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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Nov 04. 2024

모든 것을 품는 순수한 사랑  

박경리의 <푸른 운하>를 읽고

엄마의 사랑이야기가 이랬을까? 아니 그보다 더 옛날이니 엄마의 이모, 삼촌 뻘의 사랑이야기겠다. 종묘 근처, 지하철 일호선 노약자석, 홍제동 시장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겠다. 굽은 허리에 주름진 얼굴과 손등에 피어난 검버섯, 조금은 지쳐있는 표정에서 정신과 육신의 열정이 넘치고 사회 부조리에 항거하며 사랑에 눈이 멀어 온몸을 내던지는 시간이 그분들에게 있었다는 것이 잘 상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박경리의 <푸른 운하>를 읽고서 언제 이야기일까 되새기다 보니, 당연하지만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그분들의 젊은 시절을 알아가게 되었다. 그 시대가 지금을 받치고 있구나, 지나간 사실이지만 상상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무언가를 몰래 엿보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다산북스 챌린지의 마지막 책인 <푸른 은하>의 리뷰를 드디어 쓴다. 읽기는 다 읽었는데, 챌린지에서 요구한 날짜가 있다 보니 그날까지 리뷰를 하루하루 미루고 있었다. 책을 단번에 읽기 힘든 이들이 조금씩이라도 매일 독서하는 습관을 기르기에는 다산북스 챌린지가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매일 정해진 분량을 조금씩 읽어내는 챌린지는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이다음에 은경이는 이치윤을 찾아가는 거야? 박지태는 순순히 떠나는 거야? 경란은 이제 어떤 계략을 세울까? 같은 궁금증에 정해진 분량만 읽고 책을 덮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내 속도대로 읽어버렸고, 매일 아침 한 문장을 기록해 두는 챌린지 미션을 종종 놓쳤다. 원하는 만큼 읽어버리고 싶은 기분과 챌린지에서 정해준 속도대로 읽어야 하는 규칙(혹은 읽은 것처럼 인상 깊은 한 줄을 규칙적으로 남기는 것) 사이에 조금 고민하다, 그냥 기분을 따르기로 했다. 그냥 이 책은 그러는 게 좋겠다 싶었다. 


소설은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하는 20살 은경이 엄마의 친구인 찬희 이모집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남미가 은경의 사투리를 따라 하고 놀리고 무시하는 장면에서 부산 집을 떠나 대학 기숙사로 왔던 나의 옛날이 생각났다. 그땐 사투리가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주변에 남미 같은 사람은 없었지만, 내 말투가 혼자 도드라지는 게 싫었다.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게 싫었고, 그들의 말을 반대로 내가 못 알아듣는 게 싫었다. 그래서 무작정 친구들의 말투를 따라 했고, 한동안은 충청도와 전라도와 경상도가 다 섞인 이상한 말투가 되기도 했었다. 사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부산에 살던 시절에는 내가 쓰는 부산말이 표준어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같은 학교 친구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9시 뉴스 같은데에서 '부산, 30세, 이 모 씨' 같은 자막으로 인터뷰한 영상이 나올 때면, "으엑, 저 사람 말투 왜 저래." 라며 이해하지 못했었다. 방송에는 꼭 이상한 말투를 쓰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우연이 자주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서울에 와보니 그 말투가 내 말투였던 거다. 그러니 부산 사투리 좀 써보라는 짓궂은 친구나 선배 장난이 얄미워 못 들은 척 넘기기도 했었다. 그런 점 때문에 은경의 시선과 생각에 쉽게 동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은경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아이 딸린 이혼남에 전처에 대한 미련을 거두지 못하는 이치윤을 완전히 사랑하게 된다는 전개. 글쎄, 철없고 그저 열정적이던 20살이라면 그게 가능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바라보고 있는 상대의 절반은 다른 여자에게 가 있다는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듯하다. 애정의 상대가 소유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사람의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온전히 나와 함께 하기를, 나의 그늘에 있기를, 또한 그의 그늘에서 내가 안정을 느끼기를 바라는 편이니까. 절반이라도 내 것으로 해야겠다 라거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앗아야지 같은 순수는 나같이 용기 없는 사람에게는 부족한 것이다. 혹시라도 남은 절반이라도 가졌다가 빼앗길까 봐, 덤벼들었다가 도리어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설까 봐, 그게 무서운 것 같다. 이기는 게임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덤벼들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이라. 그래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오롯이 집중하는 은경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했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은경이 이치윤을 찾아가는 장면은 '굳이 왜?'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가, '그런 열정이 있다니 부럽다.'로 넘어갔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니까. 그런 순수한 열정도 있는 거구나 라며 관찰하듯 이 소설을 읽었다. 그러다 저렇게 누군가에게 몰입할 수 있는 사랑이 부러웠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감정에 충실한, 결혼이라는 제도도 중요하지 않고 그저 사랑하는 마음만이 중요하다는 은경의 말이 너무 부러웠다. 주변의 눈치도 보지 않고 조건도 보지 않고 그저 마음만을 따라갈 수 있다는 그 말은 지극히 환상적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 상대인 이치윤은 답답하고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건 소설이니까. 은경의 사랑이 더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장치이기도 할 테니. 물론 이 소설에 은경처럼 순수한 열정으로 휩싸인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여자와 현재 여자사이에서 갈팡질팡 답답한 모습을 보이는 이치윤, 자유로운 영혼인 듯 하지만 못 먹는 죽에 침 뱉는 경란, 너무 쿨한 모습에 진짜 애정이 있는 건지 조금 의심스럽기도 했던 남식, 사랑을 받지도 주지도 못해 공허해 보이던 찬희, 받아들여지지 않는 슬픈 사랑에 위태해 보이는 지태, 다양한 사람과 그만큼 다양한 애정에 대한 모습들이 이 책에 있었다. 


이 책은 읽는 내내 80년대 흑백영화를 보는 착각이 들었다. 등장인물의 말투나 상황과 배경 묘사가 예스러워서 어색하달까. 어딘가 있을 듯 하지만 지금은 아닌, 허리가 구부정한 저 할머니가 20대엔 이런 과감한 사랑을 했었구나 싶은, 그러니 분명히 현실적이지만 동시에 환상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 그 시절엔 '델리키트(delicate, 섬세한)'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혼자 킥킥거리기도 했다. 요즘 잘 쓰는 단어는 아니니까. 그러다 지금 나온 소설이나 에세이들이 수십 년이 지나 읽힌다면 그 시대 사람들도 우리 이야기를 보고 나처럼 킥킥대며 웃을까? '지금은 없는 순수한 사랑을 옛날 사람들은 했구나.'라며 지금의 모습을 순수하다 생각할까? 그때 되면 나도 허리가 구부정하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져서 가물가물해져 가는 기억 속에서 이렇게 브런치 쓰던 시간을 추억하게 될까? 소설 안의 인물은 변하지 않고 늘 젊은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랑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그 이야기를 만들었던 우리들은 그 시간 밖에서 변하고 늙고 사그라든다. 그런 생각을 하자 좀 씁쓸해지기도 하고, 현재를 박제하는 이야기, 소설, 글의 힘이 더 위대해 보이기도 했다. 


두꺼운 책이었지만, 옛날 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다양한 인물의 삼각관계를 흥미롭게 지켜보면서 단번에 읽어버렸다. 후루룩 읽히다 보니 읽기 전에 느꼈던 박경리 작가의 책이 주는 위엄과 무거움을 조금 덜어낼 수도 있었다. 그러니 토지 완독은 아니지만, 나 박경리 책 읽은 사람이야 라고 어깨 펴볼 수도 있겠다. 요즘 사랑 말고 옛날 사랑도 궁금하다면, 우리 엄마 이모 삼촌들은 어떤 연애를 했을까 궁금한 적이 있다면, 그 시절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하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책의 두께나 무게보다 훨씬 가볍고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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