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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깨 Oct 10. 2023

험난했던 2주에 대하여

네덜란드의 삶을 정리하고 오스트리아에서의 두 번째 교환학기를 위한 과정


다음 학기 교환학생을 위해 비자를 발급받아야 했다. 원래라면 이번 네덜란드에서의 학기 종료 후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 내에 위치한 오스트리아 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을 예정이었지만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비자를 발급받지만) 2020년 겨울 당시 새 바이러스 오미크론에 의한 한국의 코로나 관련 규정 강화로 입국 시 10일 격리가 필수가 되었고, 난 한국으로의 귀국을 포기한 후 유럽 현지에서 비자를 발급받는 최초의 교환학생이 되었다. 


첫 번째. 서류 준비하기
비자를 위해 모은 서류들. 다 모아보니 약 70장이었다. 

준비해야 할 서류가 정말, 정말 많았다. 그중 특히 non EU 국가에서 온 외국인이 유럽 내의 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선 현재 유효한 거주허가증 또는 비자를 소지하여 합법적으로 유럽에 거주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네덜란드에서 교환학기를 수행하고는 있었지만 비자 또는 거주허가증에 대한 정보를 받은 기억은 없었다. 그때부터 불안감이 훅 밀고 들어왔다. ‘나 합법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거 맞나?’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 유일하게 증명된 신분인 학생으로서 다니고 있는 네덜란드 대학에 전화하는 것. 수차례의 메일과 전화통화 끝에 '본인은 현재 거주허가증을 소지하고 있으며, 거주허가증을 실물로 받기 위해선 고속기차로 1시간 반 거리에 위치한 이민국 센터에 직접 방문하여 픽업해야 한다'는 안심되면서도 동시에 아뿔싸를 외치게 되는 아이러니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바로 기숙사 근처에 세워두었던 자전거를 타고 근처 기차역 티켓 부스를 방문해 현재로부터 가장 빠르게 이민국 센터가 위치한 Zwolle로 향하는 기차를 끊었고, 다음날 이른 새벽 졸린 눈을 비비며 기차에 올라 꼬박 하루를 소요한 끝에 거주허가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네덜란드에 거주한 지 5개월이 된 시점이었다.

 

다른 모든 서류들도 외국에서 준비하기엔 어려움이 너무나 많았다. 이를테면 은행 잔고를 증명하기 위해 일정 금액 이상의 돈을 계좌에 넣어놓아야 했는데 한국으로부터 송금되는 돈은 최소 이틀은 걸렸기 때문에 송금이 늦어져 곤란한 경우가 많았다. 하루는 금액을 맞추기 위해 가지고 있던 현금을 입금하려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입금이 가능한 ATM기를 발견할 수 없어 무작정 시내 한가운데 있는 은행 본점에 찾아가 방법을 물어본 적도 있었다. 오뚝이 3분 카레 사러 오뚜기 본사 들어가서 회사 직원에게 물어보는 것과 같은 이치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엄마가 한국에서부터 보내준 서류 택배 속 쫀드기 하나와 편지. 서류택배엔 종이만 넣을 수 있지만 타지생활 하는 한국인에겐 저 쫀드기 하나마저 너무나 귀하다.

원본과 사본을 준비해야 하는 것도, 정말이지 어려웠다. 한국이었다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원본 서류들을 네덜란드에서 구하기란 불가능했고, 결국 돈을 더 들여 한국에서부터 원본 서류들을 특급 배송으로 전달받았다. 오스트리아 측 대학에서도 내게 필요한 서류들을 원본으로 보내주었는데, 이유 없이 택배는 배송 중 어느 한 창고에서 멈춰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내가 네덜란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완전히 이곳을 떠날 때까지 서류는 그곳에 멈춰 도착하지 않았다. 





두 번째. 서류 인쇄하기
매일매일이 자전거 타기였던 네덜란드 일상.

왜 서류를 인쇄하는 것마저 하나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었는지 의문이겠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간신히 모은 서류를 인쇄하는 것조차도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하필 비자를 준비하고 있을 때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퍼진 바이러스 오미크론 사태는 내가 거주하고 있던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Groningen마저 처음으로 락다운을 선언하게 만들었고, 식료품점을 제외한 모든 가게들이 강제로 기약 없는 임시휴업을 하게 되었다. 동네에 있던 복사가게마저 문을 닫아 길거리라도 나가서 집에 복사기가 있을 만한 이를 찾아 친구가 된 후 조심스럽게 부탁해야 하나 (진짜)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몇 주 후 대사관으로 출발하기 며칠 전 기적적으로 락다운이 일부 해제되었을 때 부랴부랴 자전거를 타고 복사가게에 방문해 비로소 서류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때의 감격이란!





세 번째. 비자 발급 대사관 찾기
훗날 극적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한 끝에 도착한 오스트리아 대사관 전경.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는 대사관이 어느 대사관인지 알 수 없었다. 나처럼 유럽에서 비자를 발급받는 교환학생은 유일무이했기 때문에 인터넷 그 어디에서도 정보를 찾을 수 없었고, 따라서 직접 찾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 날을 잡고 모든 대사관들과 전화를 했다. 안 그래도 당시 영어로 대화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나에게 전화로 대사관 사람들과 비자를 논하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쥐가 궁지에 물리면 고양이 발이라도 물어본다고 했던가. 당시 내가 가장 무서웠던 건 대사관 사람들과 나눌 건설적인 영어 대화가 아닌 비자 발급 실패로 인한 유럽 강제 추방이었다. 네덜란드 내의 한국 대사관, 네덜란드 내의 오스트리아 대사관, 오스트리아 내의 오스트리아 대사관, 그리운 한국 내의 한국 대사관까지. 꼬박 7시간 반이 걸린 전화 릴레이 끝에 결론은 네덜란드도 오스트리아도 아닌 독일 뮌헨에 위치한 오스트리아 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기숙사로부터 기차로 8시간 반 떨어진 거리였다.





네 번째. 대사관까지 이동하기

한밤중 기차에서 쫓기듯 내려 환승하는 길.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사진마저 흔들린다.

기숙사에서 대사관까지는 기차로 약 8시간 반이 걸렸다. 총 세 번의 환승을 해야 했고 난 23kg짜리 대형 캐리어를 끌며 등에는 12kg짜리 백팩을 메고 있을 예정이었다. 독일 기차는 늘 연착과 취소가 일상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던 터라 이번에도 연착이 될 것이라고는 어렴풋이 예측했지만, 젠장! 이번엔 더 스케일이 컸다. 두 번째 환승 후 잘 운행하던 기차는 한밤중 선로 한가운데에서 난데없이 고장 나 버렸고, 예상했던 시간보다 네 시간을 더 지연시켰다. 두 번째 기차의 이유 모를 고장은 내가 타려고 했던 다음 기차와 그다음 기차마저 모두 놓치게 만들었고, 불친절한 독일어 안내음성은 무슨 상황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인터넷도 터지지 않는 숲 한가운데에 멈춰버린 기차에 앉아 이유도 모른 채 두리번거리며 기다리던 불쌍한 난 별안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신기할 따름일 웅얼웅얼 독일어 안내음성이 끝나자 모두 일어나 짐을 가지고 내리는 사람들에 휩쓸려 영문도 모른 채 추운 밤 길로 내몰렸다. (놀라운 건 그 많은 인원 중 그 누구도 화를 내거나 짜증 내지 않고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짐을 챙겨 자연스럽게 기차에서 내렸다는 것이다. 당시 시간은 약 밤 10시였다.) 수많은 무리에 동양인은 나뿐이었고, 난 끝까지 이유도 모른 채 그들을 따라 터널을 건너고 짐을 들어 계단을 올랐다. 나중에서야 알고 보니 내가 타고 있던 기차는 결국 운행이 중지되었고, 다른 기차가 가던 도중 낙오된 승객들을 픽업하러 오는 중이었다. 하하하.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난 예상보다 네 시간이 지연된 채로 열두 시간 만에 뮌헨에 도착했고,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씻고 침대에 누우니 정확히 오전 2시 2분이었다. 






여기까지는 오스트리아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내가 겪은 과정이다. 놀랍게도 가장 큰 어려움이자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순간은 생략되었는데, 이유는 그 과정 역시 너무나 긴 (그리고 나름 감동적인) 서사를 지니고 있어 따로 풀어가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 이제부터는 내가 어떻게 네덜란드의 기숙사에서 체크아웃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번외 첫 번째. 기숙사 퇴실


1월 31일 전에는 기숙사를 비우고 체크아웃을 해야 했다. 뮌헨에 위치한 오스트리아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먼 거리를 왕복하느니 비자를 발급받으러 가는 날 아예 기숙사를 퇴실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날짜는 1월 20일이었다. 

기숙사 침대에서 바라본 내 방의 전경.




두 번째. 박스 구매하기
자전거 앞에 실은 박스들. 자전거를 탈 수가 없어 내려서 그대로 집까지 끌고 갔다. 

짐이 정말 많았다. 정말 정말 많았다. 추운 겨울에 대비해 챙겼던 전기장판이나 담요, 현지 이케아에서 장만했던 오리털 이불과 두꺼운 옷들이 많았기 때문에 캐리어에 들어가지 않는 모든 짐들을 넣을 박스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역시 급작스러운 락다운으로 인해 박스를 판매하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버린 상황. 고민에 고민을 하다 집 주변 대형 마트를 무작정 찾아가 남는 박스가 있는지 물어보고 크고 작은 박스들을 얻어왔다. 박스가 많지 않아 작은 와인 박스까지 일일이 모아 와야 했는데, 이건 뭐 박스라고 하기도 애매한 사이즈라 옷 하나를 구겨 넣으면 더 이상 다른 게 들어갈 공간도 없었다. 심지어는 몇몇 박스가 면적이 너무 커서 자전거 앞 바구니에 얹은 채로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던 네덜란드의 아름다운 기후 덕에 박스가 다 젖어버려 기숙사에 쫄딱 젖은 채로 도착해 박스가 마를 때까지 방에 널어둔 적도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후 락다운이 잠시 일부 해제되었을 때 기적적으로 이케아 역시 해제 대상에 포함돼 난 눈물 젖은 마트 박스 대신 이케아의 튼튼한 이사 박스를 얻을 수 있었다.

내 소중한 짐들이 든 여섯 개의 박스. 빈 박스는 퇴실 전에 넣을 이불용 박스다. 



 

세 번째. 기숙사 퇴실 날짜 잡기


기숙사를 퇴실하기 위해선 담장 직원 중 한 명과 체크아웃 약속을 잡아야 했다. 늘 그랬듯이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내도 하루 종일 답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고, 이메일 제목에 '***emergency***'를 붙인 끝에 간신히 연락이 닿은 내 담당 직원은 내가 체크아웃을 원하는 날 시험이 있다며 부탁을 일방적으로 거절했다. 결국 직접 사무실로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체크아웃 날짜를 잡았다. 





네 번째. 택배 픽업 날짜 잡기
기숙사 정문. 이곳에서 택배회사를 한 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끝내 우린 만날 수 없었다. 

박스에 짐을 넣어 보니 가장 큰 이사 박스로 6개가 나왔다. 내가 박스들을 우체국까지 옮길 순 없어서 픽업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큰 비용임을 감수하고 서비스를 신청한 후, 비자 발급을 위해 독일로 떠나는 날 오전에 짐을 가져갈 것을 요청했다. 만약 픽업 기사가 도착했을 때에 발송자와 연락이 닿지 않으면 그냥 가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도착 전 한 시간 반부터 기숙사 1층 로비에 나와 한참을 서 있었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도 찾아오지 않길래 문의해 보니, 이미 픽업이 취소되었다는 답변을 들었다. 기사들과 연락할 방법도, 취소된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간신히 찾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 이유를 물어보니 그들은 분명 방문하지 않았지만 방문했다고 했고, 내겐 연락이 오지 않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했다. 기차를 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픽업서비스를 다시 한번 예약한 뒤 실례를 무릅쓰고 기숙사 담당자에게 그들이 온다면 짐만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담당자의 미간에 잠시 드리워졌던 찡그린 주름을 난 애써 무시했다. 고마워요 담당자님) 하지만 이번엔 길 앞까지 나가서 한참을 기다렸음에도 택배 픽업 업체는 또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아까와 같은 이유로 길을 찾지 못했다며 픽업을 취소했다. 기차를 놓치면 비자발급마저 무산될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국 난 짐을 버려둔 채 기차에 올랐고, 내 짐들은 기숙사 퇴실 일자 후엔 버려질 운명이 되었다. 





다섯 번째. 코로나 QR코드 발급받기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늘 지나갔던 길. 조금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풍경이 예뻐 늘 이 길로 다녔다.

다른 여러 지역으로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서는 유럽에서 인정하는 EUDCC가 필요했다. 난 백신을 2차까지 한국에서 접종했기 때문에 이를 유럽식으로 변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아무도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난 무작정 인터넷에 ‘EUDCC 변환’, ‘유럽 백신 발급’ 등을 검색해 보고 네덜란드 이민국과 코로나 담당 부서에 (또!)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대기시간이 기본 30분이라 하루를 꼬박 전화만 하는데 보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화를 거듭한 결과, 집 근처 센터에서 백신 증명서를 QR코드로 변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날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자전거로 비 오는 거리를 30분 달려 EUDCC를 발급받았다.





여섯 번째. 유심 해결하기


외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안정적인 휴대폰 데이터다. 모든 연락이 휴대폰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특히 난 전화를 정말 많이 해야 했기 때문에 하하) 이 기능을 하는 유심칩이 정상 작동하는 것이 누구보다도 중요했다. 난 유럽에 머물 6개월 동안 사용할 유럽 전용 유심을 한 달 약정으로 6개 구매해 가져왔었고, 비자를 준비할 당시 다섯 번째 유심이 기한을 다해 마지막으로 유심을 변경하게 되었다. 여태까지 사용했던 5개의 유심은 모두 정상 작동했었기 때문에 마지막 유심이 ‘서비스 없음’으로 뜨리라고는 예상할 수 조차 없었는데, 하필 가장 유심이 필요한 때에 나의 마지막 유심은 불량이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여러 시도와 실패 끝에 고치는 것을 포기하고 유심을 새로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다. 네덜란드 내의 유심 가게들은 락다운으로 문을 닫았기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 계신 이모께 부탁해 유심을 구매한 후 특급배송으로 보내달라고 부탁드렸다. 유심 가격 3만 원, 24시간 이내에 도착하는 대신 배송료 6만 원. 총 9만 원을 썼다. 목요일에 배송해 금요일에 도착할 줄 알았던 유심은 주말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았고, 코드를 이용해 추적해 보니 배송한 지 4일이 지나도록 파리에 멈춰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모에게 말씀드린 후 이모가 직접 택배사에 방문해 이유를 물었지만 택배회사 직원들은 아무도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며 문제 해결조차 해주지 않았고, 그럼 반품이라도 해달라는 말에 그것도 안된다고 말을 잘랐다. 그렇게 배송비 6만 원짜리 유심은 아직도 파리 물류창고 어딘가에 멈춰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약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오스트리아에서의 교환학기를 마무리하던 중 나는 뜻밖의 메일을 받았다. 내 유심이 네덜란드 기숙사에 도착했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무려 8개월 만에!




나는 정말 긍정적인 편이다. 모든 일에는 교훈이 있고 힘든 만큼 좋은 일도 있다 믿었기에 조금 속상하거나 힘든 일이 생겨도 그러려니 잘 넘기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일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문제를 넘기기엔 턱없이 커다랗고 압도적이었다. 6개월 내내 실내에서조차 마스크를 쓰지 않던 네덜란드의 작은 동네가 느닷없이 락다운을 선언해 박스, 테이프, 유심 등 사소한 물건들을 구매하는 것을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는 일처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 것. 갑자기 잘 작동하던 유심이 하필 마지막 달 불량이었던 것. 택배 픽업을 신청해도 오지 않고 취소해 버려 내 짐이 두 번이나 버려진 것. 독일로 가는 기차가 도중 고장 나 꼬박 4시간을 길에 멈춰 있어야만 했던 것. 복잡할수록 차근차근 하나씩 해결하면 된다 생각했던 나에게 시련은 끝없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발을 걸어 넘어트렸고, 힘들게 쌓은 탑에 마지막 조각을 얹을 때 밑동에 주먹돌을 던져 모든 것을 무너트렸다. 어찌 저찌 문제를 해결하고 비자를 위해 독일 뮌헨으로 향하던 중 택배 픽업이 별안간 또 취소되었고 내 짐이 그대로 기숙사에 버려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온몸에 힘이 빠졌다. 기차 안에서 네 번은 운 것 같다. 

독일로 향하는 기차 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 뮌헨에 도착해 비자 신청을 완료한 후 택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획해 두었던 여행(노르웨이로 향하는 비행기표와 예매해 둔 숙소)을 포기하고 다시 8시간을 거쳐 네덜란드 기숙사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체크아웃 때 방 현관을 비롯한 모든 키를 이미 반납했기에 내가 다시 기숙사에 들어가 키를 받고 하룻밤을 더 묵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지만, 내겐 선택권이 없었다. 대사관에서 비자를 신청한 후 메인 터미널로 향하는 트램을 탑승해 네덜란드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핸드폰 화면에 문자 알림 메시지가 떴다. 택배회사에서 내 짐들을 픽업하고 있는 사진. 기숙사 담당자에게 온 사진이었다. 

기숙사 담당자에게 온 사진. 내 택배박스를 픽업하는 모습이었다.  

기숙사 담당자로부터 택배회사가 내 짐들을 픽업하는 사진과 함께 '너의 짐은 모두 픽업해 갔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문자를 받았다. 대사관에 들어가기 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요청했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픽업 요청이 기적적으로 성공해 택배회사에서 내 물건들을 모두 가져간 것이다. 고로 난 정말 네덜란드로 돌아갈 필요 없이 독일 뮌헨에서 비자를 무사히 발급받은 후 계획해 두었던 노르웨이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오스트리아로 넘어가 두 번째 교환학기를 보내면 되는 것이었다. 나의 네덜란드 교환학기는 그렇게 기숙사 담당자의 문자 하나로 마무리되었다. 

기차가 고장 나 다 같이 이동하던 길. 이 중 누군가가 나의 짐을 계단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럼에도 좋은 일이 많았다' 같은 말 따위로 이 모든 일들을 아름답게 포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기분 좋은 순간들이 있던 건 사실이다. 너무 힘이 들어 주저 않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날 이 상황에서 버틸 수 있게 도와준 고마운 순간들과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 락다운이 기적적으로 풀려 이사박스와 테이프, 유심을 구매할 수 있었던 것, 기차가 고장 나 환승해야 했을 때 내 무거운 짐을 직접 들어 계단 위로 옮겨 준 이름 모를 동승객, 동네에서 3-4시간 떨어진 곳에서만 발급받을 수 있었던 백신 QR코드가 내 기숙사 바로 뒷 건물에서도 가능했던 것, 백신 QR코드를 발급받을 때 환한 미소로 이것저것 친절하게 설명해 줬던 네덜란드 직원.

이른 아침 비자 발급받으러 가던 길. 

뮌헨에 위치한 오스트리아 대사관에 방문해 비자를 발급받았다. 대사관 직원이 안경 너머 매서운 눈매로 내가 준비한 서류들을 한 장 한 장 훑으며 천천히 넘겼고, 약 10여 분간의 정적 끝에 내 여권에는 오스트리아 비자 종이와 함께 대사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던 비자 발급 과정과 더불어 또다시 지연된 독일 기차 탓에 공항에 늦게 도착해 버린 난 눈앞에서 노르웨이 비행기를 놓쳤지만, 40만 원을 들여 새로운 표를 사고 공항에서 8시간을 기다려야 했음에도 드디어 오스트리아행 비자를 발급받았다는 것과 동시에 다시 네덜란드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날아갈 듯 행복했다. 

40만 원 더 들여 산 노르웨이 오슬로 행 비행기. 8시간의 대기 끝에 비행기에 올랐다.

비자를 발급받기 위한 2주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이 벌어졌지만, 어쩌면 순간마다 벌어진 일들의 좋고 나쁨을 따지고 내 지지리도 없는 운을 탓하기보단 마음가짐을 흐트러지지 않도록 끝까지 잘 유지하는 것이 우리가 힘든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일지 모르겠다. 배경이 밝으면 검정도 밝은 회색이 될 수 있고, 배경이 어두우면 모든 밝은 색도 흐려지기 마련이다. 다시 한번 밝은 마음을 끝까지 잃지 않았던 나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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