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그라데시 과도정부는 인도의 요청으로 이제 2개월 안에 무하마드 유뉴스 과도정부는 선거을 치러야하고
국내가 불안한 상황에 코바 방글라데시 4기 최정실씨가 일본에서 친구가 온다고 내년일월에 방글라데시에 같이 가자해서 같이 갈것이라고 연락이 왔습니다.저도 같이 가자고 이야기을 하더라구요.
느닷없이 제주도에서 연락이 왔네요. 최정실씨가 일본에서 아키가 왔다고 통화을 하라고 저는 방글라데시에서 여자단원 세명이 살던 아파트에 갔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깐 인사만 했습니다.
기억도 안나고 남편이 일본협력단인JICA전문가이지 그녀는 가정주부입니다.
그런데 전화을 해서 통화을 갑자기 하려니 영어도 버벅되게 되더라구요.
전화을 끊었다가 다시 전화을 했습니다. 대전에 FAVA2024도 있고 국제와인엑스포도있어서
대전으로 오라고 하니 최정실씨는 전주에서보자고 했습니다.
코이카 전북커뮤니티는 활성화가 잘되어있고 십년전에는 그 대표가 방글라데시을 다녀온 남자 단원이었습니다.
몸도 안좋고 돈도 없어서 안갈려다가 카드도 그렇고 ....
1996년에 방그라데시 코바 5기 후배가 JOCV여자단원과 사귀어 결혼을 예정으로 한국에 방문을 하는데 후배가 부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서울에 있는 관계로 그 JOCV 여자단원을 만났는데 서울 시청앞에 서울 프라자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그래서 방그라동기 최정실이 국내에 그 아키라는 여자와 같이 있으면서 돈이 궁햇던 것은 아닌지 해서 호텔 식당을 알보다가 문뜩 대전정부청사에서 만나 일본정부파견으로 청부청사에서 일하던 일본인이 생각이 났습니다.그녀는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서만나서 이야기을 하면서 한국의 옷이 너무 좋아서 샀다는 것입니다.그러면서 식사는 김밥을 먹더라구요.
그때 생각이 나서 과거 28년전만남이면 제 동기는 외국에서 만나고 해서 호텔을 안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 있는 조그마한 선물상자을 마련해서 채워서 전주에 갔습니다. 전주한옥마을에서 가까이에 있는 전통시장에서 피순대국을 먹고 나서 스타벅스에서 커피한잔을 제가 사고 대전에 왔습니다. 저는 제딸이 초등하교 5학년때 딸과 전주한옥마을을 갔다온후 오래간만에 갔었고
전주가한정식이나 콩나물국밥. 비빔밥이 유명해서 전주시청주변으로 갈려고 했는데 전통시장으로 가서 피순대을 먹었습니다. 전 순대국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피순대국밥은 처음 먹어 봅니다. 어머니가 순대국밥을 좋아해서 가끔식 가지만 나는 피순대국밥을 다못먹어서 남겼는데 둘은 깨끗이 비워서 놀랬습니다.
전 순대는 좋아하는데 대전순대는 당면과 채소을 넣는다고 이야기을 해주었습니다. 외국인들이 피순대을 먹는다면 무슨일이 벌어질까요? 전주전통시장에 피순대국밥집은 다른 순대도 팔아야 한다고 이야기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지방에서 살다보면 여러단원들과 연락이 잘 안되는데 서울의 소식도 잘 안되는데 가끔씩 서울에서 연락이 오네요.비공식적으로 잠깐
저는 명함도 없고 돈도 없고 집도 없습니다. 코바이사진과 코이카커뮤니티의 3040세대는 만나야 합니다.종교간에 싸움과 정부파견봉사단과 민간앤지오가 지원금이 없다고 내세울 것이 아닙니다. 비공식적으로 지역의 기업이나 단체에서 후원을 합니다. 그 사업이 명분이 있으면 말입니다.정부에서는 많은 돈을 지원을 못하니 정부기관과 일을 하는 친기업인들이 비공식적으로 후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하는 대단위행사는 정부기관에서 호텔에서 하면서 호텔커피와 부페식등이 무료입니다. 민간기업에서는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 정부기관에서는 호텔에서 하던 행사을 정부기관의 관청의 강당등에서 열고 식사비도 대폭 줄인것을 압니다.;
경제가 안좋다보니 간담회도 식사을 하던 경우에서 지금은 차담회로 바뀌도 있습니다.
코바의 밤에 KOICA에서 지원금이 5백만원 받아서 부페비로 300만원을 잡고 서울교육원 강당에 50만원을 잡으시고 ....부페식사보다는 간단하게 다과을 놓고 와인과 칻테일 쥬스, 소주로 하고 칵테일 파티을 하자고 제안햇습니다. 경비는 줄것이고 사람들은 이야기가 없던 사람이 약간의 와인을 먹으면 이야기도 잘하게 됩니다. 과음만 안하면 됩니다. 흥겨운 파티분위기가되고 말입니다. 술을 안마시는분은 쥬스나 간단한 다과을 먹으면 됩니다.
기념품으로 수첩이나 수건을 준비하고 회비을 정회원과 준회원으로 나누어 2만원을 더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해서 봉사단을 다녀온 분들에게 이만원은 얼마안하지만 젊은 기수들은 아직 사회적으로 안정이 안되어 작은 돈은 아니고 애기가 있거나 애들이 있다면 애들 교육비는 써도 개인의 사회활동에는
그리고 해외봉사단의 밤을 가보니 애들은 정장류의 옷을 입고 참석을 합니다. 예쁘게 입고 옵니다. 옷값도 무시못합니다.그리고 지방에서 올라가는 귀국단원들은 교통비도 무시 못합니다.
한번 만나면 그대로 몇시간내려오는 것보다는 밤늦게까지 이야기을 하는 것이 코바의 전례입니다. 하루밤은 서울교육원에서 자고 아침에 식사도 없이 헤어집니다.
잠깐 만나서 인사만 하고 소통도 없이 헤어진다면 역사는 흐르지 않았습니다. 나이드신분들은 테이블에 앉기을 원하겠지만 그러면 젊은 사람들과 다양한 이야기을 못한답니다
이야기을 하다가 끊기면잠기 다과 테이블에 가서 과자나 빵, 다식. 차, 음료을 마시면 되고 가장자리에 의자을 놓고 테이블을 세팅하면 다리 아픈사람은 앉아서 이야기 하고 돌아가면서 새로운 사람과 이야기을 할 수있습니다.
코바의 밤입니다.무대에 콘서트을 보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만나서 인사하고 소통하면서 사업도 하고 파견국가와 연락도 하면서그들과 함께 위기을 보험이 그렇지 않은가요
RISK MANEGMENT.
철자가 맞는지 모르겟네요.
각 지방에 지부을 두는 것도 코이카에서 지원만 한다면 정부기관의 한 사무실을 받을 수있습니다. 지방정부에서도 빈 사무실이 있습니다. 정부파견봉사단은 준외교관여권이 발행이 됍니다.
각 지방 자치 단체에 엔지오가 대전은 오백개인데 각 엔지오는 사업계획서로 적게는 몇백만원 많게는 오천.억을 지원받는 것으로 압니다.
몇년전에 코바사무실에 제안했습니다,.사업계획서을 잘써서 각 지방정부의 사업자금을 지원받아서 일을 추진하자고요.사업계획서 쓰는 사람이 코바본부에 있어서 같이 머리을 맞대자고 이야기을 했습니다.
KOICA 정년퇴직한 분을 코바사무실에 영입하자는 이야기도 대전에서 했습니다.
일반엔지오을 보면 한국기업에서 많은 후원을 받고 배너에 올리고 있습니다. 민관이 협동해서 일하자는이야기 입니다,.노동청에 갔다가 검색을 했습니다. ILO에서 제안하는 사업입니다.
제가 부탄에서 돌아와 노동청에 구직에 올리고 추천도 받아서 회사에 가보았는데 그 사장은 자기딸이 대학 4학년이라고 자기 딸을 고용하겟다는 이야기을 했습니다.저는 방글라데시 해외봉사단도 다녀오고 국제연합봉사단으로 부탄도 다녀오고 언어는 영어, 일본어. 방그라데시어을 하고 \독어와 스페니쉬와 불어 기초을 햇씁니다,. 해외경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렌즈회사인가 사장은 자기딸인 충남대 4학년을 쓰겟다고 햇씁니다.
대전은 취직하기 힘이 듭니다. 보니 노동청도 끼리끼리 인것 같습니다.
서울은 살기는 각박한데 그래도 노력하면 알아주는 사람도 있고 일에 성취감도 있습니다. 취재기자을 하며 꿈을 꿀때 밤늦게 글을 쓰고 나오면서 밤공기가 그렇게 상쾌합니다.
대전은 인맥과 혈맥과 지연이 엉켜있습니다.그러나 과거 김종필씨는 대전을 국제금융도시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신한은행이 대전으로 내려오려고 햇고 충청은행은 정부청사옆에 커다란 빌딩을 짓고 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은것 같습니다.
제가 대전에서 영원무역에서하는 유천동에 영원무역의 옷가게에 취직하려고 이력서을 냈는데 안되었습니다. 어떻게 제가 영원무역에 전화을 할 수있겟습니까?
제 후배중에 하나는 2000년대 초반에 코바6기 지인영씨는 코바 총회에서 보니 부회장 선거에 나왔는데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와 커피을 마시며 명함을 주었습니다.
영원무역에 해외영업팀에 근무하고 있더라구요.
제가 구자웅이사장님에게 지인영씨을 운영요원으로 추천을하고 구코바이사진과 트러블로 커뮤니티가 독립을 하던시기에 충청권모임에 대표로 있던 이길송씨 명함을 보내며
저에게 명함을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코바에서는 명함도 없이 저에게 일을 맡기러 합니까?
암웨이는 실직한 사람들이 활동을 하면서 암웨이 명함을 만듭니다. 사회적으로 비지니스 하느 사람들은 악수을 하며 명함을 교환합니다.
저는 코바초창기 파견단원이었고 코바방글라데시 첫파견기수로국장을 했습니다. 아무도 국장을 안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을 쳐다보더라구요,그래서 국장을 하겠다고 했고 성실히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코디네이터가 개인사정으로 중도귀국상황에서 모두들 저보고 코디네이터을 하라고 했고 영어가 자신이 없다고 하자 최정실끼가 그때 자신이 도와주겟다고 해서 거절하고 문닫힌호스텔을 아사드게이트원예센타에서 일주일에 한번 우토라한국청년해외봉사단까지 베이티 택시을 타고 왔다갔다 했고 신문이 와있어서 가져다 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레자라는 현지인이 있어서 다독이고 호스텔을 둘러보고 그러고 내가 사는 집으로 갔었지요.
한 육개월입니다. 그런데 다시 재파견되어온 스리랑카출신의 선배가 와서 호스텔을 재세팅하고 나더니 저을 코바 5기최동호가 있던 탕카일 원예센타로 보내려고하면서 다녀오라고 햇는데 비가오고 현지인과 좀 마찰이 있었습니다. jocv가 너무나 고맙게 대해주었는데 그분이 좀 그렇다고 이야기을 해주고 저을 다카까지 가는 버스에 태워주었습니다.
방글라데시에 소요사태가 있고 좀 지나서 10월에 전주에 사는 방글라데시 후배 단원을 찾아가서 이야기 하다가 다카애서 홈스테이을 하던 뱅갈리와 연락을 하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이런저런이야기을 하다가 자신이 선을 보고나서 맘에 안들어서 고개을 숙이고 살았다고 합니다. 대학원에 들어가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햇는데 지나고 보니 해외봉사단을 나갔다온 사람들과 연결이 되었으면 그들중에 결혼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고 합니다.
해외봉사단을 다녀온 귀국단원들은 나이가 많습니다 그 후배도 봉사단을 다녀온후 30세였을것인데 그때쯤은 국내 친구들은 결혼을 해서 한잠 바쁠때라 봉사을 다녀온 친구들의 이야기을 들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해외봉사단을 다녀온 젊은 20대 30대들은 봉사단 모임에 나올때 보니 정장을 입고 나오거나 예쁘게 하고 나옵니다. 저와는 좀 다릅니다.그리고 한국에 돌아가면 해외봉사단모임에는 안나가겟다고 하던 사람들도 외로운지 모임에 열심히 나가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20대30대 귀국봉사단의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나이드신분들도 서로 연령대별도 생각이 다르겟지만 소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후배을 키워서 국제기구나 각 파견국가의 전문가로 지역코바에서는 지역기업과 연계해서 취업과도 연결시킬려면 파견국가의 언어을 읽고 쓸줄알아야합니다.
국내파견교육도 일개월은 짧습니다. 이개월을 해야하고 아침에 나이가 많든 적든 운동장을뜃는 구보도 하면서 각나라의 숫자도 같이 외우고 인사말도 자연히 익혀야합니다.
파견국가적응훈련은 얼마 안해도 됩니다. 유엔에서는 이주일인가 짧습니다.그리고 대부분 유엔브리 국제 연합봉사단은 외국에서 일을 한 경험이나 봉사단 경험이 있습니다. 이들이 경험을 토대로 국제기구에 조인을 합니다.
대학생 국제연합봉사단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국제연합봉사단도 기간이 2년입니다. 지금과 같이 6개월로는 일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스탠딩 파티에서는 국가별로 처음에 현지어로 이야기하고 다른 국가와는 영어로 불어, 스페니쉬. 아랍어. 러시아어로 말을 해야 합니다.
십년전에 대전커뮤니티에서 방글라데시후배을 만났는데 방글라글씨을 모른다고해서 놀랬고 파견시에 대통령을 안만나고 나간다고 해서 더 놀랬습니다.
그후에 jicA 일본협력단의 홈페이지을 보니 파견국가의 민속의상을 입고 외교통상부 장관을 만나는 사진이 떴습니다, 그전에 일본봉사단과 이야기을 하니 자기들은 돌아가면 천황을 만난다고 했습니다.
언젠가 피스코의 홈페이지을 보니 귀국단원들이 각주을 돌면서 2박3일인가 모임을 한다고 되어있었습니다.
영국봉사자들은 후원금을 모으는 음악회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말입니다.
저는 구자웅이사장에게 이야기을 했습니다. 어느,나라을 다녀온지 모르겟지만 다른 나라 봉사단과 이야기을 했는지 잘 모릅니다.
방글라데시에 파견된 일본 JOCV는 시골에서 수공예품을 만드는 것을 미싱을 중고로 사서 교육을 시키고 한편에는 판매센터을 만들어 판매을 한다고 합니다. 방그라데시 6기 오선경씨가 지역사회개발파견이었는데 jica에서 추전한 시골에서 다카로 상경한 일본인을 만난다고 통역을 해 달라고 해서 하러가서 두시간이상을 하고 나서 호스텔인가 집으로 가니 머리가 아프더라구요. 방글라언어로 한국어로 이야기 했습니다. 오선경씨가 방글라데시에 파견온지 한달인가 되었을떄이고 저는 귀국을 앞두고 koica 김인부소장의 육기 훈련을 도와 주어습니다.
그리고 이어 모두들 오선경씨가 쿠밀라의 일본이 지역개발 프로잭트에 혼자 파견되는 것을 걱정해서 처음에 제가 쿠밀라에 오선경씨을 데리고 가서 일본jocv2기출신의 지역개발프로젝트 단장을 만나 오선경씨을 소개하고 하룻밤 대접을 잘 받고 왔습니다. 그사업에 일본인들이 열댓명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 들어와 코바귀국모임에 나섬회홍보국장을 하는데 말이 많았습니다. 그때 정기총회에서 2기가 회장으로 선출이 되었는데 얼굴도 못봤습니다. 1기에 윤장용씨와 4기에 김건도씨가 부회장으로 선출이 되었습니다. 그럼 응당 회장이 나서지 않으면 부회장아나서야 하는데 그전기수에 3기 김미행씨가 나서서 조직을 구성하자고 저보고 추천을 달라고 했습니다.]
파튜아뉴기니에 코바2기 성백주씨는 그때koica에일하고있었습니다. 한미약품에 김미행씨와 중앙종묘에 최필곤싸는 같은 구역의 회사에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강남의 커피숍에서모이던 코바4기는 태국4기 이병연씨자취집에서 모여서 모임을 추진을 해습니다. 동기들은 저에게 일을 도와준다고 수고 한다면서 이병연씨 돈을 거둬서 준다고 했는 웃고 말았습니다.
이병연씨는 나중에 알고보니 제 대학써클동기에 남편의 친구에 친구라는 이야기을 봉사단 구국단원에 올림픽파크로 전화가 와서 알게되어서 임원진 구성에 추천을 한 것입니다.
대전에 있다보니 대전지역모임도 하고 국제연합봉사단모임도 구성하려다 애아빠을 만나 부산으로 가서 3-4년정도 살다 대전으로 온 것 같습니다.
그사이에 코바가 회장체제에서 이사장체재로 바뀌고 정기총회가 사라졌습니다. 이사진들이 구성이 되었더군요.
후배가 회비도 내고 이사진에 합류하라고 하는데 애가 어리고 집에서 부모님을 봐야하고 제가 이혼녀라 떳떳이 모임에 나서기도 해서 뭐뭇거리고 미얀마에 다녀온 나이 지긋한 분을 추천을 했습니다
대전세계조리사대회 자원봉사을 하는데 그분도 자원봉사을 하시더라구요.그리고 그전에 정기총회에서 얼굴도 익혀구요.
저는 여러 월간지. 주간지. 지역지 . 일간지 인터네신문에 취재기자로활동하다보니 정부기관과 민간기업에 제안을 많이 해서 대전시와 대전교육청에서도 상을 받았습니다. 작은 금일봉도 받고./.
정부기관의 보도자료와 민간기업의 활동을 보고 정부청사의 특허청, 중소기업청. 소비자원으 보도자료을 보면서 KOVA의 중요성을 더욱 깨닫게 되어 오마이 뉴스에 코바 각지부가 생기고 활성화가 되어야 한다고 글을 올렸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코바 홈페이지도 국가별. 기수별. 분야볋 홈페이지가 구축되어 소통이 되어야 합니다. 그전에도 이야기도 하고 제안도 했습니다.
교통비가 없어서 저는 서울에 못갑니다. 애기을 낳기전에는 코바에 무슨일이 있다고 하면 고속버스로 기차로 회의에 올라가 한마디 하고 왔습니다,그때는 누구나 참석이 가능했습니다.
지금은 명함이 없어서 누구을 만나기도 그러내요.물론 필요도 없는 명함도 있습니다. 인터네신문은 월급도 없고 교통비도 전화비가 지급이 됩니다. 광고수입으로 기자을 광고기자로 취급을 합니다.
백화점 브랜드의 외국동영상은 멋있습니다. 홍보실에 이야기하면 제각 연결을 해줍니다. 서울까지 목사지만 대전의 백화점 브랜드 매니저을 만나 홍보기사을 쓰면 국내 기업 브랜드가 발전을 합니다.
지금 노동계의 잇휴가 백화점직원들의 휴식보장도 요구되어지는데 외국옷브랜드 회사는 주5일근무에 월급외에 인센티브가 주어집니다. 물론 외국어을 영어. 일본어 ,불어등을 해야합니다. 물론 에티켓도 필요하겟지요.
어머니에게 서울로 가야 한다고 했더니 애을 봐줄수가 없다고 해서 대전에서 애을 키우는데 이제 고3입니다. 대전은 임금이 서울에 비해 싸고 부동산가격도 쌉니다.
서울에 코바해드쿼커 운영이 어렵다면 대전으로 앤지오사무실을 옮기고 전국으로 이사장님이 지부을 돌아다니는 것은 어떨지요?
그런데 애을 키우고 보니 대전의 민간기업의 임금은싼데 대전의 공무원 월급과 서울의 공무원월급은 얼마나 차이가 날까 생각이 듭니다.
대학등록금이 서울에 사는 학생과 지방에서 올라가는 학생에게는 등록금이 차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코바의 밤에 참석하는 지방 단원의 교통비을 지원해주셔야한다는 것입니다. 공무원들은 지역을 이동할때 출장비을 꼬박 청구합니다.
그리고 운영요원들에게 부페비아껴서 자원활동가 면목으로 교통비와 점심비을 주던가 일당 얼마을 주자는 것입니다.
그럼 다음회에도 서로 운영요원을 하겟다고 할것입니다. 백후현싸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그동안 월급도 못받고 책임감으로 몇년을 버티었습니다. 그분이 사무실을 지킬때 누가 식사대접을 해주고 술한잔 받아 주셨습니까?
코바의 시니어 봉사단여러분은 공무원등 각자의 중요한 일을 하셨다는데 동기들을 위해서 돈을 쓰쎴습니까?
전 동기들이 서운하게도 했지만 저을 위해주어서 다른 동기가 국제기구에 직접어플라이을 하고 도움을 요청할때 도와주기도 하고 유엔에서 쓰는 영어회화구문 한묶음을 건네주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 영어회화구문을 유엔브이 프로그램오피셔에게서 받았을때는 얼마나 노력을 했겟습니까? 처음에 부탄을 가서 캔으로 묻다가 반말한다고 핀잔을 들었습니다.그분에게서
일년후에 그 유엔영어회화구문을 받은 것이고 그녀는 인도네시아에 유니세트로 나아가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사무소에 북한 사람들이 왔다고 연락이 와서 몇자 보냈는데 연락이 그다음에 없었습니다.
부산에 지금은 유니세프지사가 개설되었더군요.
이래도 코바의 초창기기수들과 중간기수들과 연락을 안하시겠습니까>홈페이지 구축을 다시 안하시겟습니까?
모바일은 파란색으로 눈에 안좋아서 오래하면 안좋습니다. 나이가 드신 분은 큰 글씨가 좋지요
국제기구 unesco에도 본문의 글씨을 키우라고 했습니다.
아마 제가 koiCA와 연결이 되고 학교동문과 연결이 되었더라면 아마
이나이에 fao지역대표나 ifad지역대표는 되어있지않을까요?
전 유엔브이로 있으면서 각프로젝트 메니저와 각나라 전문가와 소통해야햇습니다.
젊은 봉사단과 소통하고 싶었는데 자리도 그렇고 제가 너무 소침했고
자동차가 없어서 밤중에 돌아다니지을 못했어요.
처음에 가서는 여기저기서 초대을 해주어 나중에 아팠어요.
음식도 안맞고 물도 안맞고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글을 보니 뉴욕에 사교계인사라는데 일주일에 한번두번만
나간다고 합니다.
명함안만들어주어도 좋습니다.
코바은 PUBLIC-PRIVATE 간에 공동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아마 그래서 민간엔지오프로젝트을 지원한다고 봅니다.
공적인것을 너무 좋아하면 사회주의나 복지는 안니리라봅니다.
우리가 파견되는 제3세계는 구공산국가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곳도 살만하더이다.여자공무원들은 근무시간에 뜨게질도 하고 개인일을 보러 나가기도 하고 부탄에서 보니 제가 부임했는데 제 카운터 파트너는 결혼을 해서 한달이 지나도록 안나왓습니다. 방그라데시에서는 애을임신하니 관대해서 퇴근도 일찍 합니다.
다른 사람에 의하면 부탄에서 대학을 나오면 다쇼라고 부르는 높은 지위라고합니다. 그들은 하의 동네 커플인데 유학을 오스트리아와 뉴질랜드을 다녀 온후에 부탄에 돌아와서 디스코텍에 가서 춤을 추다가 만났다고합니다.. 부탄은 애기을 낳으면 삼개월이나 4개월을 쉬고 필요하면 애기을 봐주는 애을 데리고 정부기관에 출근을 합니다.
그래서 여자후배단원과 더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공산국가는 복지가 잘된것인지 여자들이 임신했을때 대단히 관대합니다.
여자단원들이 제3세계국가에서 더 용감한 것 같습니다. 남자단원과 못다한 이야기을 하고 말입니다. 유앤브이 현지오리엔테이션에서는 그나라 다쇼들의 사례을 들어 이야기도 하고 합니다.
제가 해외봉사단 국내훈련에 참석해 여성의 성희롱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제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vso에서도 이야기을 하고 jocv들은 코디네이터의 묵인하에 현지인과 동거도 합니다.
우리 코바는 만나면 안될까요?방그랄데시의 경우 목사님도 방그라데시 남쪽도시의 비하르인 자끄마여자와 결혼하고 그집안은 일본jocv코디네이터와 결혼도 한 집안입니다.
그런데도 코바는 코바의밤에 연예인이 사회을 보고 레크레이션과 음악도 듣고 테이블에 앉아만 있어야 합니까?
스탠팅 파티을 해서 서로 기수와 파견국 분야별 소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vso와 jocv 등에 희생양이 되시겟습니까> 정보력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가 되겟씁니까?
오지에 파견되는 한국인 하나가 얼마나 우습게 사라지는 지 아십니까?>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국가의 존망이 달린 사태를 보면서 말입니까?
봉사단의 지원금만 이야기 하고 ...코이카에 사업계획서을 올리시고 지원금을 더 요청하세요..
저희 방글라데시 4기는 방글라데시 첫파견기수로 처음에 KOICA에서 지원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데 글쎄 기독교 엔지오 단체에 KOICA에서 지원금을 상당히 해주어서 우리가 난리를 쳤습니다.
카운터 파트너 한국연수나 사업지원금을 개인별로 나누어서 일을 추진하게 해달라고.
그때 한단원에게만 지원이 갔는데 이제 와서 이야기 합니다. 지방에 갔더니 그 새 미싱이 천에 덮여져 먼지가 쌓여있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후배의 편지을 받았더니 코바6기에게는 각개인별로 프로젝트당 얼마씩
지원이 됏다고 말입니다.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