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點·선線·면面, 삶의 기억을 새기다

어느 수학자의 예술

by 니나

윤재경 작가의 작업은 텅 빈 한지에서 시작된다. 하루의 감정들이 미세한 잔향처럼 남아있을 때, 그 조각들을 한지 위에 새기듯 기록한다. 손 끝의 압력은 점 하나를 새기고, 그 점은 하루의 어떤 순간이나 마음속에 부유하던 물음의 흔적이 된다. 이러한 기록은 미세한 감정의 결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려는 시도이며, 송곳으로 구멍을 만드는 행위는 의식의 소란함을 소거하고 마음의 고요함을 얻기 위한 일종의 수행으로 기능한다. 한지는 이러한 미묘한 떨림을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매개로 선택되었고, 뚫리고 밀려난 섬유질은 그 순간의 흔들림과 번뇌의 저항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작가의 경험이 재정리되는 사유의 과정을 시각화한다.


한지에 뚫린 첫 구멍은 마치 아무것도 없던 곳에 처음 생긴 균열과 같다. 완전하다는 것은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분별과 판단이 벗겨지고 본질만 남은 자리이다. 어쩌면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모습, ‘본래면목(本來面目)’에 가까운 상태일 것이다. 그 자리에서 밀려 나오듯 숨을 얻어 세상으로 태어났듯이, 작가는 한지에 구멍을 남기는 행위를 통해 오늘의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작가는 송곳으로 구멍을 내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감정과 기억의 흐름을 따라간다. 한지의 구멍은 개인적 경험인 부딪힘과 상처에서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서로 다른 감정과 사건이 만나고 타인과 이어지는 경계의 지표가 된다. 구멍 배열의 형상은 아무도 없는 새벽 바다의 모래에 남은 발자국, 눈이 내려 하얗게 덮인 세상에서 첫 문을 열던 순간의 떨림, 새하얀 스케치북에 노란 몽당 크레파스로 태양을 그리던 아이의 작은 손가락을 떠올리게 한다. 타인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일임을 환기한다.


점에서 시작된 존재는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선을 형성한다. 나를 떠나 외부로 향하는 발걸음은 직선이 되기도, 구부러진 곡선이 되기도 한다. 수많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감정과 사건들이 축적되며 그 선들은 어느새 면을 이루고, 서로 이어져 인생의 한 단락을 생성한다. 형성된 면들은 또 다른 면과 접속하며 3차원적 입체로 확장된다. 관계가 쌓이고 감정이 겹치고 이야기가 포개지는 순간, 나와 타인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우리는 서로에게 스며드는 ‘살(flesh)’의 감각과 닿아 있게 된다.


시간과 경험이 더해지며 이 입체는 또 한 번 확장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영향을 주고받는 또 다른 차원—감각과 기억, 이해가 얽힌 세계로 나아간다. 우리는 서로에게 남긴 수많은 부대낌과 상처, 회복의 층위를 통해 차원을 넓혀간다. 1차원의 존재가 2차원을, 2차원의 존재가 3차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듯, 확장된 차원 위에서야 비로소 이해의 흐름은 거꾸로 우리 자신에게, 타인에게, 그리고 각자의 본질을 향해 되돌아올 수 있다. 언젠가 되돌아가게 될 ‘본래면목’은 아무것도 없는 자리가 아니라, 모든 분별과 회환의 생채기들을 통과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자리라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오늘 밤에도 작가는 희노애락의 기억을 송곳으로 한지에 새겨 넣는다. 본성을 가려온 여러 분별을 작은 구멍 속에 내려놓으며, 주변의 소란은 서서히 고요해지고 의심과 불안은 한지 아래로 가라앉는다. 수십 번, 수백 번의 반복 속에서 기억을 새기고, 번뇌는 그곳 깊숙이 묻힌다.




윤재경 선생님의 개인전 "점點·선線·면面, 삶의 기억을 새기다" 가

12월 5일부터 19일까지 KP Gallery에서 선보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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