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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 대하여

by 이정호

서론: 관계라는 이름의 안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 속에서 처음 숨을 쉰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관계 속에 놓인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 삶은 이 섬세하고도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천천히, 때로는 아프게, 흘러간다.


관계는 우리를 성장시킨다. 누군가의 웃음 속에서 기쁨을 배우고, 위로의 손길 속에서 회복을 경험한다. 하지만 동시에 관계는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사랑했기에 더 아프고, 가까웠기에 더 멀어지는 역설 속에서 우리는 자주 길을 잃는다.


그래서일까. 관계는 언제나 쉬워지지 않는다. 이해하려 할수록 더 미묘해지고, 꼭 잡으려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안개 같다. 우리는 평생을 관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서툴다.


본론 1: 가까운 관계의 아이러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가까운 관계다.


가족. 부부. 자녀. 이 단어들은 따뜻하지만, 동시에 무겁다. 멀리 떨어진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일정한 거리가 완충 역할을 해준다. 예의라는 이름의 경계선이 있고, 사회적 가면이라는 보호막이 있다. 하지만 가족은 다르다. 그 거리가 없다.


감정이 겹치고, 기대가 섞이며,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오해가 자란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당연히 알 거야"라는 기대가 생기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상처받는다. 작은 한마디가 마음을 깊게 흔들고, 사소한 오해가 오래도록 남는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이 말속에는 원망보다 실망이 더 크다. 사랑하는 만큼 기대했고, 가까운 만큼 이해받고 싶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완벽히 알아주길 바라고, 내 마음을 거울처럼 비춰주길 원한다.


하지만 결국 깨닫게 된다.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가까워도, 세상에 완벽히 닮은 두 마음은 없다는 것을. 그 깨달음은 쓰라리지만, 동시에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본론 2: 조율이라는 이름의 사랑


관계는 맞추는 것이 아니라 '조율'하는 것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함께 연주할 때, 두 악기는 같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의 다른 음을 존중하면서, 어긋난 리듬 속에서도 함께 울릴 수 있도록 귀를 기울인다. 관계도 그렇다. 완벽히 같아지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 속에서 조화를 찾아가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관계를 '완벽히 이해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모든 감정을 공유해야 하고, 언제나 한마음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관계란 본디 완성될 수 없는 이야기다.


사랑처럼, 죽음처럼, 평생을 두고도 끝내 알 수 없는 미스터리다.


그렇기에 관계에는 노력보다도 '시선'이 필요하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진짜로 가진 모습을 보려는 시선. 그리고 나 자신 또한 완벽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시선.

그 시선 속에서 관계는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때로는 침묵이 말보다 깊은 이해를 전한다. 함께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이, 백 마디 대화보다 더 큰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서로의 다름이 갈등의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축복이 될 수 있다.


완벽히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다. 그저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본론 3: 느림의 미학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도를 요구한다. 빠른 답변, 빠른 결과, 빠른 성과.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이 숫자로 계산되고, 생산성이라는 잣대로 평가받는다. 관계마저도 예외가 아니다.


"이 관계는 나에게 도움이 될까?“


"이 사람과 있으면 나는 발전할까?“


우리는 어느새 관계를 손익의 계산 아래 두려 한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런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관계는 언제나 비효율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며, 느리다.


그 느림 속에서 우리는 인간다움을 배운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나누는 대화. 아무 생산성 없이 함께 보내는 오후. 답을 찾지 못한 채 끝나는 진솔한 고민. 이런 순간들은 결과로 측정할 수 없지만, 우리 마음 한구석에 오래도록 남는다.


관계는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이다. 빨리 도착하려 서두르기보다, 함께 걷는 그 시간 자체를 소중히 여길 때 비로소 관계는 빛난다.


결론: 이해하려는 시도 그 자체


어쩌면 우리는 평생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마음도, 연인의 마음도, 심지어 나 자신의 마음조차 때로는 알 수 없다. 그래도 괜찮다.


관계를 단순히 '잘 유지해야 하는 일'로 보기보다, 서로의 차이를 통해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로 삼는다면 어떨까. 이해되지 않음 속에서도 머물 줄 알고, 다름 속에서도 존중할 줄 아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관계의 시작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다 알지 못해도 좋다.

때로 서툴러도 좋다.

그저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함께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상대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국, 관계란 나를 닮은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발견해 가는 여정이다. 그 여정은 때로 험하고, 때로 아름답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관계란 완벽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시도' 그 자체임을.

그리고 그 시도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간다.


"가장 아름다운 관계는 완벽한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불완전함을 껴안을 줄 아는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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