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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 am as I am May 30. 2024

20. 커서 무엇이 될래? 고정된 꿈을 붙잡고 있지 마


초등학교 전까지는 딱히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가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반면에, 언니는 6살 때부터 미술 전문 유치원을 다니면서 "나는 커서 화가가 될 거야."라고 어린 꼬마의 입에서 엄청난 확신에 찬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본인이 그린 그림을 자랑하곤 했었다. 실제로도  언니는 그림에 재능이 있어 보였다. 그런 언니를 보면서 꿈이 없었던 나는 신기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약간의 질투심도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음악 학원을 다니면서 피아노 치는 것에 큰 재미를 느끼게 되었고, 주변에서 어른들이 잘한다 하니까 그제야 '나는 커서 피아니스트가 될 거야!'라는 첫 꿈이 생겨 났었다. 첫 꿈이 생겼다는 뿌듯함에 더 열심히 피아노를 쳤다. 남들보다 더 빨리 체르니 30을 떼고 40, 50까지 빠른 속도로 피아노를 배웠다. 학원을 마치고 집에 와서도 연습을 하고 친척들이 집에 오시는 날에는 한껏 어깨에 힘을 주고 피아노 앞에서 멋들어지게 연주를 해 보였다. 문득 그때의 나를 회상해 보니 귀엽게 느껴진다. 그러다가, 음악 분야로 빠지는 것을 우려하셨던 아빠의 반대로 인해 나는 첫 꿈을 하루 만에 접었다. 그 이후로는 피아노 앞에 앉지 않았다. 고집스러운 아빠와 고집스러운 딸의 모습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다른 꿈을 꾸게 되었다. '나는 커서 판사가 될 거야!' 세상에 나쁜 사람들은 벌을 받아야 한다면서, 벌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 '정의로움'에 불끈!! 하는 시기가 한 번쯤 있지 않는가? 초등학교 때 학급에서 덩치 좋고 폭력을 휘두르며 키 작고 힘 약해 보이는 남자아이들을 괴롭히는 남자 애들이 있었다. 남자들끼리 싸움 한판이 붙으면 어찌나 무서웠던지... 책상이고 의자로 창문 밖으로 집어던지고 둘 중 한 명은 피투성이가 되어야 싸움이 끝났다. 선생님들이 뒤늦게 오셔서 상황은 정리되고 싸움을 일으킨 주동자들은 일주일 내내 복도에서 벌을 서거나 몽둥이로 엉덩이와 종아리를 체벌하셨었다. 한창 그런 성장기에 벌어지는 싸움들을 목격하다 보니 '판사'라는 꿈을 꾸었던 것 같다. 게다가 어머니의 참 교육에 따라 학급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을 종종 남들 몰래 도와주었다. 어머니가 남들 앞에서 주면 그 친구가 창피할 수 있으니 남들 안 볼 때 몰래 주라고 당부를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한 일들이 쌓이니 선생님들이 어찌 아시고는 늘 나에게 봉사상을 쥐어 주셨다. 솔직히 말해서 나보다는 어머니가 타야 할 상인 것 같았다. 그래서, 봉사상을 타면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서는 수학 학원을 다니면서 수학이라는 과목에 빠져들었다. 살짝 미쳤었다는 표현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수학 학원 원장 선생님의 가르치는 방식이 암기가 아니라 응용이었는데, 그러한 학습 방식이 나에게 잘 맞았던 것 같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이해가 가지 않거나 틀린 문제에 대해서 남아서 원장 선생님을 붙잡고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그럴 때면, 친절하게 풀이 과정을 설명해 주셨다. 그렇게 한동안은 수학에 빠져서 수학 경시대회에 나가서 대상도 받아 보고 (솔직히, 내가 대상까지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 해에 그 경시대회 경쟁이 저조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나름의 수학 전성기를 누렸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1학년때까지는 공부가 재미있었다. 2학년이 올라가면서 대학교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고 나는 공부에 흥미를 조금씩 잃어갔다. 그때는 목표가 대학교라는 것이 싫었던 것 같다. 담임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나를 앉혀 두고 조심스럽게 "요즘 무슨 일 있어? 너 연애하니?"라는 질문을 하셨다. 좋았던 성적이 갑자기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계기가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셨다. 연애는 아니었다. 나는 이유 없이 "저는 아무 대학교나 갈래요. 수능 공부하기 싫고요. 내신으로 아무 데나 가게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수시 내신으로 대학교를 지원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담임 선생님도 표정은 나의 마음을 더 알고 싶다는 눈치였지만, 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선생님도 굳이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선생님은 나의 내신을 위해 전교에서 1명만 가능한 교장 추천을 위해 적극적으로 애써 주셨다. 감사하였다. (문득, 3학년 담임 선생님이 뵙고 싶어 진다.)


20대, 성인이 되었다. 드디어 자유가 왔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내가 선생님이 되기를 바라셨었다. 그런데 나는 죽어도 선생님은 되기 싫다고 우겼다. 그 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았다. 취미로 가게 되었던 화실에서 그림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는데 예술적 감각과 자유로운 영혼이 내재된 사람들과 어울리며 평일 저녁과 주말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 멋에 하나 되어 나도 예술가가 되어야겠다 생각했다. 나의 그림 재주를 보며 그들이 "네가 꼭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해주니 더 신이 났다. 그래서, 전공을 바꿔야 하나 싶어서 부모님께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 보았으나 예술가의 길만큼은 반대하셨다. 한동안은 슬픔에 잠겨 있었지만 '너무 하고 싶었던 일도 업이 되면 하기 싫어진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은 취미로 하는 게 좋다.'는 흔히들 하는 말에 기대어 나는 다른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도 '창의적인' 것은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핵심 가치였었다. 그래서 나의 전공과 창의적인 것을 조합하여 '마케팅'을 선택하게 되었다. 대학 친구들이 전공을 살려 금융권으로 빠질 때 나만 마케팅을 선택했다. 


첫 직장부터 나의 선택에 대한 만족감이 꽤나 높았다. 운 좋게 내가 원하던 마케팅을 아주 전문적으로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업에 취업을 하기도 했고 '창의적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잘 적응하고 재미를 붙이며 회사를 다녔는데, 대체로 나는 하나를 할 때 또 다른 활동을 벌이는 편이었다. 퇴근 후 디자인 리서치 교육 프로그램을 들으러 홍대를 갔다. 디자인 전공도 아닌 내가 그 집단에 끼어서 실무 디자이너들과 대학교 디자인 학과 교수님들로부터 수업을 받는데 책, 영화, 철학 전 분야를 넘나 들며 말씀해 주시는 내용들이 자연과학을 전공한 나에게 엄청난 임팩트를 주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 집단을 팔로잉했다. 교수님이 언급한 영화를 집에 와서 봤고, 교수님이 언급한 책을 읽었다. 디자인 리서치 교육 프로그램은 최종적으로 각자 도시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비주얼 적인 재해석을 통해 개인 작품을 내놓는 형태였고, 나는 햇빛과 도시와의 관계에 대한 결과물로 마지막 전시에 참여하였다. 이 수업을 통해서 나는 '창의적인' 가치에서 '통합적인' 가치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전 분야를 아우르는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찾아냈던 것이 '인지과학' 분야였다. 


첫 직장에서 2년간 번 돈을 가지고 친구의 말 한마디에 영향을 받아서 영국으로 떠났다. 영어 어학연수가 목적이었지만, 온 김에 '인지과학' 분야로 유학을 할까 싶어서 한동안 그 키워드를 구글링을 엄청나게 했었다. 영국에 있으면서 나처럼 단기 어학연수가 아닌 유학 중인 친구들을 사귀게 되면서 상상만 했었던 유학에 대해서 현실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고 몇몇 곳에 가서 직접 상담도 받고 컨설팅을 받아서 지원서를 내놓기도 해 보았다. 뒷일은 뒷일이고 무작정하고 달려들었어요 했는데 한편에 있었던 두려움으로 인해 한 때의 도전으로 끝이 났다. 자연스럽게 돈이 떨어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직장은 그 이후로 시작되었다. 마케팅이었다. '창의적인' 가치에서 '통합적인' 가치로 이동하면서 마케팅이라는 하나의 분야를 세부적으로 쪼개 놓고 팀을 분리해 놓은 조직의 구조가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마케팅실에는 최소 3개의 팀이 존재했다. 마케팅이라는 전체를 놓고 경험하고 실행하고 퍼포먼스를 만들어 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마케팅의 시대적 흐름에 따라서 이 팀에서 저 팀으로 이동하며 외국계, 대기업, 중소기업, 스타트업 등 다양한 규모의 회사를 경험하였고 여러 팀을 리딩 할 수 있는 리더가 되었다. 


그렇게 나이 사십을 넘어와서 중년을 맞이하고 있는 나는 꿈과 현실을 오고 가며 지나온 반생을 되돌아본다. “무엇이 되고 싶어?”라는 말이 얼마나 별것 아닌 것인지. 꿈이라는 것은 계속 변화하는 무엇이라는 것을. 아직까지도 나는 정해진 꿈 없이 생겨나는 꿈들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반드시!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 나라는 존재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어 두지 말자. 짙은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나 다운 것은 아니다. 나 다운 것은 그때그때 선택의 순간에 내가 중심이면 되는 것이다. 오늘은 화려한 네온 색깔의 옷이 입고 싶어도 내일은 모노톤의 짙은 회색의 옷이 입고 싶을 수도 있다. 오늘은 매운 것이 먹고 싶어도 내일은 싱거운 것이 먹고 싶을 수도 있다. 인생에 답을 정해 놓고 살지 말자. 인생에 중요하다고 여기었던 가치관도 어느 순간에는 선택하지 못하는 때가 오기도 하고, 더 중요한 가치가 생겨나기도 하고, 하찮아지기도 한다. 변화해 가는 인생의 강에서 변화를 하지 않고 요지부동으로 고집스럽게 자기 자리를 꿰차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다면 물살에 깎이어 형체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나를 지키려다가 나를 잃어버리는 꼴 아니던가. 어린 날부터 장래희망이 무엇이었는지,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 적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나는 어떤 강을 선택하며 살아왔는가? 앞으로 나는 강을 건널 것인가? 현재의 강에서 조금 더 흘러갈 볼 것인가? 꿈을 변화시켜 보자. 



“아, 토르발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나 자신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사람들은 그것을 자유라고 부르죠. 그리고 이제 나는 그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어요.”

_헨리크 입센 <인형의 집>_


#나는나인데 #IamasIam #LightyouLight #꿈 #장래희망 #미래 #변화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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