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가리
1979년3월30일!
내 인생에서 잊을수 없는 큰 충격적인 날이다.
세살 된 어린 아들을 업고 사촌언니 집에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집에 돌아왔는데 사람들이 웅성웅성 하며 주변이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누구네 신랑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청산가리 약을 먹고.....
스레트지붕(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석면 슬레이트)으로 된 방 한칸 부엌 하나 햇빛도 잘 안드는 어둑 컴컴한 방에 들어갔더니 이미 시체를 가리워 놓은 상태다.
누구네 신랑이 바로 나의 남편...
통곡의 눈물이 쏟아졌다. 어이없는 현실 앞에 맥이 풀리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겨우 남편 나이33살이고 내 나이 29살인데.
결혼 8년만에 벌어진 이 사건에 여러 감정이든다.
이렇게 가다니 야속하고 이만큼 살겠다고 그렇게 매일을 죽어라 싸웠나 싶고,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온 살아온 세월이 한량이 없다.
안타까워 하는 주변의 소리들...
저 어린 3남매는 어떻게 하라고 목숨을 버리나,
참 배신자 같으니라고.
힘들다고 마누라 자식 버리고 혼자만 가냐고 비난 하는 목소리들..
이런 와중에 경찰이 나와 조사를 한다.
성격 차이로 부부싸움이 잦았다
남편의 성격은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인데다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먹기를 좋아했다. 언변이 좋으니 술자리를 같이하는 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은 '변호사'였다.
일을 하기는 싫어해서 술을 마시면 출근하지 않았다.
참을성이 없어 기분이 안 좋거나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나에게 손지검을 한다
아내는 자고로 온순하고 순종적이며 말댓구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남편상이다.
처음 결혼해서는 그런 아내가 되고자 남편을 맞추어 주었다. 나도 수용을 하고 다 맟춰주며 살았다.
살면서 마음에 들지안는 일들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커가는데 책임감이 없이 술을 자주 먹는 모습을 보이니 점점 마음에 들지 않는것이다.
술을 먹으면 이튿날 회사를 안가는일이 잦아지니 싸움의 발달은 그렇게 시작된다.
회사를 못 나갈 정도로 왜 술을 마시냐, 일을 안하면 애들은 어떻게 키울 것이냐 나의 잔소리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둘의 신뢰는 점점 깨지고 하나 둘 결혼한 친구들과 사는게 비교가 되니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남편은 다시는 술을 안 먹겠다고 빌고 그러면 며칠은 잠잠했다.
그러나 삼일을 마다않고 다시 술을 찾았고 나아질것이라는 생각이 없으니 나라도 직장을 구해야 했다.
어린 아이들을 친정 엄마한테 맡기고 보험회사로 첫 출근을 했다.
남편 퇴근 시간 보다 더 늦게 집에 도착하면 한바탕 소란이 나고 감정조절이 안 되는 남편은 나의 얼굴로 그냥 손을 휘갈귄다. 순간 불이 번쩍 나니 참을 수 없어 죽어라 대든다.
서로의 화가 고조가 되면 살림도 던진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친정 엄마와 아이들, 동네 사람들은 늘 불안하다.
남편 친구들은 부지런한 성격에 인사성이 밝고 예쁜 마누라를 얻어 부럽다는 칭찬이 남편은 늘 거슬리는 모양이다. 점점 직장을 다니는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신혼 초 같은 고분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지 않는다며 이런 나를 더 못마땅해한다.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자라고 있고 직장이랍시고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생각도 달라졌다.
남편 말에 쩔쩔매던 나는 뱃장있게 큰 소리도 내뱉으니 그 모습을 남편은 더 참을 수 없어했다.
더욱이 내가 잔소리 하고 대들고 맞으면서도 그 사람에게 순종할 수 없었던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다
어느 날 밤은 나를 죽이겠다고 부엌칼을 가지고 나와 소동을 부리니 친정엄마 동네 이웃들 모두 깜짝 놀랐다. 다. 이런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어 친정 엄마에게 딸 둘(그 당시 8살, 5살이다.)을 맡기고 며칠 남편이 잠잠해지면 돌아오겠다고 3살짜리 막내 아들을 업고 사촌 언니집에 갔다.
몹시 마음이 불안하고 편치 않았다.
겨우 하룻밤 자고 아침에 서둘러 집에 왔는데 이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날 밤 내가 통곡하는 소리,
사람들의웅성거림,
그를 원망하는 나의 목소리,
불쌍함
억울함
얄미움
창피
29살 젊은 나이에 친정엄마, 시어머니, 아이들을 돌아보니 더 마음이 찢어지고 아팠다.
사는 것도 힘든데 죽음을 정리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다. 어떻게 장례를 치루어야 하는지 암담하기만 했다. 친지 어르신들이 오셔서 아직 아이들이 어리니까 화장으로 장례를 마무리하자 결정하고 송추 화장터에서 그 모든 것ㅁ을 태웠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1971년 내 나이 스무살 8월 무렵이다.
미용사로 일을 하면서 미용재료를 파는 동미사라는 재료상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가끔 마나 통성명이나 했지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은 적이 없다.
내가 미용재료상에 들를때마다 나를 마음에 든다며 소개해 달라는 사람을 만나니 그의 이름은 한석구 나보다 10살 많은 사람이나 대학도 나왔고 쥬단학 이라는 화장품 원주 대리점을 관리하는 엘리트 청년이었다.
스무살의 여자와 서른살의 남자! 8남매의 장남 그 당시 결혼 정령기를 넘긴 그와 나는 결혼 상대로 맞지 않느다고 판단했다. 나는 하나 밖에 없는 친정엄마와 같이 시집을 가야하는 처지니 맞는 결혼이 아니다.
통성명만 하고 지낸 지금의 남편도 알고 지내는 지인이니 이런 사연을 털어놓으면 은근히 한석구에게 전해주기를 바랐다. 에게 우연히 이런 사연을 털어놓았더니
오히려 남편은 가난한 형편에 내가 동질감이 있어 그날 이후 호감이 생겼나보다.
잘생긴 얼굴, 좋은 언변, 쌍거풀이 진하게 있는 매력적인 얼굴과 친절한 태도에 우리 사이는 급격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데이트 하고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는 사이는 아니다.
11월 초 어둠이 짙어오는 저녁에 갑자기 남편 친구가 미용실을 들어서면서 하는말
" 미스 김! 큰일이 았어. 춘식이가 서울서 내려오다가 사고가 났어" 그 소리에 어디에 있냐 무자 마자 내 달려갔다. 알고 보니 조그만 여인숙이다. 다친 친구를 위해 약을 사오겠다고 슬그머니 나간 친구와 작당모의를 한 것이다.
그날 밤 생긴 아이가 지금의 큰 딸이다.
결혼식도 없이 내가 일하고 있는 미용실에서 동거부터 시작했다.
딸의 임신사실을 알게된 친정엄마는 결혼을 서두르기 싲가했다.
일자리도 없는 백수라는 사실을 알턱이 없는 친정엄마는 남편을 좋아했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시어머니가 사시는 서울 신정동 에 인사하러 왔다.
시어머니는 남편3살 때 아들을 데리고 지금 시아버지와재혼을 하셔서 4남매 를 두신 어머니다.
양가의 어렵지 않은 허락속에 72년 4월21일로 결혼날짜를 잡았다. 그 전에 직장을 구하기로 백방 알아봤지만 마땅치가 않았다. 시간은 흘러가고 배는 불러오고 뒤늦게 직업이 없다는 걸 안 친정 엄마는 친정 엄니는 노심초사 걱정이 많으셨다.
별 수 없이 미용실 옆 조그만 가게에 연탄 가게를 차렸다. 미용실에 손님이 오면 그 손님에게 연탄 주문을 받아 배달해 주는 일을 남편이 하는 것이다.
각게를 지키지 않고 미용재료상 동미사에 가서 수다를 떠는 시간이 많다보니 주문이 오면 겨우 연락해서 배달해 주는데 성실하지 않은 그의 태도가 몹시 못마땅했다. 연탄배달이 창피하지만 딱히 일자리가 없으니 그렇ㄱ 동고 먼저 결혼을 한것이다.
나의 첫번째 남자는 그렇게 여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