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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퐁당 Jun 08. 2023

마동석을 꿈꾸던 그녀 글을 쓰다


2058년 5월 12일
새벽에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잤다.
내 나이 81세 35년째 통잠을 자고 있다. 이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 신생아 시기를 지난 아기들에게서나 통잠 자는 우리 아기라는 표현을 쓰는데 81세 통 잠자는 할머니라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35년 전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우리에게 혜림이가 오고 현수가 온 후 내 몸은 통잠은 꿈 도 꿀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손가락 통증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통증이 나타났다. 당연한 결과 일지 모른다. 41세 혜림이, 44세 유산 2번, 45세 현수를 낳았으니, 나의 몸은 임신 전 후로 나뉜다. 없던 통증이 생겼지만 아이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삶의 행복도 생겼다. 여행하며 자유로운 그 전의 삶도 행복했지만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난 지금의 삶을 선택할 것이다.


 열심히 걸었다. 하루 2시간은 기본으로... 조금씩 좋아지는 걸 느꼈고, 난 통증을 모르고 살아왔다. 결혼 전에도 행복했지만 뭔지 모를 불안이 있었다. 나의 삶은 특별하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거 같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다 보니 의미 없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 때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았고 삶의 회의가 느껴졌다. 결혼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들이 생겼다 나의 삶은 정말 특별해졌지만 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편안하게 물 흐르듯 살다 보니 삶의 회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마동석을 꿈꿀 때가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강한 이미지와 정의로움, 귀여움과 유쾌함까지 내가 가지고 싶은 여러 가지를 마동석은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되고 싶었다. 난 여자인데...

난 지금 글을 쓴다. 마동석은 되지 않았지만 지금 난 개운한 통잠에서 일어나 사랑하는 사람과 아침을 함께한다.

 오늘은 내게 특별한 날이다. 벌써 내가 쓴 그림책으로 100번째 사인회를 여는 날이다. 99번째 사인회에서 만난 21살의 청년이 떠오른다. 아직 청년이라 말하기도 낯선 어린 얼굴의 청년은 수줍게 종이를 내밀었고 꼭 만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마웠다. 20대를 보면 그저 ‘저때로 돌아가고 싶다.’‘저 피부 좀 봐 부럽네’라고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20대를 떠올려본다. 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열심히 살았고 최선을 다 했다. 내가 예쁘고 풋풋했는지 잘 모르겠다. 하고 싶은 것도 마음껏 했으므로 후회도 없고, 지금의 내 삶이 좋다. 지금처럼 늙어서도 내 아이와 자연스럽게 손잡고 포옹하고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는 부모가 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고 있는 것도 너무 행복하다. 혜림이를 보며,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이가 되면 우린 없을 수도 있겠다고, 참 많이 이야기 나누었는데, 벌써 혜림이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이가 되었다. 각자의 일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아이들을 보면 잘 살아왔구나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집착하지 않고 내 일을 하면서 뒤에서 아이들이 올바르게 자랄 수 있게 응원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혜림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들려오던 생각하지 못했던 말들은 나에게 그림책작가라는 꿈을 심어주었고, 그렇게 나는 혜림이가 펼쳐 놓은 구름과 고래와 아빠의 콧구멍으로 그림책을 엮었다. 내 그림책과 내가 좋아하는 여러 책들을 바다가 보이는 [FOREST LIM 북카페]에 모두 꽂아 두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를 보고 싶은 사람들 모두 자유롭게 책도 읽고 글도 쓰는 공간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세월이 쌓이며 망설이는 일들도 많았지만, 나의 추진력은 멈추지 않았다.
“다시마 세이조”의 뛰어라 메뚜기라는 책이 생각난다. 35년 전 글을 쓰고자 만났던 수업에서 알게 된 책이다. 나뭇잎 뒤에 숨어있는 메뚜기는 나와 어울리지는 않는다. 난 숨어있고 싶지 않은 사람이지만, 가끔 숨고 싶을 때도 생긴다. 나뭇잎 뒤에 숨어 있었지만 온 힘을 다해 날개를 펼쳐 자기 힘으로 날 수 있으니, 정말 기쁘고 즐거웠다며 메뚜기는 높이높이 날았고, 자기 날개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는 구절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난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운 나쁜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한다고 하는데,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좋은 부모님을 만났고, 언니와 오빠도 있으며, 평생 함께할 좋은 친구가 있고, 그 친구와 많은 곳을 여행하고 경험했으며, 사랑은 이런 거구나 알게 해 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늦은 나이에도 큰 어려움 없이 딸과 아들을 낳고, 원하는 일 마음껏 하며 이렇게 살아왔으니, 이보다 운 좋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이어령의 마지막수업]에서 이어령 선생님은
     젊었을 때는 관심이 최우선이었어.
     사오십대 되니 관찰을 알겠더군.
     늙어지니 관계가 남아.
     관계가 생기려면,
     여러 대상에 한꺼번에 기웃거리면 안 돼.
     데이트하는 곳에 가봐.
     열 명 있어도 한 명만 보이잖아.
     그 한 명만 관찰하는 거잖아.
     사진 찍을 때 전체 풍경이 잡혀도,
     내 눈이 가는 한 곳에 초점 맞추듯이.
     어차피 우리는 전체를 찍을 수 없어.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야.
     한 커트의 프레임이야.
     한 커트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연결해 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거지.
     한 커트의 프레임에서 관찰이 이뤄지고,
     관계가 이뤄져. 찍지 못한 것, 버렸던 것들이,
     나중에 다시 연결돼서 돌아오기도 해.

35년 전 난 너무 섣부르게 관계를 고민했다.
한 커트 한 커트 관찰에 집중했어야 하는 시기였다는 걸,
지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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