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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작가 나혜옥 Sep 30. 2024

당신의 사랑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4주기 위령미사를 드리고

"엄마 오늘이 아버지 제삿날이야, 

돌아가신지 벌써 4년이 됐어" 

아침 식사를 마친 엄마에게 오늘은 금요일이고  아버지 위령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간다고 말했다.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엄마에게 귀가 어두워 못 들으셨나 싶어,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짤막한 엄마의 대답에서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가 없다. 

58년을 함께 살았던 아버지의 흔적을 엄마의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엄마는 아버지를 잊은 걸까? 

지워버린 걸까? 

 나는 가끔 엄마에게 아버지랑 처음 결혼했을 때  

어땠는지 물어본다. 엄마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때는 좋았다고, 수줍은 새색시가 되어 멍한 눈이 허공을 헤맨다. 

 엄마는 큰 키에 허우대가 좋은 아버지가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시집살이시킬 시어머니가  

없어서 좋았다고 한다. 옆에 사는 사촌 올케가 시집살이 당하는 걸 보고, 시어머니 없는 대로 시집을 가야지 마음을 먹었던 차에, 전쟁고아인 아버지의 콤플렉스는 오히려 엄마에게 딱 맞는 결혼 조건이 됐다. 큰외삼촌이 고아라고 반대를 심하게 했어도, 엄마는 아버지를 선택했다.      

 5남매 중 셋째인 엄마는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이듬해에 9살로 온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외할아버지는 얼마 안 가 병을 얻어 돌아가시고,  살길이 막막했던 외할머니는 재가를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재가해서 낳은 성이 다른 동생을, 10살 조금 넘은 나이에 업어 키웠다. 

 엄마는 지금도 "어린 나이에 동생을 업어 키워서 허리가 아픈 거"라고, 사랑받지 못해 서러웠던 어린 시절을 자주 이야기했다. 

 엄마는 일본에서 국민학교 2학년 다니다 만 것이 최종학력이다. 배우지 못했다는 게 늘 엄마를 주눅 들게 했다. 새아버지의 학대와 무학의 설움에서 벗어나 피난처가 되어준 것이 결혼이었다. 월세방에 끼니가 없어도 아버지의 사랑으로  배고픈 줄 몰랐고, 군불을 땔 땔감이 없어 냉골에 누웠어도 추운 줄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알콩달콩한 신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난이 대문 열고 들어오면 사랑이 창문으로 나간다는 말처럼 사랑이 떠난 자리에 싸움이 찾아왔다.  엄마는 배우지 못했어도 머리가 좋았고,  사리 분별을 잘했다. 성격 급한 아버지와 까다로운 엄마는 어느 쪽도 참는 법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 엄마가 서로 다른 짝을 만났더라면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타고나길 급한 성격의 아버지는 성실하고 부지런했으니, 느긋하고 털털한 여자를 만났으면 좋았고, 까다롭고 깔끔한 엄마는 늘 청결하고 검소했으니 품 넓어 엄마를 품어줄 남자를 만났으면 싸우지 않고 오순도순 사는 해피엔딩이 되지 않았을까. 

 엄마는 어린 나이에 겪은 아버지의 부재, 전쟁의 상흔, 가난과 무학으로 당한 모멸감이 엄마의 저 깊은 곳에 꼭꼭 숨었다가 여든 해가 되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엄마는 누르고 눌렀던 모든 상처들을 아버지 여든셋 생일날 잔칫상 앞에서 쏟아냈다. 잔칫집 분위기는 삽시간에 초상집 분위기로 바뀌었다. 

누구도 엄마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엄마를 모시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면서 검사도 받고 치료도 받았다.  

엄마는 나에게 늘 보기도 아까운 딸이라고 말했고, 그 어려운 시절, 딸인 내가 있어서 살 수 있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던 엄마가 눈에서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오는 눈빛이 발사되고,  괴력에 가까운 힘이 나와서 감당할 수가 없었다. 

 전립선암 말기인 아버지는 5년의 투병 동안, 젊은 시절 엄마를 억누른 만큼 엄마에게서 억눌림을 당했다. 엄마는 고장 난 카세트 테이프처럼 한 맺힌 마음을 지치지도 않고 말하고 또 말했다. 

 끓어올랐던 용암은 바닥을 보이고 5년이 지난 지금 엄마는 더 이상 옛날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나는 엄마의 멍한 눈이 허공을 헤맬 때면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다. 

 "엄마 아버지 보고 싶어?“ 

 "네 아버지 잔소리 지긋지긋해서 잔소리꾼 없어지면 좋을 줄 알았는데...” 

말끝을 흐리는 엄마의 눈은 또 허공을 헤맨다. 

엄마는 이제야 잔소리꾼 아버지가 딸보다 낫다는 걸 아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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