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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 am as I am May 20. 2024

11 술 당긴다. 술 한잔 할래?


우리 집 식구들은 술을 마시면 두 가지 부류로 명확하게 나뉜다. 한 부류는 한 모금에 얼굴색이 빨간 딸기가 되었다가 세 모금 째에 블루베리가 되어 버리는데 술을 못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블루베리 얼굴을 마주하고 술을 마시면 마주하고 있는 나는 왠지 모르게 나쁜 짓을 꼬드기는 악당이 된 것 같아서 “그만 마셔. 너 얼굴이 블루베리야.” 만류를 하게 된다. 다른 부류는 술을 양껏 마셔도 마셔도 얼굴색뿐만 아니라 눈빛, 말투마저 눈에 띄는 큰 변화가 없다. 때때로 술 주종에 따라서, 기분에 따라서 약간의 혀 늘어짐이나 눈물을 흘리거나 말이 많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리 많지는 않다. 나는 두 부류 중 후자에 속한다. 회사생활 회식 자리에서 때로는 전자의 친구들이 부러웠던 적도 있었다. 얼굴이 시뻘건 사람은 조금만 마셔도 많이 마신 것 같아서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큰 변화가 없던 나는 남들의 속도에 나름 열심히 맞춰가면서 마셨음에도 “왜 술을 안 마셔?”라는 말을 줄곧 들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비즈니스나 수줍은 연애의 시초가 마련되기도 하니 어떤 자리에서는 얼굴색 변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소주 한 병 정도는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좋기도 했다. 자리마다 누구와 함께 어떤 날 마시느냐에 따라서 술이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밍밍하기도 하다. 알코올 도수 16.5도의 똑같은 ‘처음처럼’인데 어떻게 매번 다른 맛이 날까? 너무 신기하지 않은가. “술이 달다.”라는 말에는 양극의 감정이 존재하는 것 같다. 술이 달게 느껴질 정도로 오늘 기분이 좋다는 말이기도 하면서, 술이 달게 느껴질 정도로 오늘이 고단했다는 말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유독 술이 쓰게 느껴지는 날에는 “오늘 술 안 받네.”라고 말한다. 술로도 씻겨 내려가지 않은 묵직한 찌꺼기들이 머리나 가슴에 콱 막혀 있거나, 단순하게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찌르듯 역하게 느껴질 정도로 몸이나 마음이 노곤한 날들이 그러했던 것 같다. 술이 마법을 부리는 것 같다. 16.5도가 25도가 되었다가 0도까지 내려가기도 하니 말이다. 술의 맛과 그날의 감정 또는 컨디션과의 상관관계 연구가 있다면 찾아보고 싶다. 


오늘은 술이 당겼다. 술이 당기는 날들은 언제인가? 좌뇌의 이성적인 기능을 집중적으로 소모한 날에는 이성의 팽팽했던 긴장감을 풀어헤치고 느슨한 채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떠들고 싶을 때 술을 찾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거나 혹은 그냥 습관적으로 한 주 고생의 끝인 금요일 밤엔 술이지! 하면서 자기 보상의 도구로서 술을 찾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술 한잔 할래?”라고 말할 수 있는 편한 상대가 줄어들기도 하고, 시끌벅적한 장소에 가서 마시고 늦은 밤 비틀거리며 귀가하는 것이 썩 내키지도 않게 되자 이제는 집술을 선호하게 되었고 가족들과 술을 마시는 빈도가 예전보다 늘어났다. 한 명은 블루베리 얼굴로, 한 명은 딸기 얼굴로, 한 명은 수다쟁이로, 한 명은 눈물바다가 되어 식탁에 모여 앉아 맛있는 안주들과 술을 마시면서 일, 사랑, 인생, 관계, 엉뚱한 헛소리들까지 다채로운 주제들로 소란스럽게 공간을 가득 메운다. 

적당한 술은 삶 속에서 ‘나’라는 주파수 대역을 높이기도 낮추기도 한다. 내가 가보지 못했던 나의 주파수에 닿는 것은 색다른 모험이기도 하다. 술 없이도 만날 수 있는 나도 있겠지만, 때로는 술이 다른 나들과의 거리를 좁혀 주고, 우연한 만남을 주선하기도 한다. 물론, 지나친 음주로 내 안에 존재하는 모든 나를 다 만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정도의 나를 만나는 것만으로 충분히 다채롭고 재미난 일이다. 짙은 나들은 경계하는 편이 좋다. 가끔은 나 조차도 감당할 수 없어서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창으로 세차게 들어오는 햇빛에 몸을 반쯤 기대어 놓고 샴페인 한잔을 했다. 낮술은 한잔에도 취기가 확 올라온다. 햇빛에 반쯤 걸려 있는 몸의 일부가 알코올에 적시어져 금세 활활 타버릴 것 같다. 나는 ‘나’라는 한 인간이라는 객체에 무수히 많은 ‘나’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 모든 나들의 총합이 우주이며, 나의 우주를 내 안에서 그리고 내 밖으로 체험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우주 체험은 오늘도 계속되었다.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샴페인과 함께. 오늘이 만족스럽다. 


“나는 그렇게 오나전 나체로 고독하게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도 가엾고 약한 개에 불과합니다. 약간의 따스함과 먹이를 필요로 하고, 때때로 자기의 동료가 가까이에 있는 것을 느끼고 싶어 하는.... 자기의 운명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동료를 이미 가질 수 없게 되고 완전히 혼자 있으며, 차가운 세계의 공간만을 자기 주변에 갖게 됩니다.”

_헤르만 헤세 <데미안>_


#나는나인데 #IamasIam #LightyourLight #술한잔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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