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덕평로 470번길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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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 pacific centre of education for international understanding
아시아태평양국제이해교육원
유네스코평화센터 웹사이트; 안나오네요.
대학교회써클인UBF의 블로그에 유네스코평화센터의 세계국기 개양대, 운동장,축구장
산책로, 회의장, 숙소, 화장실 등의 사진이 올려있네요
1986년 유네스코학생회에서 주최한 조국순례대항진에 참석해 강원도지역을 순례하고
경기도 유네스코 수련원에 입성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그때 커다란 국기을 펼쳐들고 운동장을 걸었는데요..
국제협력단의 한국청년해외봉사단 국내파견훈련을 3개월 받던 생각이 납니다.
그후에도 체육대회가 열렸던 것 같네요.
그곳에서 코바의행사가 열리면 마녀사냥도 없을 것이고 종교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념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정치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유럽의 중세시대에는 애기을 받는 산파와 약초지식이 있는 사람을 마녀로 몰라세웠었고
독일인가 어디에서는 과부을 마녀로 몰아세웟다고합니다..
어머니가 대전태평동에서 40여년간 애기을 받는 조산원을 하시다가
오류동에 대한가족보건협회에 일을하셨어요,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식당도 다니고 백화점 청소을하고요.
여러분도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간호원들이 나이가 들어서
병원의 현직에 있질 않습니다.
독일등의 유럽에서는 간호사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일을 한다고합니다
부탄UNV로갔을때 부탄농업성에 원예프로젝터 메니저인 T.R.gurung은 가톨릭신자로 네팔리였는데
저에게 유럽연합지원을 받은 전통약초재배사업계획서을 건내주었고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 동기가 유니세프에 지원했다고 만나자고 해서
서울 연희동에서 그녀의 자취집에서 하루묵으며 이야기 하고
유엔영어회화구문과 부산전통약초재배사업계획서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녀는 인도네시아에 유니세프로 나갔었고
그다음에 한국에 들어와 지자체 국제협력파트에서일했던 것으로 압니다.
요새 부산 웹사이트을 보았더니
부산에유니세프지사가 있더라구요.
저는 현제 유니세프 후언회원입니다.그외엔지오에도 후원하고 있고요
국토의 중간에 조용한 곳에 있으니 어두운 밤에 자가용으로 늦게 까지 있어도 되지 않을까요?
김미행씨가 제가 부탄에 파견되기전에 가나안농군학교의 서울모임에 대려갔엇는데요.
1996년 저희4기가 그전의임원들인 3기들이 하던 코바의 장부을 받아들었는데
회계장부가 없었습니다. 제대로 된 서류들이 없었습니다.물론 초창기입니다.
제가 그럴수도있다고 이야기하고 저희는 간단한 일이자만 서류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김매행씨가 저보고 한국의 해외에사업을 지우너하는 엔지오의 자원봉사백과사전을 같이 만들자고 해서 서울시내의 해외엔지오단체을 취재다녔는데
행사을 했다는데 대부분의 해외NGO들이 서류가 없이 일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베트남에 청소년직업훈련센타을 세웠다는 엔지오가 사업계획서을 가지고 일을 햇더라구요..
그때 해외지원엔지오단체을 취재하다보니 외국인근로자센타에도 가고 부천의 어느 절은
외국인근로자 문화축제을 한다고 해서
제3세꼐언어봉사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3기들과 4기들에게 이야기을하니
많은 3기분들이 서울과 서울 근교에서 부천까지 가서 외국인근로자 문화축제에 참석을 하게 했습니다.
4기에서는 돌아온지 얼마 안되어 국내적응에 바쁜시기인지가 4기 방그라데시박미라씨만 참석을 하고요..
3기와 4기들중에 몇명은 가끔식 태국3기 이병연씨와 파퓨아뉴기니 4기 최필곤씨와 약간은 비아냥거렷습니다.뭐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냥하면서...
4기 김건도씨는 저에게 코바일을 하자며 30년후에는 재향군인회관처럼 코바회고나이 들어설것이라고 이야기하고 4기 최필곤씨는 제가 코바일을 하겟다고하자
COOl하도이야기을 했습니다.
그당시에 저는 개인적인 사업으로 한국청년해외봉사단 파견9개국 여행회화와 정보책을 만드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구요.
서울 종로의 YMCA지하일층 첼로커피숍을 기억하나요?코바사기 여러분....
전 그전에 서울 신림동 외국인근로자 및 저소득층 의료봉사활동을 요셉의원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일보에 난 기사을 보고 전화을 걸어서 신부님을 만나고 약국파트에서 일하며 약사을 도와
약을 조제하고 외국인근로자가 오면 말상대을 해주엇습니다.
그리고 저는 코바회지 나섬1호을 만들고 해외봉사전 사진전을 준비하다가
국제연합봉사단 UNV로 부탄으로 나갔고
부탄에서 돌아와 대전에 있으면서
처음에는 대화동의 빈들교회에 가서 외국인근로자을 위한 자원봉사활동을 햇습니다.
교차료에 외국인근로자자원봉사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는 저을 자가용에 태워 신탄진의 어느 공장 기숙사도 방문하고
어느 주일에는 대화동에 한주택을 외국인근로자들이 쓰고 있엇는데
방그라데시 사람이 아프다고 해서 제가 과자와 음료을 사다주었습니다.개인돈으로
중국인들은 나보다 부자였고 자가용도 끌고다녔습니다.
빈들교회는 상당히 켰는데 중고의류가게인가 샵도 가지고 있엇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빈들교회에서 일하는 전도사인가 누가 전화을 받는데
경찰에서 온 전화였습니다.
그래서 빈들교회는 안나갔습니다.
부탄에 가니 몇개월 지나니 스위스의 UNDP,에서 일하는
핼랜이라는 친구가 저보고 조심해라
그리고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면서 이주일에 한번씩 종로구 헤화동에 있떤
동성중고등학교에 외국인근로자 무료진료에 라파엘클리닉에서
자원봉사을 받으라고 해서 교육을 받고 자원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가끔씩 외국인근로자들 이야기을 전해 주었고
어느날은 대전지하철공사장에서 중국인이 죽었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방송에서는 보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건설업체가 지하철공사을 하면서 몇개국의 외국인들을 데려다가 일을
했을까요?
일본에서는 이수호라는 지하철 공사을 하다 죽은 한국인을 위해서
위령제을 올리고 부모을 초청하고 대대적으로 홍보을 해
]우리나라 의 방송에도 크게 보도가 되었습니다.
저는 대전지하철공사가 완성하고 대전의 태평동 주민센타에서 아ㅍ무대을 설치하고
축하공연모임을 펼칠때
애기을 업고 단상에 올라가 이야기을 하려고하자 진행요원들이 제지을 했습니다.
이제 대전지하철 공사가 끝난지 20년이 다되어 갑니다.
그들의 우리의 미래세대들에게 어떠한 일을 벌일까요?
외국에 나가보니 그 나라 상류층들은 외국인과 결혼을 많이 합니다.
그나라 정책은 그나라 사람들이 아니라 원조을 하는 스폰서을 하는 나라의
지원에 따라 그나라의 정책이 결정이 됩니다.
부탄에서 힘들었던 점중에 하나는 저을 스파이라고 하고 안좋게생각하고
부탄옆에 시킴이라는 나라라 인도에 복속된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자신들의 문화을 더욱존중하고 외국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로 부타의정부기관에서
일을 할때는 그나라의 전통복장을 꼭 입고 다녔습니다.
우리나라는 좀 역사을 보면 아니엇던것 같습니다.
신여성이라고 치마도 짤게 올려서 입고
배운사람들은 양복도 입고.
부탄은 배울점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만틈 보수적이기도 합니다. 네팔리들이 20세기초부터 인구가 많지 않은 부탄으로 이주해와 일을 하면서 자녀들이 무료로 학교을 다닐수있었다고 합니다.
부탄은 복지정책이 잘 되어있어 교육을 받고 아이들이 일정수준에 영어등급을 획득하면 외국으로 유학을 정부에서 보내줍니다.
네팔리들은 옆에 네팔의 국가와 소통을 하면서 부탄정부에 압력행사도 하고
티벳탄 난민들은 부탄에서 식당들을 차려서 일하면서 미인들을
정부기관의 사람들과 결혼을 합니다. 그때 농업성장관도 부인이 티벳탄이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유시팡 알앤알시에서 조그만 더 가면 티벳탄 난민들이 살고
내가 근무하던 곳에도 티벳탄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이식당앞에서 자그마한 티벳탄 남자을 만났는데 저보고
자기는 일본 태국 여러나라을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와 비슷한 사람을 저희 동네에서도 봤습니다. 그냥 한국인과 똑같다고 생각을 해서
그냥 스켜지나갔는데 어느날 동학사에 가니 포스터가 있더라구요
광주에 티벳탄 임시정부가 있다고
내가 부탄에서 힘들었던 점중에 하나가 나에 대한 정보가 이미 그들은 알고있었다는 거죠.
우리 코바도 서로네트워킹을 해야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서로 적이 아닌 서로 도와주고 국제기구에 띄워야 합니다.
한기지 더이야기 하자면 부탄의 불교을 믿는 사람들은 다는 아니지만
성인이 성생활을 안하면 정신적으로 이상하다고이야기을 합니다.
제가 부탄의 알엔알씨에 일할때 제 밑에 있던 체키라는 여자는 저에게 네덜란드 SNV가
출장을 갔다가 부탄사람과 하룻밤을 자고 임신이 되서 네덜란드에 혼자가서 애을 낳고 산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녀에게는 사귀엇던 남자가 있엇다고 합니다.
그리고 독일인 박사가 원예파트에 있었는데 출장을 갔다가 그 밑에서 일하던 남자와 자서 임신이 되어서 그나라에서 애기을 낳고 그 남자와 살았다고합니다.
저는 가사라는 지역인가 고산지대조사을 하는 팀에 일원으로 되어있다가 명단에서 빠졌서 그조사에 합류을 못햇는데 세월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누군가가 저을 많이 생가해 줘서 그조사에 빠진 것 같습니다.
인도대사관에서 부탄에 오셨던 대사님과 함께 동행햇던 영사도 나에게 부탄사람들은 성적으로 프리하다는 둥 별얘기을 해서 아니 외교관이라는 사람이 좀 그렇다고 생각을 햇습니다.
그때 부탄의 경제기획원에서 일하던 사람이 저에게 한국에 대해서 궁금해 한사람이 있었습니다,제가 피하자 농업성에 돕보르지라는 영국에서 유학을 해 마스터 디그리을 받은 분이 하루는 레모바라는 곳에서 기다리며 저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소개을 해주고 자동차로 제가 사는 집까지 바라다 주고요.
계속피했는데 어느 날 유시팡에서 걸어서 그앞을 지나는데 인도에서 대사가 왔으니 가자는 것입니다. 하도 진지하게 이야기하길레 그사람의 오토바이을 타고 드룩호텔을 갔더니 정말 한국대사관에서 대사가 와있더라구요.
그때 방그라데시 한국대사관을 다녀온지 몇주안되었을때입니다. 그영사분은 무슨 오해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IMF가 터지고한참지나서 이 대사님이 부탄에 방문하셔서 너는 UN의 지시을 따르라며 태권도코치와 궁도코치만 만나고 가신것으로 압니다.
6기 태권도 코치는 류재형시로 베트남에서 한국해외봉사단으로 있었고 여덟살되는 아들을 데리고 왔었고 나중에 아내가 왔는데 식당에서 일을 한경험이 있다고이야기을 햇습니다.
궁도코치는 술을 먹기도 해서 저는 술을 안먹어서 레모바에 잠양을 소개해 같이 하게 했
고 주위에서 나이트을 데려가라고 했나 해서 나이트을 한번 같이 가줘었더니 계속가자고 해서 경제기획원에서 잠양밑에서 일한다는 사람과 붙여주었는데
나중에는 보니 부탄에서 다른 여자을 소개해주었는지 어느날 제가 사는 집에 부탄여자을 데리고왔었습니다.이분은 국제양궁대회에서 심판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는데 우리나라 궁도협회에서 파견하는 사람이라고 햇씁니다.부산에 아내도있고 딸이 두명이 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이나라는 경찰들이 외국인을 감시한다고 이야기을 했던 생각이 나서요.
대전에서는 대전 대화동의 어느 교회에서 외국인근로자들에게 한국어을 가르치다가
윤전도사라는 사람에게 서울의 동성중교등학교에서 이주일에 한번 열리는
외국인근로자 무료진료소에 라파엘클리닉을 소개했습니다.
윤전도사는 목사에게 이야기을 했지는지 대전에 목척교에 외국인뮤료진료소을 세웠고
이것은 다시 결혼이주민 한국어교실 그리고 만년동에 아시아레스토랑을 세우더니
대전외국인근로자 복지센타을 세웠습니다.,
제가 아이디어을 윤전도사에게 낼댸는 한국청년해외봉사단귀국단원 대전충남충북모임을 결성하며 같이 일하고자 햇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부산을 다녀온후에 연락을 전화을 하고 찾아도 갔는데 거절을 하더라구요,
물론 코바이야기는 안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애을 키우고 부모님과 살다보니 그냥 지나고 대전인터넷신문기자을 하면서지나고
충남일보기자로 있을때는 이 외국인무료진료소개소식 기사도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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