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우연히 이웃님의 블로그글을 읽다 검마사님이 챌린지를 모집한다는 글을 보았다. 아무런 계획도, 생각도 없이 주저없이 신청을 했다. 아마 일상에 찌들어 지쳐 있었던것 같다. 그래서 탈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나이듦이란 물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 같은 삶이었다. 물의 중력을 이겨내고 어떤 깊이의 물에서나 자유롭게 유영하는 그런 물고기의 삶같은거 말이다. 어떤 고난이 와도 척척 내면의 힘과 그동안 쌓아온 경륜으로 잘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왔지만, 고난은 매번 새롭다. 사람에 대한 고민도 더이상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다르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초식의 사람을 접하게 된다. 기존의 틀로는 해석되거나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이 계속 내 앞에 등장한다.
젊은 시절에는 나이가 들면 삶에 대한 고민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이 없을 줄 알았다. 젊어서 충분히 고민하고 경험하고 겪어내면 매에 단련되듯이 덜 아프고 덜 힘들 줄 알았다. 근데 나이를 한살 두살 더 먹어도 인간관계는 항상 어렵고, 삶은 여전히 나에게 숙제를 내준다. 젊어서 해야 할 사람의 도리나 역할이 있었다면 나이가 든 시니어들의 도리가 역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구분이 스스로 명확하게 설정되지가 않는것 같다. 삶의 도리가 역할 또는 고민이라고 하는 것이 나이대에 따라 딱 구분되는게 아니라 스스로 어떠한 삶을 살지에 대한 고민과 많이 연결되기에 그럴 것이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젊은이의 패기와 열정이 남아있고, 다른 한 구석에는 내려 놓음으로써 생기는 여유가 있고 또 다른 한 구석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하고 싶은 생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있다. 그런가하면 여전히 마음 저 구석에는 돌봐주어야할 내가 있기도 하다.
아직도 누군가 던진 한 마디에 기분이 좌우되고, 누군가의 인상 찌뿌린 얼굴을 보면 한 나절동안 전전긍긍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여전히 남은 삶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야 하냐에 대한 고민은 평행선처럼 남아있다.
유아기니 청소년기니 장년기, 노년기로 구분하는 것이 생물학적 구분이라면, 삶은 그 구분안으로 집어 넣기엔 매우 복잡해서 설명되지 않는게 더 많은 것 같다. 한 두개의 구간으로 설명되거나 이해되지 않는 면이 더 많기에 차라리 무슨 무슨 기로 일반화하려기 보다는 그냥 누구 누구의 어떤 삶으로 특징짓는게 더 맞는 것 같다.
니체의 말이다.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면, 외로움은 괴로움이 된다.어울리려고 애쓰지 마라. 인생은 행복은 친구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만족에서 나온다"
나이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외부의 시선이나 평가에 기준을 둔다면 외롭고 괴로운 삶을 살게되지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기준을 둔다면 스스로 사랑하고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100일간의 챌린지 동안 나의 목표는 하루에 2개의 글을 쓰는 것이다. 하나는 일상적인 글을 쓰려고 하고 또 하나는 책 리뷰를 할 생각이다. 나에게 글쓰기는 정말 내가 나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잠시 흔들렸던 일상에서 탈피하고 자 자신에게로 무게 중심을 옮기기 위해 챌린지에 열심히 참여해볼 생각이다. 100일 후에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모습으로 어떤 지점에 가 있을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