶다면 기본적으로 합리주의와 합리성이 무엇인지부터 이해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우 무식한 방식으로 "나는 합리적인데 너는 비합리적이다"라는 소리를 하게 된다. 그런데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나는 무식해서 합리주의를 합리적이라고 생각해"라고 들릴 뿐이다. 그러니까 합리주의와 합리성을 구분하지 못하는 거다.
합리주의와 합리성에 대한 구분은 조금만 생각을 해봤다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의 기본적인 개념이다.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꼭 한 번은 나오는 주제이기도 하다.
보통 합리주의자는 "너네 종교는 순환논법을 펼치고 있어"라면서 "나는 안 그래"라는 자세를 취한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사실은, 누구나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전제가 신앙이 되며, 결국 이 위에 세워진 세계관으로 순환논법을 펼칠 수밖에 없다. 아래의 대화를 보자.
A: 모든 종교는 순환 논리에 기반하고 있어.
B: 합리주의도 마찬가지야.
A: 정말? 왜 그렇게 생각해?
B: 합리주의는 이성이 지식의 궁극적 원천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어. 그런데 이 전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성 자체를 사용하니, 이는 순환 논리야. 종교도 자신의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교리 자체를 사용하니, 둘 다 비슷한 면이 있어.
합리주의는 합리주의라는 전제 위에서 순환 논법을 펼친다. 그리고 합리주의가 틀릴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한다면, 합리주의는 신앙이 된다. 합리주의라는 신앙만 맞고 종교를 가진 다른 사람들은 다 멍청하다는 독단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는 거다.
(이게 철학하기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합리주의가 <이성을 신앙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배타성을 비판하는 다원주의가 <다원주의만을 배타적으로 주장>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 말이다.)
아무튼, 합리주의는 이성을 지식의 궁극적 원천으로 간주하는 철학적 입장으로, 이성에 대한 신앙으로 볼 수 있다.
다시 토론과 대화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대화하기의 즐거움 중 하나는 서로가 가진 전제가 무엇인지, 즉 서로의 신앙과 신념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념은 수정이 가능하겠지만, 상대방 세계관의 전제 중의 전제가 되는 신앙은 바꾸는 게 쉽지 않다.
이번 대화에서 나눈 것처럼, 이성에 대한 신앙을 가진 합리주의자와 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각기 다른 전제를 가지고 있다. 합리주의자는 이성이 진리 탐구의 최선의 도구라는 전제를, 종교인은 신앙이 진리의 근원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전제들은 각자의 세계관을 형성하며, 서로 다른 전제를 가진 사람들이 대화할 때 상대방의 전제를 비난하거나 무시하면 생산적인 토론이 어려워진다. 따라서 상대방의 전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합리주의자와 대화하는 게 어려운 이유가 나온다. 자기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합리주의자들이 매우 배타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무식하다고 보는 것이다. 합리주의라고 하는 자기 세계관에 갇혀서 순환논법을 펼치는데.. 보고 있으면 이것은 정말 안타깝기 그지 없을 때가 많다. (이것에 대한 실례는 위에 걸려 있는 링크를 참조하자.)
아무튼 신앙은 개인의 정체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어 이를 비난하면 감정적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 또한, 신앙의 전제를 부정하는 것은 상대방의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 건설적인 대화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예의가 있다면 상대방의 신앙과 신념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인정해주는 대화 매너를 지킬 수 있다.
그런데 이 대화를 위해 합리주의자가 해야 할 것은, (합리주의라고 하는) 자신의 신앙과 전제가 여러 가지 신앙과 전제 중에 하나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즉, 자기 입장만 옳다며 독단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합리주의와 합리성을 구분하고 다른 종교도 합리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게 어려울 수 있지만, 세계 시민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