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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직남 Dec 25. 2023

수면공작소, 이어서...

꿈이라는 환상, 파편화된 기억, 다시 현실.


이곳은 여자의 꿈 속이다. 

잠이라는 깊은 심연 속. 

어둠과 정적만이 존재하는 곳.


여자가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있다. 

그녀는 지금 단잠을 자고 있는 걸까.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란 벽에  시계가 걸려있다. 정도.


날짜는 25일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다. 크리스마스인 것이다.  


부디, 그녀가 양질의 잠을 잘 수 있길. 악몽을 꾸지 않길. 편안 밤이 되기를. 

하지만, 꿈은 무의식의 공간. 통제할 수 없는 곳.


반대로, 모든 게 가능한 곳. 



이곳은 아르헨티나다. 


고작, 5년 전의 일인데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실제로 여자가 서른 시간 비행기를 타고(엉덩이가 아릴 정도로 아파왔다) 다녀왔음에도

이렇게 덩그러니 사진을 보니. 뭐랄까, 그냥 여행 잡지 속 한 페이지 같다. 


비현실적이다.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지구 반대편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그곳은 실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다시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광장 중앙에 떡하니 서 있던 브리프케이스.

이렇게 큰 브리프케이스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왠지 이 가방하나면 전 세계를 다 누비고도 

충분할 모든 것들이 들어갈지도.


근데, 저 안을 다 채울 수 있긴 한 걸까?  




그곳에서 여자는 남자를 만났다. 

에어비엔비로 예약한 숙소에서. 

그녀는 2층 건물에, 그는 1층 건물에.


지구 반대편에서 한국인을 만나는 건 실로 기묘하고 

아찔하고, 로맨틱하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는 여행의 이유에 대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나라. 

라고 자신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들의 여행이 시작됐다. 



그들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타국에서 만난 동지에게 숨길 비밀 따위는 없었다. 

이미, 이 지구 반대편에 왔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머지 얘기는 부차적일 뿐. 


무엇보다, 


선선한 날씨, 저물어 가는 노을, 그리고 둘. 

그걸로 된 것이다. 



둘은 함께 여행을 다녔다. 

미술관은 둘 다 좋아하는 곳이었다.


학생과 아이컨택 중인 비너스 조각상이 그들의 시야에 보였다.

많은 군중 속 스포트라이트는 둘만을 비추고.


둘의 은밀한 대화가 시작된다. 


넌 어디서 왔니? 여자가 물었다. 

지옥이요. 남자가 대답했다. 


어, 나도 거기서 왔는데. 남자의 대답에,


저기, 죄송한데 움직이지 말아 줄래요? 이거 좀 마저 그려야 해서요. 


미안. 


둘은 재미없는 농담에도 웃어댔다. 

뭘 해도 좋았던 것이다. 




방금까지 흥겨웠던 기타 선율은

순식간에,


Coldplay - Fix you

로 음악이 바뀌고. 


많은 군중 속 스포트라이트는 기타 아저씨와 비닐봉지를 든 여자에게 집중된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의문의 여성. 


눈부시게 화창한 날, 모두가 흥겨워 보일 때. 


누군가는 우는 것이다. 


여자의 상황극에 남자가 정색을 하고는.


근데, 그거 진짜잖아? 



이제 탱고를 배워보려 해. 남자가 말했다. 

어디서? 여자가 물었다. 


몰라. 탱고의 고장이니까, 어디서든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남자를 탱고를,


여자는 무작정 걷기로 했다.



여자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지치면 벤치에 앉아 쉬고, 

배가 고프면 아무 곳이나 들어가 허기를 채웠다. 


고작, 그것밖에 안 했는데도 그녀는 행복했다. 



 남자는 종종 여자에게 사진을 보내왔다. 

이제 남자의 일과의 대미는 늘 탱고가 차지했다. 


여자는 남자의 탱고 레슨이 끝나면 바에서 함께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각자의 하루를 얘기하고, 음악을 듣는 것. 


완벽한 하루. 



여자는 우연히 길을 걷다, 미술관을 발견했다. 

알렉산더 칼더의 전시회였는데, 


할 것도 없고 해서 티켓을 구매해 안으로 들어섰다. 


중앙에는 거대한 구조물이 천장에 팽팽하게 매달려 있었고 관객의 움직임, 전시공간의 공기에 따라

미세하게 움직이고 시작했다. 움직이는 조각상이라. 


무엇보다, 여자를 놀라게 한 건 거대한 구조물이 거의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완벽한 균형이란 정확히 반. 끝단과 반대쪽 끝단 중앙을 오차 없이 뚝 반으로 가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구조물은 제각각의 무게중심이 제각각 모여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하나의 위태로운 구성이 또 다른 위태로운 구성을 만나 균형을 이룬다. 


그리고, 위태로울 것만 같았던 이 여행도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여자는 엉성한 스텝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 

문득, 하루키의 <댄스 댄스 댄스>가 떠올랐다. 


“춤을 추는 거야”

라고 양 사나이는 말했다.


"음악이 울리는 동안 어쨌든 계속 춤을 추는 거야. 내가 하는 말 알아듣겠어? 

춤을 추는 거야. 계속 춤을 추는 거야. 왜 춤추느냐 하는 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 같은 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 같은 건 애당초 없는 거야.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발이 멈춰버려. 


그러니까 발을 멈추면 안 돼. 아무리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런 데 신경 쓰면 안 돼. 제대로 스텝을 밝아 계속 춤을 추어대란 말이야."


남자는 한 시도 멈추지 않고 몇 시간이고 무대에서 엉성한 스텝을 밟아갔다. 

그 역시도 이 여행이 끝에 달해있었기에. 



남자와 여자는 공항에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둘은 양볼에 입을 맞추며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었다. 


상공에서 바라본 대륙은 유달리 차가워 보였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완벽한 여행이었다.

그래도,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아르헨티나에서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지 못한 것.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찬 파도 소리만이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띠링띠링. 전화가 울린다. 

여보세.. 

목소리가 갈라진다. 


OOO님, 숙면은 잘 취하셨나요?

네. 다시 깨고 싶지 않을 만큼요.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26일까지 한 시간 남았습니다. 운전을 해서 댁까지 가면 11시 30분. 집에 들어가 샤워하고  맥주 한 캔 또는 와인이라도 좋아요. 땄을 때는 11시 50분. 아마, OOO님의 크리스마스는 십 분이 채 남지 않을 겁니다. 


그녀 바람대로,

크리스마스가 곧 지날 참이었다. 


OOO님, 바로 다음 예약을 도와드릴까요? 

괜찮다면, 나중에 해도 될까요? 지금은 정신이 없어서요. 

네, 물론 가능합니다. 하지만 자리가 없을 확률이...


비서는 예약스케줄 표를 확인하는 거 같았다.


99%네요. 기존 고객님들께 먼저 우선권을 드리는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예약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바로 퇴실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 

네. 


지금까지, 수면공작소였습니다. 


여자가 주섬주섬 일어나 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제와 똑같은 검은 바다다. 하지만 그 모양이 확실히 어제와는 달라져 있었다. 파도도 하루가 지난 것이다. 


19호실을 나왔을 때, 복도를 중심으로 쭈욱 나열된 다른 방들은 여전히 만실이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들도 좀 전의 자신처럼 잠에 빠져있거나 달콤한 잠에서 깨어 퇴실을 준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로비에 도착해 키를 비서에게 건네자, 그녀는 열쇠를 열어 어제 넣어놓은 차키, 지갑, 휴대폰을 꺼내 건네주었다. 밖에 나오자 아까보다 더 많은 눈이 퐁퐁 내리고 있었다. 지붕에 약간의 눈이 쌓이기도 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았다. 차를 주차하고 저벅저벅 걸어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서자 안은 어제 그녀가 청소해 놓은 그대로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고작 하루일 뿐이니까.  


비서가 알려준 대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어제 먹고 남긴 스파게티를 데워 먹고, 화이트 와인을 한 잔 가득 따라 마셨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그녀 말대로 정확히 1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0분 밖에 남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도 지난 것이다. 


텔레비전을 켜고 유튜브에 연결했다. 음악을 찾다 "새해가 가기 전에 꼭 들어야 할..."이라는 플레이리스트롤 보고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도로 가져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OOO님. 수면공작소입니다. 

 혹시, 12월 31일도 예약할 수 있을까요?

고객님. 죄송합니다. 그날은 예약이 가득 차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내년 예약에 추가할 수는 있나요?


비서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스케줄표를 확인하는 거 같았다.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네! 딱 한 자리 남아있습니다. 가능하세요. 

네, 그렇게 진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시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선택하신 상품은 총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24년 크리스마스 패키지로 12월 4일 11시부터 12월 25일 11시이고 다른 하나는 새해 패키지로 12월 31일 11시부터 1월 1일 11시까지. 총 두 건으로 예약돼셨습니다. 예약 전날 문자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재워드림(Dream), 수면공작소였습니다. 





더 많은 글은 라이터스짐 블로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writerzgym.com/

구직남 인스타그램(@9_zig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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